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꿀 떨어지는 신혼
두 사람은 옥화궁에서 식사를 마친 뒤, 황제와 장공주를 찾아가 인사 올리고 나서야 궁을 나왔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월왕은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요아, 장모님이 만드신 약밥을 왜 그리 좋아하는 것이냐?”
목운요는 뜻밖의 질문에 멈칫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사실 이전의 그 꿈속에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해 준 음식이 약밥이었거든요. 형편이 좋지 않다 보니 어머니께서 비녀를 팔아 겨우 한 끼를 준비해 줬지요…….”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구나.”
목운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보니, 그때를 회상하더라도 예전만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진 않았다.
“괜찮아요.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꿈인 것에 감사하고, 어머니가 제 곁에 무사히 살아 계신 것에 감사해요.”
월왕은 그녀를 세게 끌어안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빨리 이 모든 일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구나. 그래야 부황, 외할머니, 장모님을 모시고 같이 남해 구경을 갈 텐데…….”
“사야, 저희가 함께라면 필시 이겨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 * *
유왕은 국정을 돌보며 점차 관원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그를 차기 군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보좌해 나갔다.
이에 그는 계획대로 이씨 가문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다.
우선 이씨 가문을 따랐던 관원들을 하나하나 조사해, 문제가 발견될 시 선처 없이 처벌을 내렸다. 설사 본인은 떳떳하더라도 그 가족, 친지, 동료들까지 엮여 있다 보니, 꼬투리를 잡는 건 아주 쉬웠다.
그로 인해 조회 때마다 이경주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다.
사실 이경주는 황제가 아무리 유왕에게 국정을 맡기더라도, 완전히 권력을 포기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본인이 수십 년 동안 일군 대력조를 그리 쉽게 아들에게 건넬 리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 달리, 황제는 모든 미련을 내려놓고 온전히 유왕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결과에 이씨 가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릉왕의 편을 들어 주는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그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 * *
시간은 흘러 이월 중순에 들어섰다.
목운요와 민방화는 정자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하도 오랫동안 밖에 안 나갔더니 온몸이 뻐근해 죽을 것 같아.”
유산과 과다 출혈로 민방화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정신 상태는 많이 좋아져 있었다.
“곧 봄이고 형님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니, 바람 쐬고 싶을 땐 언제든지 나갔다 오셔도 돼요. 물론 너무 오랫동안 바깥에 있는 건 안 되지만요.”
민방화가 봄꽃처럼 화사한 목운요의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아는 참 세심하기도 하지. 나중에 훌륭한 모친이 될 거야.”
아이 얘기에 목운요는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놀리지 마세요, 형님.”
민방화가 아무렇지 않게 아이 얘기를 꺼내는 걸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이 평온해진 것 같아 한시름 놓였다.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인걸.”
민방화의 시선이 목운요의 목 쪽으로 향했다.
그에 목운요는 손으로 재빨리 목을 가리며 월왕을 원망했다.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미뤄졌던 두 사람의 첫날밤이 드디어 치러졌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온몸이 화끈거렸다.
한번 물꼬를 트자, 그 뒤로 월왕은 매일 밤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어젯밤은 흥분한 나머지 그녀의 목에 진한 입맞춤 자국까지 남겼다.
어떻게든 가려 보려고 깃이 높은 옷을 골라 입었건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민방화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왜 이리 덥나 했더니, 옆에 활활 타오르는 난로가 있었구나.”
“형님, 자꾸 놀리시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
“알겠어, 장난 그만 칠게.”
목운요는 얼른 차를 마시며 화끈거림을 가라앉혔다.
그때, 시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아뢰었다.
“왕비 마마, 진씨 가문에서 생신 선물을 드리러 부인과 소저가 오셨습니다.”
민방화가 웃음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로 모시거라. 옷 갈아입고 바로 가지.”
조정 내 유왕의 권세가 커지다 보니 민방화에게 선물 공세를 하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진씨 가문에서 부인과 딸까지 동원시킨 걸 보니, 뭔가 깊은 속셈이 있어 보였다.
목운요는 최근 들어 서릉에 나돌고 있는 소문이 떠올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민방화를 바라보았다.
“형님…….”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민방화가 웃으며 물었다.
“형님, 요즘 조정 관원들이 자신의 딸을 유왕부로 보내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민방화의 성격을 알다 보니, 목운요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얘기했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지. 진씨 가문 아가씨도 그중 한 사람인걸.”
“한데 왜…….”
“걱정할 거 없다.”
민방화는 부러우면서도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눈빛으로 목운요를 응시했다.
“요아, 난 유왕한테 시집간 첫날부터 내 사명과 책임감을 깨달았단다. 결코 쉽지 않은 이 길을 내 스스로 선택한 이상, 그에 따르는 희생도 짊어져야지.”
“……할머니께서 그러셨어요. 형님께서는 훌륭한 황후가 되실 거라고요.”
“고맙다, 요아. 난 네가 월왕과 지금처럼 평생 알콩달콩 살길 바란다.”
민방화는 목운요와 월왕의 서로를 향한 일편단심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에 비해, 자신과 유왕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손에 대력조가 달려 있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보다 나라의 안녕이 최우선이어야만 했다.
* * *
목운요가 돌아왔을 때, 월왕은 한창 마당에서 검술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흰색 나삼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보기 좋게 나부꼈다. 장검은 손끝에서 우아하게 움직여,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목운요는 넋이 나간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월왕이 동작을 멈추고 미소 짓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월왕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날이 추운데 외투라도 입고 가지.”
“사야, 방금 보여 준 칼춤이 너무 근사하네요. 언제 기회 되면 저도 가르쳐 줘요.”
“칼춤이 아니라 검무다. 나중에 쓰기 좋은 장검 하나 따로 만들어서 가르쳐 주마.”
목운요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침전으로 가서 식사를 시작했다.
“사야, 춘경 대전이 코앞인데 준비는 다 되어 가나요?”
“거의 끝나 간다. 이씨 가문과 진왕, 북강이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월왕은 목운요가 한 입 베어 물다 만 음식을 입에 넣고 맛있게 음미했다.
목운요는 그런 월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과감히 몸을 일으켜 그의 볼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제가 응원할 테니, 하루빨리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들을 숙청해 주세요.”
월왕이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하마.”
* * *
그 뒤로 한동안 서릉에는 평온이 찾아왔다.
진왕과 북강 공주 혁련이락의 혼인은 사월 중순으로 정해졌다.
진왕은 혼례 준비로 조정의 일에 무심해졌고, 조정 관원들과의 연락도 점차 뜸해졌다. 마치 모두가 유왕을 차기 황제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이씨 가문에서도 더 이상 유왕에 맞서지 않았다. 유왕의 곁에 월왕이 보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국후의 활약으로 중립을 지켰던 관원들도 점차 유왕의 편으로 돌아서 모든 일이 돛 단 배처럼 순조롭게 흘러갔다.
삼월 초사흘 춘경 대전을 앞두고, 목운요는 장공주와 허연한을 보러 입궁했다.
화창한 봄 날씨에 각양각색의 꽃들이 앞다퉈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자에 앉아 꽃향기를 맡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장공주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반짝였다.
“새로 만든 차구나?”
“네, 입맛에 맞으세요?”
“차도 좋고, 물도 좋고, 솜씨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장공주의 칭찬에 목운요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있어 외할머니의 칭찬은 가장 큰 영광이었다.
“월왕부에 더 있으니 외할머니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가져다드릴게요.”
“마다할 이유가 없지.”
장공주는 잔잔히 웃다가 문득 든 생각에 수심에 찬 얼굴을 했다.
“요아, 춘경 대전에 너도 참석하니?”
“외할머니께서 뭘 염려하시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참석하시는 중요한 행사이니 만일을 대비해 저도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가 이렇게 말할 줄 알면서도 나는 말리고 싶구나. 이번 춘경 대전은 위험 요소가 많으니 궁에 남아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느냐?”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외할머니께서도 궁에 남아서는 안 됩니다.”
“나도 참석해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요. 제 생각엔 궁보다 다른 안전한 곳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장공주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근위병이 지키고 있는 황궁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이냐?”
그게 사실이라면 춘경 대전 때 황제와 유왕도 위험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얘기였다.
“이씨 가문이나 진왕이라면 몰래 꿍꿍이를 품고 있을 게 분명하여,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궁에 남겨 둘 수는 없어요.”
“……그래, 네 말대로 하마.”
사실 장공주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풍랑을 겪고 또 부귀영화도 누렸으니, 대력조를 위해 목숨을 바치더라도 아쉬울 게 없었다.
다만 딸아이와 외손녀가 마음에 걸렸다. 몇 해만 더 곁에서 그들을 지켜 주고 싶었다.
* * *
삼월 초하루.
촛불이 진왕부의 방 안을 환하게 비췄다. 북강 공주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진왕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전하,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겠네요.”
은은한 촛불 덕에 혁련이락의 미모는 한층 더 매혹적으로 보였다.
진왕은 순간 감격과 통쾌한 감정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이락, 그동안 날 위해 해 준 모든 걸 가슴 깊이 기억하마. 내가 황위에 오르면 그대가 황후가 될 테니, 영광을 함께 누리자꾸나.”
혁련이락이 환하게 웃으며 진왕의 품에 살며시 기댔다.
“전하, 그 한 마디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달콤한 말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고 입가에는 짙은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이는 진왕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서슬 푸른 눈빛에서 짙은 혐오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