399화 승하하다
* * *
목운요와 장공주는 후전에서 태상황을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태상황, 괜찮으십니까?”
겨우 참고 있던 태상황은 피를 한가득 토해 냈다.
“지금 바로 침을 놓아 드리겠습니다…….”
목운요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태상황이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온화한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요아, 넌 이미 최선을 다했다. 이제 갈 때가 됐나 보구나.”
목운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태상황은 침상에 기댄 채 월왕을 향해 손짓했다.
“군월.”
월왕이 냉큼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부황……. 소자, 여기 있습니다.”
“군월한테 할 얘기가 있습니다, 누님.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시지요.”
장공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월왕은 비통한 심정을 애써 감추었다.
“부황, 소자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군월, 네 출생의 비밀에 대해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구나.”
태상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자가 부황의 친자식이라고 전에 친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면 됩니다. 출생의 진실 따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군월의 말에 황제는 큰 위안을 느꼈다.
“그렇게 말해 주니 참으로 기쁘구나. 하지만 네 모후에 대해 꼭 알려 주고 싶은 게 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여인이었다. 네가 그녀에 대해 조금이라도 오해하거나 의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황의 이 마음을 모후께서 아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
옛 추억을 회상하자 황제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짐이 열여섯 살 되던 해에 네 모친과 혼인했다. 그땐 태상황의 총애를 받고 있지 않던 때라, 네 고모님이 친히 나서서 맺어 주었단다. 네 모후의 출신이 워낙 고귀해 혹여라도 짐이 만족스럽지 않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었지……. 그러다 혼례식 날 그녀의 면사포를 걷어 올리고 두 눈이 마주치는데, 이 세상 그 무엇도 그녀와 견줄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시더구나…….”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더 깊어졌다.
“멍하니 있는 짐의 모습에 네 모후가 활짝 웃어 주었지. 그 후로도 네 모후는 짐의 권세와는 상관없이 한결같은 응원을 보냈고, 짐이 황위에 오르고자 하는 계획을 알았을 때도 최대한 힘을 보태려고 애썼다……. 그때 참 힘들었지. 네 고모님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곤경에 빠질 뻔했으니. 네 모후도 함께 연루되어 몸이 크게 상해 한동안 회임이 불가했었지.”
“모후께서 오랜 시간 자식을 가지지 못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그래, 다 내 잘못이다.”
황제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금 슬픔에 잠겼다.
“짐이 점차 세력을 얻기 시작한 뒤, 육대세가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각 집안의 여인들을 비로 들였고, 후궁은 편안한 날 없이 하루건너 사달이 일어났었지. 그때 네 모후가 후궁을 관리하느라 적잖은 억울함을 당했다…….”
비록 직접 보진 않았지만, 월왕은 충분히 그때 당시의 힘든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후 육대세가의 왕권 견제를 참을 수 없어 그들의 힘을 줄이려 했지. 그런데 후궁 비빈들이 자식을 앞세워 반발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짐을 모해해 황자를 황위에 올리려고까지 했다. 모해를 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뒤, 육대세가의 뿌리를 자르고 비빈들도 전부 숙청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황제가 비통한 표정으로 월왕을 보며 물었다.
“군월, 혹시 이런 짐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느냐?”
월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황권 투쟁이란 원래 그런 법이지요. 비빈들을 그대로 방치했다간 대력조가 더욱 혼란스러워졌을 테니 부황께선 전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때 당시 육대세가의 세력은 황권에도 맞설 만큼 무척이나 강했다. 게다가 황자들도 전부 팔이 안으로 굽어, 최후의 수단으로 황자들까지 전부 제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월왕은 문득 큰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부황이 지금의 자식들에게 관대한 것도 그때 당시 친자식을 손수 죽여야만 했던 미안함과 후회 때문일지도 몰랐다.
“네 모후는 짐의 계획을 알고, 어떻게든 짐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지 않으려 직접 나설 생각을 했다…….”
월왕은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모후가 황자들을 죽인 것이 모두 부황을 위해서였다니…….
황제의 말투가 점점 음산해졌다.
“한데 당시 육대세가 중 낙씨 가문의 낙곤은 늘 네 모후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심지어 짐과 혼인한 후에도 여전히 그 마음을 접지 않았다. 결국 네 모후는 계략에 빠져 낙곤에게 겁탈당하고 말았다…….”
월왕은 살기를 내뿜으며 이를 갈았다.
“낙곤이…….”
“짐이 도착했을 때 이미 네 모후는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차마 네 모후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누님을 불러 일단 안정을 되찾게 하였지……. 그러다 네 모후가 회임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아이가 바로 너였다……. 십 년 만에 얻게 된 아이다 보니 잃고 싶지 않았던 네 모후는 누님께 제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단다.”
황제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아만 원한다면 짐은 평생 모른 척하며 아이를 내 친자식처럼 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뻐하며 함께 아이의 미래를 계획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모후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 갔고, 더 이상 짐의 노력으로는 붙잡을 수 없게 되었단다…….”
월왕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후…… 모후가…….
눈을 지그시 감은 황제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네 모후는 연회를 틈타 비빈과 황자들을 한데 모아 독극물로 모조리 독살했다. 짐이 도착했을 때 네 모후는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태연히 기다리고 있더구나……. 짐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며 기꺼이 냉궁에 들어갔지…….”
모후 생각에 월왕은 태상황의 손을 잡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황제가 그런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군월, 네가 아니었더라면 네 모후는 훨씬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너를 냉궁에 홀로 둔 건 짐이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서였고, 월서로 유배 보낸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짐의 탓이니, 네 모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단다.”
“소자,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두 분의 마음만으로도 소자는 충분히 감사함을 느낍니다.”
“다행이구나…….”
이야기를 모두 마친 황제의 두 눈이 점점 빛을 잃어 갔다. 그가 침상에 누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유아…… 유아……. 그리운 내 유아…….”
월왕이 태상황의 손을 꽉 잡으며 소리쳤다.
“부황? 부황!”
“유아……. 그리운 내 유아…….”
“여봐라!”
월왕이 문 쪽을 향해 크게 외치자 장공주와 영군유, 그리고 목운요 일행이 빠르게 들어왔다.
영군유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황, 부디 눈을 떠 보십시오…….”
영군유의 부름을 들은 건지, 태상황이 천천히 눈을 떠 두 형제의 손을 맞잡으며 힘겹게 말했다.
“너희는…… 늘…… 같은 마음…… 이어야 한다…….”
“부황,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장공주를 바라보았다. 입을 열려 했지만 마음과 달리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장공주가 가까이 다가가 태상황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황상, 편히…… 가십시오…….”
그 마음을 읽은 듯, 태상황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꽃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황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는 은하수보다도 빛나는 눈을 한 채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유아, 드디어 만나러 가는구나. 다음 생에는 황제가 아닌 평생 네 곁에 머무는 종이 되어, 이번 생에 진 빚을 갚아 주마…….
“부황!”
방 안에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관들도 울음바다가 되었다.
조종이 마흔아홉 번 울리고, 그 소리가 궁 밖에까지 퍼져 백성들도 다 함께 무릎을 꿇고 애도했다.
* * *
형부 감옥 내.
종소리를 들은 영군진은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부황께서 돌아가시다니, 영군유 그자가 반역을 꾸며 부황을 죽였을 거야! 그 반역자의 짓이 틀림없어!”
그에 옥졸이 손에 들고 있던 채찍으로 힘껏 영군진을 내리쳤다.
“네 이놈! 역적 주제에 감히 황제 폐하를 모함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영군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옥졸을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황제? 영군유가 벌써 등극했단 말이냐?”
“오늘이 바로 즉위식이다!”
그러자 영군진은 돌연 큰 소리로 웃더니, 주변의 볏짚을 마구 뜯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부황! 부황! 어쩜 그리 매정할 수 있습니까! 영군유만 자식이고, 저는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건 편애입니다! 불공평합니다!”
옥졸이 눈살을 찌푸리며 코웃음 쳤다.
“제대로 미쳤나 보군.”
* * *
따스한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백성들의 표정은 한겨울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선황제의 승하가 여전히 짙은 슬픔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월왕부 내, 침상에 기대어 있는 목운요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 못 할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신나게 사과를 먹고 있던 선령은 그런 목운요가 신경 쓰였는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보았다.
“몸이 약간 허한 것 말고는 다른 이상이 없는데,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목운요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춘곤증인가 봐. 영 기운이 나지 않네.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야? 꼬마 사제 만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선령은 표정이 굳어 버리며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귓가에 그놈의 ‘사저, 사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날 놀릴 힘은 있는 걸 보니 죽진 않겠네. 장공주 전하를 돌보랴, 월왕부를 건사하랴. 하루 종일 숨 쉴 틈 없이 바쁠 텐데, 버텨 내려면 많이 먹고 살을 찌워야지. 지금처럼 풀 죽어 있지 말고.”
“알겠어.”
선령의 진심 어린 걱정에 목운요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어설픈 표현에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태상황께서 승하하신 지 열흘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실감이 나질 않아.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나아지겠지.”
“그러게. 누가 뭐래도 현명한 성군이셨는데…….”
선령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