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새 시대가 열리다
* * *
장공주가 황제와 점심을 함께하는 동안 목운요는 유왕비를 찾아가 담소를 나누었다.
“요아, 양심거에 안 가 봐도 되겠느냐?”
“외할머니께서 폐하 곁을 지키고 계세요. 이참에 못다 한 이야기 실컷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두 분의 두터운 정이 참으로 부럽구나.”
민방화가 목운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요아. 높고 큰 황권 아래 쉽게 바뀌는 것들이 참 많다지만, 우리 사이만은 영원히 변함없기를 바란다.”
목운요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그녀는 민방화의 말이 진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각별한 사이라 해도 적절한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자신과 월왕도 유왕의 의심을 받지 않고 무사히 한평생 살아가려면 무언가 방도가 있어야만 했다.
* * *
저녁 무렵, 유왕과 월왕이 양심거에서 즉위식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함께 듣던 목운요가 장난스레 말했다.
“폐하, 저도 마침 고민거리가 있는데 조언 부탁드려도 될까요?”
점심 동안 푹 쉬어서 그런지 황제의 안색은 유난히 좋아 보였다.
“당연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요아 고민이라면 무조건 들어야지.”
“다름이 아니라 하운방과 불선루 규모가 점점 더 커져 가는 반면 저는 혼인한 이상 예전만큼 자유롭게 나설 수 없을 것 같아서, 차라리 하운방과 불선루를 조정에 넘기는 게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황제가 유심히 듣더니 유왕을 쳐다보며 물었다.
“군유, 네 생각은 어떠냐?”
유왕은 바로 거절을 표했다.
“부황, 하운방과 불선루는 제수씨가 오랜 기간 열심히 운영해 온 자산이고 또 백성들에게도 유익한 사업인 만큼, 제수씨가 직접 운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두 가게의 수익을 듣고 크게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빼앗아 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요아, 군유가 거절했으니 네가 계속 운영하는 걸로 해야겠구나.”
그에 목운요가 고개를 살짝 떨구며 부끄러운 듯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사실 이런 제안을 드린 건 제 사심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점포가 점점 많아지다 보니 제가 해야 할 일들이 그만큼 많아져 분신술이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또한 월왕 전하와 혼인했으니 하루빨리 아들딸을 낳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지금 이대로라면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운요의 말에 황제는 귀 끝까지 빨개진 월왕을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경릉성과 서릉 백성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보답할 길이 없어 밤잠을 설칠 정도로 고민을 많이 해 봤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아주버님께서 곧 황위에 오르시니, 이참에 두 사업을 조정에 넘기면 훌륭한 사람을 뽑아 더욱 잘 운영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황제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이 일은 너희들끼리 잘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거라. 짐은 더 이상 조정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요아, 네 모친의 음식이 유난히 생각나는구나. 요즘 통 무얼 먹지 못하는데 짐을 위해 죽을 좀 쒀다 줄 수 있겠느냐?”
“안 그래도 한창 준비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때마침 허연한의 음식이 도착했다.
사실 허연한의 음식 솜씨가 아무리 뛰어난들 수라간 장인들을 따라갈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딸아이를 위해 어떤 음식이든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려고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해 왔다.
그래서인지 정성 들여 끓인 흰죽에 반찬 서너 가지만으로도 황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금세 한 그릇을 비워 낼 수 있었다.
식사까지 하고 난 황제의 안색은 한층 더 밝아졌다. 다만 숨 쉴 때마다 가슴이 무겁게 오르내려 힘겨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황제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목운요 일행은 서둘러 방을 나왔다.
이만 월왕부로 돌아가려는데, 영군유가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하운방과 불선루를 조정에 넘기겠다는 제안이 백성들을 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의심받을 여지를 없애기 위함임을 잘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내 맘을 더 불편하게 하는구나. 난 절대로 아우를 의심하고 그러지 않을 거야.”
월왕이 웃으며 답했다.
“형님, 오해이십니다. 고모님께서 물려주신 사업도 있다 보니, 도저히 두루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니 형님, 맘 편히 받아 주십시오. 다만 제가 열심히 키워 낸 일손들은 함께 드릴 수 없으니 하루빨리 적합한 사람을 찾아야 할 겁니다.”
월왕의 진심 가득한 눈빛에 영군유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고맙네, 아우. 즉위식이 끝난 후에 절차에 따라 상주서를 올리게. 그때 문무백관들 앞에서 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지.”
두 사람의 진심을 봐서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유왕은 마음 깊이 다짐했다.
* * *
드디어 즉위식 날이 되었다.
목운요는 궁장 차림으로 품격을 뽐내며 참석 준비를 마쳤다.
금란과 금교는 그런 목운요의 모습에 넋이 반쯤 나갔다.
“정말 어떤 의상이든 찰떡같이 잘 어울리십니다.”
앳된 느낌이 사라진 목운요는 마치 활짝 핀 한 송이의 장미와도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넘쳐 흘렸다.
그녀는 머리에 마지막으로 봉황 비녀를 꽂은 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야께선 준비 마치셨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월왕이 준비를 마치고 온 것이었다.
검붉은색 옷에는 금색 구름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옥으로 된 허리띠와 기린 문양 신발을 신은 모습은 위엄과 고귀함이 넘쳤다.
목운요는 그런 월왕을 보고 못내 감탄했다.
“사야, 그러고 보니 친왕복을 입은 모습은 처음 보네요. 멋있어요.”
월왕도 목운요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모 앞에서는 평범한 장식에 불과했다.
“요아야말로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그는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왕비라는 사실이 내심 뿌듯했다.
“사야, 늦지 않도록 서둘러야겠어요.”
목운요가 그의 옷깃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즉위식을 치르기 전에 우선 천단에서 천지신명께 절을 올려야 했다.
제천 의식에는 친왕과 문무백관들만 참석할 수 있어 월왕은 곧장 태화전으로 향했고, 목운요는 장공주를 찾아갔다.
옥화궁에 도착한 목운요가 인사 올렸다.
“외할머니, 어머니를 뵙습니다.”
“어서 오너라.”
장공주가 온화한 미소로 반겼다.
이틀간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인지 장공주의 눈 밑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요아, 마침 너에게 전할 물건이 있단다.”
“무슨 물건인가요?”
장공주가 곡 마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곡 마마가 긴 상자 하나를 가져다 놓은 뒤 한쪽으로 물러났다.
“요아, 꺼내 보거라.”
상자를 본 목운요는 어쩐지 성지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열어 보니 과연 성지였다.
“외할머니, 이게…….”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조심스레 성지를 펼쳐 내용을 읽은 목운요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외할머니…….”
성지에는 유왕이 제 본분을 지키지 못할 경우 월왕이 제왕을 탄핵하고 새로운 군주를 세울 수 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목운요가 성지를 손에 쥔 채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어명은 폐하께서 비밀리에 남겨 두신 것이다.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네가 잘 간수해야 한다. 앞으로 이 성지가 쓰일 일이 없길 바라지만, 권력이란 사람을 쉽게 바꾸다 보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유용하게 쓰길 바란다.”
“외할머니, 저희는 유왕 전하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장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자에서 그림자 호위를 동원할 수 있는 용패를 꺼내 목운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요아, 성지를 사용할지 말지의 여부는 네가 충분히 잘 판단하리라 믿는다. 전에 보류해 뒀던 이 증표도 너에게 전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목운요가 용무늬가 새겨진 옥패를 만지작거리며 장공주를 바라보았다.
“외할머니, 걱정 마세요. 이 성지와 용패 모두 잘 간수 하여 최적의 상황에만 꺼내 쓰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로 폐하와 외할머니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 * *
제천 의식을 마친 유왕은 황제 의상을 입고 힘 있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소자, 부황을 뵙습니다!”
태상황이 옥좌에 앉아 새로운 제왕의 절을 받았다. 이젠 어엿한 군주의 모습을 한 영군유에 그는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영군유의 성격상 황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가르침으로 솔직하고 단순했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번듯한 제왕의 모습으로 점점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태상황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그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를 본 영군유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부축하고 싶었지만 태상황이 눈짓으로 그를 말렸다. 영군유는 애써 슬픔을 감추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제가 된 이상, 늘 신분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해야만 했다. 자신이 앞으로 짊어질 것은 천하에서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한없이 무거운 권력이기 때문이다.
태상황은 서립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군유, 너는 짐이 직접 고른 후계자인 만큼 기대하는 바가 아주 크다. 앞으로 역대 황제들의 의지를 이어받아, 대력조를 더욱더 부흥시키기를 바란다.”
“소자, 명심하겠습니다.”
태상황이 옥새를 영군유의 손에 건네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서립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후전으로 향했다.
한데 그 순간, 태상황의 호흡이 가빠지며 그가 손으로 입을 꽉 막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서립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태상황…….”
영군유는 눈시울이 빨개진 채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그가 굳센 눈으로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오늘부로 짐이 대력조 황제로 등극하며, 칭호는 승계(承啓)로 하고 올해를 승계 원년으로 정하노라!”
문무백관이 일제히 무릎을 꿇어 세 번 절을 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하늘을 뒤흔들 만큼 우렁찬 소리가 황궁 전체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