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97화 (397/442)

397화 생사에 대한 체념

“그래요. 제가 보낸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전혀 예상치 못했나 보죠?”

목운요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 북강은 야심이 꽉 찬 면이 참 닮았죠. 비록 위험 부담이 크더라도 조심스레 잘 인도하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그가 실눈으로 목운요를 노려보았다.

“내가 임강 강둑을 무너뜨린 걸 부황께 알린 것도 네 짓이냐?”

목운요가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열심히 증거를 수집한 덕분에 임강 강둑 폭발 사건의 배후가 당신이라는 걸 알게 됐고, 거기에 더해 소금세 횡령 사건을 계획했죠. 심지어 당신이 눈이 멀고 불구가 된 것도 다 계획된 것이죠.”

목운요가 아니었다면 릉왕은 절대로 그리 쉽게 약을 바꿔치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왕은 가슴속에 화가 들끓어 올랐다.

“대체 왜? 왜 나를 이토록 증오하는 거지?”

목운요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꾹 삼켜 냈다.

“인과응보라고 해 두죠.”

진왕이 문득 몸을 일으키며 철창 앞으로 돌진했다. 족쇄가 요란스레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월왕이 재빨리 목운요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왕은 감옥에서도 여전히 미모가 빛이 나는 목운요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인과응보라니? 난 널 해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왜 유독 나한테만 이러는 것이냐?”

목운요가 두 눈을 내리뜨며 애써 증오에 찬 눈빛을 가렸다.

“당신이 유왕비를 다치게 했죠?”

순간 진왕은 당황해하며 서툴게 발뺌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게 잔인한 수단으로 상대에게 고통을 가하는 건 영락없이 당신의 수법이죠.”

“나에 대해 아주 잘 아는군?”

“당신 소행임을 인정하는 건가요?”

“그래. 납치극을 벌인 것도, 밀정을 통해 릉왕을 부추겨 유왕비를 유산에 이르게 한 것도 전부 내 생각이었다. 육냥, 그자한테 약을 먹여 두 사람을 같이 가둔 것도 신의 한 수였는데, 릉왕 이 등신 탓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

목운요가 비웃음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 같진 않아요. 눈앞의 이익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 법이죠. 육냥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지키려 스스로 팔다리를 부러뜨리기까지 했고요. 그런데 당신은 이번 패배 이후에 뭐가 남아 있죠?”

진왕은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의 주변엔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모비…… 모비는 어디 계시느냐?”

“진비 말인가요? 북강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폐하께 사실을 알리려다가 살해당했어요.”

진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짓말하지 마, 그럴 리 없다!”

“맞아요. 방금 한 말은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될 사실이에요. 진비 마마께선 절대로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폐하께 소식을 전할 분이 아니죠. 외려 폐하의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식을 듣고 폐하의 탕약에 손을 대려다가 발각되어 지금은 궁녀로 강등돼 빨래터에서 일손을 돕고 있어요.”

진왕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궁지에 몰린 짐승 같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운요는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죄는 지은 대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진왕 전하, 부디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녀가 이내 뒤로 돌자, 월왕이 그녀의 외투를 정리해 주며 손을 잡아 왔다.

“요아, 그만 돌아가자.”

“네.”

목운요가 월왕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진왕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네가 말한 인과응보의 진정한 뜻이 대체 무엇이냐?”

목운요가 단순히 유왕비의 복수 때문에 자신을 적대시한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첫 만남 때부터 그녀의 태도에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적대감이 느껴졌다.

목운요는 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분에 못 이긴 진왕은 철창을 흔들다가 가슴 통증이 심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시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거의 회복된 두 다리가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힘껏 두 다리를 두드려 보기도 하고, 심지어 족쇄로 내리찍어 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절망이 온몸을 덮쳐 왔다. 그는 또다시 영락없는 불구가 된 것이다…….

* * *

이튿날 아침, 금란이 목운요의 머리를 빗겨 주는 사이 금교가 소식을 전했다.

“어제 두 분께서 감옥을 떠난 후, 진왕이 족쇄로 미친 듯이 자신의 다리를 내리찍기 시작해, 옥졸이 도착했을 땐 이미 두 다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답니다.”

목운요가 비녀를 골라 머리에 꽂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앞으로 진왕과 관련된 소식은 특별한 내용이 아닌 이상 일일이 전하지 않아도 돼요.”

충분히 복수했으니 그녀도 이젠 내려놓고 싶었다.

“네.”

금란이 어두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귀걸이를 들어 보였다.

“오늘은 이 백옥 순금 귀걸이가 더없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오늘 날씨도 포근하고 좋으니 하운방에서 새로 가져온 치마를 입으시는 건 어떨까요?”

목운요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폐하께서 여전히 편찮으시고 외할머니께서도 근심이 많으시니 조금이라도 밝은 분위기를 내는 게 좋겠어요.”

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요즘, 지나치게 단아한 의상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단장을 마친 목운요는 성 공공한테 신신당부를 한 뒤 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황제에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남은 만큼, 그 일분일초가 더없이 소중했다.

정전 앞에 도착한 그녀는 안에서 들려오는 논쟁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이 공공은 목운요를 보자마자 마중 나와 인사를 올렸다.

“소인, 월왕비를 뵙습니다. 폐하와 장공주 전하 두 분께서 바둑을 두는 중이십니다. 왕비께서 오시면 곧바로 안으로 들이라 분부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이 공공.”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침전에 들어선 목운요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침상에 기대어 있는 황제의 옆에는 바둑판이 깔려 있었는데, 그 앞에서 장공주가 수를 무르려는 황제의 손을 딱 잡고 있었다.

“황상, 아직도 어릴 때처럼 어리광을 피우시면 어떡합니까?”

“누님, 이번 한 번만 봐주시죠. 팔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잘못 둔 것입니다.”

억지를 부리는 황제는 기력이 부족해 보이긴 했으나 정신은 아주 맑아 보였다.

“이미 두 번이나 그 핑계로 수를 무르셨습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남아일언중천금, 한 번만 더 봐주시지요.”

“황상께서는 이제 태상황이십니다. 절대 안 됩니다.”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던 목운요가 웃으며 인사 올렸다.

“운요, 폐하와 외할머니를 뵙습니다.”

황제는 목운요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요아, 어서 와서 바둑 한판 두자꾸나. 너와 바둑 둘 때가 가장 흥미롭거든.”

물론 장공주는 한 치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선 이번 판부터 끝내시죠. 아무래도 제가 이긴 것 같군요”

그때, 황제의 손이 힘없이 바둑판 위에 툭 떨어졌다.

깜짝 놀란 목운요가 다가가 살피려던 찰나, 그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님, 이를 어떡하면 좋죠. 마침 팔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판을 어지럽혔네요. 아무래도 이번 판은 없던 일로 해야겠습니다.”

어린아이같이 어리광 피우는 황제의 모습에 장공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번엔 절대로 봐주지 않을 겁니다.”

황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목운요를 향해 말했다.

“요아, 어서 앉거라. 특별히 세 번 무를 수 있는 기회를 주마.”

내심 안도한 목운요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결국 연속으로 두 판이나 이긴 황제의 얼굴에 그제야 웃음꽃이 피었다.

바둑을 마친 그는 서립을 시켜 목운요가 선물한 대력조 강역도를 가져오게 한 뒤, 북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님, 기억하시는지요? 짐이 등극한 지 다섯 해째 될 무렵 북강에서 침범한 적이 있었는데, 짐이 친히 출정해 그들을 참패시켰었지요.”

장공주도 추억에 젖으며 회상했다.

“어찌 잊겠습니까. 그때 황상께서 직접 쏜 활이 북강의 깃대를 부러뜨려, 대력조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 단번에 북강 방어선을 뚫었었지요.”

황제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활을 가져와 아이처럼 자랑하기 시작했다.

“요아, 이게 바로 그때 그 활이다. 넌 아마 당기지도 못할 것이다.”

목운요는 반신반의하며 있는 힘껏 당겨 보았지만, 손가락만 빨갛게 부어오를 뿐이었다.

“폐하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북강인들의 간담이 서늘해진 게 분명합니다.”

황제는 한껏 흥이 올라 왕년에 출정했을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렇게 한참을 말하다 침상에 기댄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장공주는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 준 뒤 목운요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계단 옆에 서서 멀리 보이는 태화전을 바라보았다. 위엄을 풍기는 대전이 햇빛을 받아 눈부신 빛을 발했다.

“요아, 진왕 소식은 들었느냐?”

“네, 아침에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 폐하께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 남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편히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네.”

두 시진을 자다 깬 황제는 물을 두어 모금 마신 뒤, 곧바로 전부 토해 냈다.

사흘이란 시간은 목운요가 간신히 얻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겨우 버티는 것이다 보니, 점점 더 기력이 빠지고 식음이 불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공주가 안쓰러움에 황제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려 주었다.

“황상께서 먹을 복이 참 없으시군요. 오늘 가장 좋아하시는 쏘가리와 오리고기가 나온다던데, 어쩔 수 없이 냄새만 맡아야겠네요.”

“누님께서 짐의 몫까지 맛있게 드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황제가 잔잔한 미소를 짓자, 장공주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답했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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