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마지막 사흘
서릉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목운요는 쉴 새 없이 손수건으로 황제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사금, 얼마나 걸리지?”
“일각 후면 궁에 도착할 겁니다.”
“선령 쪽은?”
“사기가 알리러 갔습니다.”
“그래.”
이내 궁문이 활짝 열렸다. 피비린내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였다.
선령이 마차에서 내리는 목운요를 반겼다.
“운요, 폐하께선 좀 어때?”
“상황이 좋진 않아. 내가 말한 물건 챙겨 왔지?”
선령이 냉큼 들고 있던 상자를 열어 보였다.
“위급할 때 쓰는 약들을 모두 챙겨 왔어.”
그들은 곧장 황제의 거처인 양심거로 향했다.
목운요가 산삼 한 조각을 황제의 입에 넣으려고 하자, 선령이 손목을 잡으며 재차 확인했다.
“운요,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목운요가 생각해 낸 방법은 구전금침(九轉金針)으로 황제 몸속의 원기를 전부 빼낸 다음 산삼으로 다시 원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다만 현재 황제의 몸 상태가 워낙 나빠, 침을 놓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혹시라도 치료하는 도중에 죽는다면, 기필코 누군가가 이를 빌미로 목운요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목운요는 비장한 표정으로 선령의 손을 치웠다. 지금 하려는 일이 얼마나 큰 위험 부담이 있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난 이미 결정 내렸어. 그러니 네가 도와줘.”
“……그래.”
할 수 없이 선령은 은침을 집어 들었다. 목운요 혼자 모든 위험을 감당하게 둘 순 없었기 때문이다.
목운요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산삼 조각을 황제의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선령과 합을 맞추어 빠르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장시간 집중하는 바람에 목운요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마지막까지 신중을 기하며 혈 자리에 침을 내리꽂았다.
태의들도 선별한 약재로 탕약을 끓여 목운요의 곁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때, 황제의 온몸에 경련이 일더니 순간 호흡이 멈춰 버렸다.
당황한 목운요는 다급히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아직 월왕 전하께 출생의 비밀을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황제의 맥을 짚어 보던 선령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운요, 아직 의식이 있어.”
목운요는 곧장 태의가 준비해 둔 탕약을 먹였다.
그러자 잠시 후, 멈췄던 황제의 호흡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선령은 목운요의 손을 덥석 잡으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운요, 해냈어! 우리가 폐하를 구해 낸 거야!”
목운요는 다리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황제가 무사하다는 이야기에 태의들은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목운요와 선령은 침을 하나하나 다시 빼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처치가 끝나니 장공주가 도착했다.
“외할머니.”
“요아, 황상께선 어떠하시느냐?”
“사흘 정도의 시간은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엔…… 아무래도…….”
목운요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공주도 애써 눈물을 삼켜 보았지만, 결국 저도 모르게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아가, 애썼다. 사흘…… 사흘만이라도…… 참 다행인 거지.”
“외할머니, 너무 슬퍼 마세요.”
“그래.”
장공주가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유왕과 월왕을 데려오너라. 그리고 삼품 이상의 관원들을 전부 궁으로 소집하고.”
“네.”
* * *
천천히 눈을 뜬 황제가 눈앞의 익숙한 얼굴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누님…….”
장공주도 미소 지으며 꾸짖듯 말했다.
“황상께서 이리 쉽게 쓰러지실 줄 알았다면 절대로 춘경 대전에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무능한 릉왕과 진왕뿐만 아니라, 이렇게 효심이 가득한 아이들도 있지 않습니까.”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서 무릎 꿇고 있는 유왕과 월왕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깨어난 황제를 보고 감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부황!”
두 사람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눈물을 쏟아 냈다.
그 모습에 황제는 큰 위안을 느꼈다.
“누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렇게나 착한 아이들을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되지요.”
“잘 아시니 다행이네요.”
장공주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녀가 서립을 향해 물었다.
“대신들은 다 모였느냐?”
“네, 삼품 이상 관원들이 전부 모였습니다.”
“안으로 들이거라.”
관원들은 차례대로 양심거로 들어와 황제를 향해 인사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침상에 기댄 황제의 안색이 호전되어 보이자, 몇몇 관원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경들이 오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짐을 보호해 줘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네.”
“폐하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누님, 성지(聖旨)를 꺼내 주시죠.”
비록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긴 했으나, 말을 하기엔 여전히 힘에 부쳤다. 그래도 어떻게든 군유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봐야 했다.
장공주가 상자에서 성지 하나를 꺼내 든 다음 위국후를 앞으로 불렀다.
“위국후. 자네는 폐하의 신임을 얻은 신하이니 이걸 자네가 읽어 주게나.”
“예.”
위국후가 공손히 성지를 받아 들었다.
관원들은 무릎을 꿇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경건한 자세로 어명을 받들었다.
“짐을 닮아 신중한 인품과 강인한 의지를 가진 둘째 황자 영군유에게 황위를 전승하고자 하니, 황자들은 힘을 모아 새로운 군주를 높이 세우고, 신하들은 충성을 다해 보필하여 사직을 받들어야 하니라.”
모두의 예상대로 황위 계승자는 유왕이었다.
그동안 그의 활약상을 직접 확인했기에 신하들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장공주는 성지를 유왕에게 건네며 말했다.
“군유, 항상 초심을 잊지 말고 부황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거라.”
“소자, 부황의 뜻을 가슴 깊이 새기고 부황의 의지를 이어받아 대력조를 더욱더 번성으로 이끌겠습니다!”
장공주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황상, 이틀 뒤가 길일이라 하니 그날 즉위식을 치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록 촉박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황제의 살날이 머지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말씀대로 하지요.”
장공주가 신하들을 향해 섰다.
“황상의 어명이 내려졌으니, 여기 계신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의 충성심 그대로 새로운 군주를 보필하여야 합니다! 이틀 뒤 즉위식에 앞서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해, 태상황(太上皇, 자리를 물려준 황제)과 폐하께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길 바랍니다!”
영군유가 일어나서 성지를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그에 신하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소신,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순간부터 영군유는 진정한 대력조의 황제가 된 것이다.
* * *
“요아…….”
양심거 밖으로 나온 월왕이 근심 가득한 눈을 한 채 목운요를 불렀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목운요를 끌어안고 있는 월왕의 눈빛에도 슬픔이 어려 있었다.
목운요는 한참을 안겨 있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요아, 일단 왕부로 가서 좀 쉬거라.”
“사야도 같이 가실 건가요?”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해 월왕이 곁에 함께 있어 주길 바랐다.
“난 형부 감옥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그곳에 갇혀 있는 진왕과 곽경주를 떠올리자 목운요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사야, 저도 같이 갈게요.”
“그래, 알겠다.”
진왕에 대한 목운요의 마음속 응어리를 알기에 월왕도 차마 만류하지 못했다.
형부 감옥은 깊숙한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월왕은 목운요에게 외투를 걸쳐 주었다.
“지하 감옥이라 추우니 감기에 안 걸리도록 조심하거라.”
월왕의 배려에 가슴이 따뜻해진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길을 안내하는 관리는 두 사람을 감옥 앞까지 안내한 뒤 공손히 물러났다.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든 진왕은 눈앞의 두 사람을 보고 입가에 비소를 걸쳤다.
“복수하러 온 것이냐?”
월왕은 표정 변화 없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아니.”
“하긴, 죽음을 앞둔 사람한테 복수해 봤자 의미가 없겠지. 그럼 왜 온 것이지? 설마 걱정되어서 왔느냐?”
그에 목운요가 진왕의 손발에 채워진 족쇄를 훑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유왕 전하께 황위를 계승한다는 어명을 내리셨고, 이틀 뒤에 즉위식을 치를 예정입니다.”
진왕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아무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꼭 알려 주고 싶었어요. 온갖 잔머리를 굴려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나 봐요.”
목운요는 나지막이 진왕을 들쑤셨다.
“잔머리로 따지면 너희 둘이 훨씬 대단하지. 내 계획을 다 알면서 그걸 역이용해 나를 나락으로 빠뜨렸으니, 거기에 비하면 난 애송이 아닌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른 건 당신의 자업자득이죠. 황자 신분으로 북강과 결탁할 생각을 하다니. 우리가 막지 않았다면 대력조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이나 해 봤나요?”
진왕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목운요의 얼굴에 남겨진 멍 자국을 보고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내가 북강과 연락한 사실을 언제 알게 된 것이냐?”
“연락하기 전부터 알았죠.”
“연락하기 전부터……?”
진왕이 어리둥절해하다가 처음 북강에서 받은 서신이 생각났다.
“설마 그 서신이…… 네가 보낸 거였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