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춘경 대전
아침 일찍 장공주와 허연한을 모시고 보화사로 향했던 목운요가 밤이 늦어서야 서릉에 돌아왔다.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월왕은 그녀를 보자마자 품에 안으며 물었다.
“요아, 무사히 다녀왔느냐?”
목운요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통행금지가 내려지기 전에 빠르게 월왕부로 향했다.
월왕부로 돌아온 목운요는 목욕을 마친 뒤 거울 속에 비친 월왕을 바라보았다.
“사야 부하 중에 역용술(易容術, 모습을 바꾸는 변장술)이 그토록 뛰어난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누가 진짜인지 전혀 구분이 안 가더라고요.”
보화사 주지 스님은 장공주의 오랜 벗이었다.
그가 믿음직스럽다는 걸 확인한 목운요는 장공주와 허연한을 보화사로 옮긴 뒤, 역용술에 능한 두 사람을 장공주와 허연한으로 변장시켜 궁으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네가 놀랄 만한 사람이 아직 많다. 나중에 천천히 소개시켜 주마.”
“좋아요.”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이 잠을 설쳤다.
* * *
삼월 초이튿날, 월왕은 아침 일찍 기상했다. 목운요가 갑옷으로 갈아입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춘경 대전은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다. 하늘에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인 만큼,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됐다.
월왕은 이번 연회에서 황제의 안전과 병력 배치를 맡은 참이었다.
목운요가 갑옷 입는 걸 도와주려 일어나자 월왕이 냉큼 말렸다.
“요아, 갑옷이 무거워서 감당하지 못할 거다.”
그에 목운요는 그가 갑옷을 다 입고 나서야 다가가 옷깃과 소매만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여러 가지 환약과 약 가루를 챙겨 주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사야. 사야의 손에 피가 묻어도 좋으니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요.”
월왕이 다정히 그녀를 품에 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꼭 무사히 돌아오마. 진왕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너도 몸조심하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진왕이 어떤 짓을 벌일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만든 향냥을 그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사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되길 바라요.”
* * *
춘경 대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이 교외에 있는 태래 장원으로 향했다.
목운요와 유왕비는 같은 마차를 타고, 사금과 사기가 동행했다.
흔들리는 마차의 창 너머에서 진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황자 의복을 입은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백마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품위 넘치는 그 모습 뒤에 숨겨진 탐욕과 야망이 목운요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민방화가 차 한 잔을 따라 목운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요아, 위험천만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 줘서 고마워.”
올해의 춘경 대전은 예년과 달랐다. 진왕과 이씨 가문이 이번 행사에서 수를 쓸 걸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하는 건,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목운요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형님, 천만의 말씀입니다. 춘경 대전 행사에 왕비로서 참석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하여튼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데에 재주가 있다니까.”
황제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기 위해 여유롭게 움직이다 보니, 태래 장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목운요는 드넓게 펼쳐진 벌판을 보고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지정된 방에 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유왕비를 찾아가 장원 구경에 나섰다. 태래 장원은 춘경 대전을 치르기 위한 곳인 만큼 무척이나 화려했다.
그들은 날이 완전히 어둑해지고 나서야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자시까지 바삐 돌던 월왕은 일이 얼추 마무리되자 목운요가 걱정되는 마음에 곧장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목운요가 탁자 앞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졸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에 깨어난 그녀가 월왕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야, 오셨네요.”
잠이 덜 깬 채로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월왕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안아 주고 싶었지만 삐걱대는 갑옷 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요아,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었느냐?”
“사야 없이 혼자서는 잠이 오질 않네요.”
목운요가 갑옷을 입은 월왕의 품에 파고들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갑옷이 몸에 닿자 잠이 확 깨었다.
월왕이 차가워진 그녀의 손에 입김을 불며 말했다.
“가서 옷 갈아입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네, 따뜻한 물 준비해 뒀어요.”
미리 따듯한 목욕물에 체력 회복에 좋은 약재까지 담가서 준비해 둔 참이었다.
덕분에 몸이 홀가분해진 월왕은 목운요를 안고 단잠에 빠졌다.
방 안에는 촛불 타는 소리만 들려왔다. 초 한 대가 거의 다 타들어 갈 때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월왕은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장검을 들었다.
“요아, 여기 가만히 있거라. 내가 가서 상황을 살펴보마.”
목운요도 재빨리 옷을 걸치고 소매에 월왕이 선물한 비수를 숨긴 채 긴장한 모습으로 침상에 앉았다.
하지만 이각쯤 지나도 아무런 이상이 없자, 목운요는 그제야 긴장을 늦추었다.
마침 사금이 들어와서 알렸다.
“소인이 알아봤더니 내일 대전에서 사용할 농우가 갑자기 죽어서 일어난 소동이었습니다.”
목운요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계속 지키고 있지 않았나요? 왜 하필 전날 밤에 죽은 거죠?”
춘경 대전은 새벽부터 시작될 텐데, 이제 와서 다른 농우를 구해 오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원인을 알아냈나요?”
“정확한 건 모르겠으나, 농우가 거품을 문 채로 흉하게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진왕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
그때, 시녀 한 명이 와서 유왕비가 부른다는 말을 전했다.
“조금 뒤면 춘경 대전이 시작되니 준비하고 간다고 유왕비께 전하거라.”
시녀는 목운요의 곁에서 경계 중인 사금과 사기를 보더니, 곧바로 뒤돌아 나갔다.
“왕비께서 미리 대비하셔서 다행이에요.”
사금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목운요와 민방화는 미리 약속을 해 뒀었다. 서로에게 말을 전해 주는 이가 인사 올리기 전에 박수 두 번을 쳐 신분을 확인시키기로 한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 * *
시간이 흘러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농우가 갑자기 죽어 버렸기에 황제의 안색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그가 논 위의 빨간 명주를 묶은 쟁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이 비록 춘경 대전이긴 하나, 신하들의 마음이 농사와는 멀어진 지 오래고, 이대로 가다간 필시 그 속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노라.”
관원들은 갑작스런 황제의 발언에 어안이 벙벙했다. 혹시 농우가 죽은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것일까?
“어젯밤 농우가 죽은 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농우가 바닥에 눈물을 흘리며 짐을 향해 세 번 절한 뒤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그 후 선인 한 명이 내려와 짐에게 계시를 주었는데, 농우를 데려간 선인의 깊은 뜻은 짐의 신하들이 직접 농사를 짓기 바라는 것에 있었다. 짐이 쟁기를 집을 테니, 자네들은 쟁기로 밭을 갈도록 하거라.”
밭을 갈라니, 설마 자신들을 소처럼 부리려는 건가? 관원들은 어리둥절한 채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반박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목운요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꿈’대로 선인의 계시인 이상, 농우가 갑자기 죽은 것은 불길함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내 춘경 대전이 시작되었다.
황제가 절을 올리고 일어서자, 유왕이 다가가 손에 든 향을 향로에 꽂았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관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경들, 그럼 이만 밭일을 시작하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차려입고 온 관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쟁기를 끌며 밭을 갈기 시작했다.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대전 시작 전에 한차례 밭을 고르는 작업을 마쳤기에, 생각보다 밭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복을 기원하기 위한 행사다 보니, 밭을 두 고랑 정도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드디어 끝날 기미가 보이자 관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데 바로 그때, 손에 잡고 있던 밧줄이 느슨해지더니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폐하!”
유왕과 월왕은 빠르게 다가가 황제를 부축했다.
쟁기가 두 동강이 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황제는 바닥에 넘어졌으리라.
관원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그 순간, 이경주가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폐하. 농우 급사에 이어 쟁기까지 부러지다니, 아무래도 불길한 징조임이 확실합니다.”
유왕은 이경주를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이 승상, 농우의 급사는 신하들이 농경의 어려움을 몸소 체득하기 위한 선인의 뜻이라고 부황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길하다고 말하는 건 부황의 말을 의심하는 겁니까?”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매년 순조로웠던 춘경 대전이 올해에만 유독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으니, 하늘의 경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만사에 유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황제가 평온한 표정으로 이경주를 바라보았다.
“경의 말대로라면 하늘이 짐에게 무슨 경고를 하려는 것인가?”
“폐하, 소인 생각에는…….”
이경주가 대답하려는 그때, 향이 꽂혀 있던 커다란 향로가 목운요 쪽으로 쓰러졌다.
다행히 사금과 사기가 잽싸게 그녀를 잡아당긴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경주는 그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목운요를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 이 모든 불길함의 근원은 바로 월왕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