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89화 (389/442)

389화 진왕의 수상한 움직임

“공주께서 원하신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부황께 상주서를 올리지요.”

“하나 폐하의 옥체가 편찮으셔서 조회에 못 나가신다 들었습니다만…….”

사실 혁련이락은 진왕을 통해 대력조 정세를 교란시키기로 마음먹고 병력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다 보니, 삼월 초사흘에 열리는 춘경 대전 때 대력조를 크게 뒤집어 놓을 작정이었다.

“목운요가 있는 이상, 부황께선 무사하실 겁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나긋하게 웃은 혁련이락이 유혹하듯 두 눈을 깜빡이며 속삭였다.

“전하…….”

그에 진왕이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더니 고개 숙여 입을 맞추었다.

하나 목운요의 얼굴이 머릿속에 문득 스쳐 지나갔다. 깜짝 놀란 진왕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눈빛에는 온통 냉랭함이 감돌았다.

입맞춤이 끝난 뒤, 혁련이락은 상기된 표정으로 진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그의 눈썹에 머물렀다.

“전하, 그럼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요. 바래다드리지요.”

“괜찮습니다. 호위가 있어서 안전합니다. 내일 조회에 나가셔야 할 텐데 일찍 쉬세요.”

진왕이 미소 띤 얼굴로 혁련이락을 배웅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표정이 확 바뀌더니 그가 손으로 입술을 마구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옷을 마구 벗어 던지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목욕물을 준비하거라.”

“예.”

* * *

목운요가 깨어났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빨간 휘장을 한참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야 이곳이 월왕부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금란과 금교가 문밖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왕비 마마,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와요.”

금란과 금교가 침상에 가만히 기대 있는 목운요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왕비 마마, 어젯밤 편히 주무셨는지요?”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젯밤에 내가 어떻게 들어온 거죠?”

유왕비의 치료를 마치고 마차에 탄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왕야께서 잠든 마마를 안고 들어오셨습니다.”

금란이 다가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그녀는 아무 흔적 없이 깨끗한 침상을 보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마마, 침상을 새것으로 바꿔 드릴까요?”

목운요가 영문을 모른 채 답했다.

“어제 바꾼 새것일 텐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란이 히죽 웃자, 목운요는 그제야 말뜻을 눈치챘다.

“아침부터 날 놀리다니, 내일 바로 우항한테 시집보낼까 봐요.”

이에 금란이 얼굴이 빨개진 채로 연신 사과했다.

“마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예요.”

“흥, 그럼 오늘 하루 종일 혼수를 정리하도록 해요.”

“네…….”

금란은 후회막급했다. 그 많은 혼수를 다 정리하려면 종일 고생해야 할 게 뻔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성 공공이 월왕부 상황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왕비 마마의 분부대로 밀정 총 열여덟 명을 잡아냈고, 심문 결과를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

목운요가 종이를 훑어보며 말했다.

“월왕부는 다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성 공공도 이렇게 문제가 많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다행히 밀정들이 신임받는 자들은 아니라서 왕야께 큰 피해를 미치진 않았습니다.”

“이번 일로 민심이 흉흉해졌을 테니 남은 사람들을 잘 다독여 주세요. 특히 시위들 같은 경우, 앞으로도 사야를 위해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은자를 두둑이 나눠 주도록 하고요.”

“예, 알겠습니다.”

“성 공공, 지금 정세가 불안정하다 보니 저와 사야 모두 왕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거예요. 아무쪼록 성 공공께서 잘 돌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두 분께서 염려하실 일 없도록 소인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환경이 열악한 월서에서도 잘 버텨 왔잖아요. 지금이야말로 더욱더 잘 이겨 내야 할 때입니다.”

“예.”

성 공공은 그제야 월왕부에 왜 갑자기 변절자가 무더기로 나왔는지 이해가 갔다.

모든 것이 열악했던 월서에서는 월왕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모든 이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쳤었다.

그러나 서릉에 온 후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수많은 이권 다툼 속에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더 이상 남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없도록, 나머지 사람들을 잘 다독이고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목운요는 간편한 의상으로 갈아입고 유왕부로 향했다.

한데 시녀 한 명이 유왕비 방문 앞에서 어쩔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시녀는 목운요를 보자마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황급히 다가와서 아뢰었다.

“소인, 월왕비를 뵙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왕비 마마께서 대화는 물론이거니와 식사도 거부하고 계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목운요가 무거운 마음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민방화는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채 멍하니 침상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하룻밤 사이에 더 초췌해진 듯했다.

목운요는 가까이 다가가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형님, 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어요?”

민방화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차디찬 손가락을 꽉 오므리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떨궜다.

“운요…….”

목운요도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주버님께서 저에게 형님이 빨리 회복하실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식사를 안 하시면 회복이 늦어질 테고, 그럼 제가 아주버님한테 혼날지도 몰라요. 아니면 제가 매일 찾아와 달달 볶기라도 할까요?”

민방화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서럽게 흐느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이불은 흥건히 젖어 갔다.

“우리 아기…… 아기가…….”

목운요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친 뒤 태연하게 말했다.

“아이가 잠깐 놀러 간 것뿐이에요. 다 놀고 나면 다시 올 테니 걱정 마세요.”

민방화가 목운요를 멍하니 쳐다봤다.

“정말…… 다시 돌아올까?”

“그럼요. 부모와 아이의 연은 하늘이 맺어 주는 거라, 한번 맺은 연은 반드시 이뤄질 거예요. 아기가 형님께서 힘드신 걸 알고 조금 더 있다 찾아오려는 건가 봐요.”

목운요는 더없이 약해져 있는 민방화에게 도저히 사실을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슬픔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쥐여 주지 않으면, 이대로 절망의 심연에 빠져 버릴지도 몰랐다.

민방화는 목운요의 말에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기가 이 엄마를 위해 잠시 떠난 것뿐일 거야. 머지않아 곧 다시 돌아올 거야.”

민방화가 목운요의 손을 꽉 잡은 채 소리 내어 울었다.

이에 목운요도 가슴이 미어졌다. 언제나 침착하던 그녀였건만, 목놓아 울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한참을 통곡하고 난 민방화는 이내 잠이 들었다.

자는 동안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 모습에 목운요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왔다.

그러곤 유왕비의 시녀들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내가 쓴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 유왕비께 드리거라. 그리고 환기를 자주 시키고, 유왕비께서 아직 몸이 허약하시기 때문에 땀이 너무 많이 나지 않도록 가벼운 이불로 바꾸도록 하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 * *

유왕부에서 나온 뒤, 목운요는 육냥에게로 갔다.

선령은 한창 붕대를 교체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피가 흥건했다.

“주인님…….”

목운요의 등장에 육냥의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마침 잘 왔어. 나는 약이 잘 지어지고 있는지 보고 올 테니 잠깐만 부탁할게.”

선령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목운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가 상처에 붕대를 감았다.

“주인님, 우의한테 시키면 됩니다.”

목운요의 손끝이 닿자 육냥은 가슴이 떨려 오기 시작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엇보다도 상처투성이인 손을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았다…….

“안 그래도 크게 다친 손인데, 잘못 건드렸다간 못 쓰게 될지도 몰라.”

목운요는 붕대를 단단히 고정시킨 뒤 나지막이 물었다.

“육냥, 네가 스스로 팔다리를 부러뜨린 것이냐?”

육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인님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순간 목운요의 눈빛이 떨리며 죄책감이 들었다.

“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구나…….”

유왕비에 대한 유왕의 마음은 무척이나 깊었다. 혹시라도 유왕비에게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유왕과 월왕의 사이는 끝이 났을 것이다.

웃는 법을 모르는 육냥은 최대한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그가 합환산의 독성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건, 목운요와 함께했던 매 순간들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주인님께 폐를 끼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육냥의 마음을 알고 난 후로, 목운요는 그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을 향한 마음을 모른 척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육냥, 난…….”

“주인님, 그보다 수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혹시라도 단서가 될지 모르니 한번 들어 보시지요.”

목운요는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유왕비와 함께 감옥에 갇혔을 때, 궁수들이 릉왕을 굉장히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게 뭔가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씨 가문, 북강, 궁수…….”

뭔가 감이 오는 듯하면서도 확실치가 않았다.

“또 다른 건 없느냐?”

“릉왕은 단지 유왕비를 유산시킬 생각뿐이었고, 저를 데려다가 유왕비를 겁탈하도록 한 건 다른 이의 생각 같습니다.”

“그 말인즉, 릉왕이 처음부터 너를 이용해 유왕과 월왕의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은 아니었다는 말이냐?”

“그런 듯합니다. 제가 끌려갔을 때 릉왕이 곁에 서 있는 사람을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행동거지로 봤을 때 북강 사람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릉왕이 이용을 당한 듯하구나.”

“주인님, 뭔가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이토록 큰 소란이 일었는데도 진왕 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게 수상했었는데, 이제 보니 이미 움직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 추측이 맞다면, 진왕이 곧 북강 공주 혁련이락과 혼인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