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88화 (388/442)

388화 유산

* * *

릉왕이 말한 저택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유왕은 곧장 우물로 뛰어들려다 월왕한테 저지당했다.

“형님, 제가 내려가 볼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아니, 나도 가겠다.”

월왕이 굳은 얼굴로 재차 말렸다.

“형님께서는 미래의 황제가 되실 분입니다. 함부로 모험해서는 안 됩니다.”

혹시 모를 매복이 있을 수도 있는 데다, 땅굴이 협소해서 시위들을 거느릴 수 없으니 유왕은 위에서 기다리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유왕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이를 악물며 월왕의 뜻에 따랐다. 황위에 오르기로 결심한 이상 멋대로 움직일 순 없었다.

“그래, 그럼 아우한테 맡기마.”

확답을 받은 월왕은 바로 우물로 뛰어들었다.

목운요도 유구와 함께 월왕의 뒤를 따랐다. 땅굴에 들어서는 순간, 피비린내가 코를 진동했다. 불안한 예감이 온몸을 덮쳤다.

땅굴 속은 어둡고 음침했다. 월왕 일행이 진입하자 안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월왕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빠르게 암기(暗器)를 던졌다. 곧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졌다.

목운요는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더 이상의 적은 없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월왕과 유구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조금 걸어가자, 지하 감옥으로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목운요는 곧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감옥 내, 창백한 모습의 민방화가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치맛자락은 피로 물들었고, 그녀는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둘째 형님?”

목운요가 떨리는 손으로 맥을 짚어 보았다. 다행히 맥은 뛰고 있었으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월왕이 뒤따라온 우항에게 말했다.

“유왕 전하를 모셔 오거라.”

잠시 뒤, 땅굴에 들어온 유왕이 유왕비를 발견했다.

“방화?”

목운요가 애써 침착하며 말했다.

“아주버님, 형님께서 유산하셨습니다. 하혈이 심하니 조심히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유왕은 두 눈이 빨갛게 상기된 채 이를 악물었다.

그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레 민방화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목운요도 일어서서 돌아가려던 그때, 힘없이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고개를 돌려 보니 감옥 내 어두운 구석에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육냥이었다.

그는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한쪽 다리와 두 팔이 눈에 띄게 꺾여 있었다. 게다가 벽에는 손가락으로 긁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평소 피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목운요지만, 눈앞의 광경은 섬뜩하기만 했다.

“육냥……. 어찌 된 것이냐?”

육냥의 손톱은 전부 뒤집혀 있었고, 손가락 끝은 피범벅이었다. 심지어 뼈가 드러난 손가락도 있었다.

육냥은 아무 대답 없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주인님…….”

목운요가 조심스레 그의 맥을 짚어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합환산(合歡散, 미약의 일종)?”

그녀는 곧장 환약 하나를 꺼내 육냥에게 먹인 뒤 유구를 불렀다.

“유구, 육냥을 데려가거라. 온몸이 상처투성이니…… 조심하거라.”

“예.”

땅굴을 나오자 눈부신 햇살에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가슴속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내가 며칠 늦었을 뿐인데 그새 이 모양이 되다니, 정말 너를 어떡하면 좋아.”

선령의 걱정 어린 눈빛에 목운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선령이 이를 갈며 답했다.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일단 사람부터 구하자. 내가 육냥을 살펴볼 테니 넌 유왕비한테 가 봐.”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꼭 살려 낼 테니까!”

* * *

목운요가 은침을 빼자 유왕비가 다시 고르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하혈도 점차 멈췄다.

밖에서 혼이 나간 채로 기다리고 있던 유왕은 목운요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달려왔다. 혹시라도 유왕비가 잘못됐을까 봐 얼굴에는 불안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형님께서는 무사합니다. 다만, 아이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유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화만 무사하면 된다. 아이는…… 나중에 또 생길 테니까…….”

목운요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형님께선…… 아이를 더 이상 못 가질 수도 있습니다. 복부를 힘껏 짓밟혀서 유산이 되었다 보니 몸을 많이 다치셨습니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기적입니다.”

그들이 반 시진이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아마 목숨마저 잃었을 것이다.

유왕은 두 다리에 그만 힘이 풀려 버렸다. 머릿속에는 민방화가 회임 소식을 알고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아이의 성별을 궁금해하며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순간 분노와 원한이 피어올라 가슴속을 꽉 채웠다. 시퍼렇게 멍들어 있던 민방화의 복부를 떠올리자,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발길질에 그들의 아이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기필코 아이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한참 후에야 유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요, 고맙다. 방화를 잘 부탁한다.”

“형님이 잘 회복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지만, 아무래도 형님께서 깨어나셨을 때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아주버님일 것입니다.”

몸의 병은 금방 나을지 몰라도 마음의 병은 쉽게 낫지 않는 법이다. 민방화가 깨어났을 때 얼마나 슬퍼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유왕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 호위였던 육냥도 잡혀 있었다고 들었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그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천 번, 만 번 죽어 마땅한 범인에게 그대로 갚아 줄 수 있으니까!

“선령이 치료하는 중입니다. 두 팔과 다리가 부러져 정신을 잃었으니, 깨어나는 대로 아주버님께 알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유왕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릉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아 온몸이 만신창이였고,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릉왕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혹시라도 유왕이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위는 그 모습을 보고 비웃음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까지 큰소리 떵떵 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보잘것없는 비열한 껍데기만 남은 릉왕이 한없이 비참해 보였다.

시위는 유왕이 버리고 간 몽둥이를 집어 들고 빠르게 서재를 나섰다.

* * *

진왕부 침실 내.

옷을 벗은 진왕은 심복의 부축을 받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약통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며 굵은 땀방울이 이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쪽에서 지켜보던 곡 명의는 평온한 표정과 달리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다리에 쌓여 있던 독소를 빼는 고통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과 맞먹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기꺼이 참아 내는 진왕을 보니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 시진 뒤, 진왕이 약통에서 일어나 다리를 움직여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곡 명의 덕분에 다리 움직임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소인은 단지 의원으로서 도리를 다한 것뿐입니다. 그럼 푹 쉬십시오, 전하.”

곡 명의가 나가자마자, 진왕은 옆에 있던 심복한테 물었다.

“릉왕부 쪽 상황은 어떠하느냐.”

“유왕과 월왕의 부하들이 릉왕부를 포위하고 있어 아무런 소식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진왕이 몸을 닦고 옷을 걸쳤다.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창백한 얼굴이 한층 더 준수해 보였다.

“릉왕을 무너뜨리는 건 쉬울지 몰라도 이씨 가문은 결코 만만치 않지. 부황 쪽에서는 아무 소식 없느냐?”

“장공주께서 곁을 지키고 계시고, 제 귀비께서 밀정들을 대거 잡아내는 바람에 소식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폐하께서 병상에 누워, 조정 업무를 유왕 전하께 맡기셨다는 겁니다. 이씨 가문이 폐하를 뵙길 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만나 주지 않는다라…….”

진왕이 입꼬리를 올리며 심상치 않은 눈빛을 하였다.

“하긴, 당연히 만나려 하지 않겠지. 유왕과 월왕의 간이 아무리 크더라도 부황의 허락이 없었더라면 대놓고 릉왕부를 봉쇄하진 못했을 테니까.”

그때, 심복이 갑자기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냐?”

집사가 밖에서 답했다.

“전하, 손님이 오셨는데 혁련 아가씨라고 전해 달라 하십니다.”

“혁련?”

진왕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안으로 모시거라.”

“예.”

잠시 뒤, 문어귀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안으로 들어서는 북강 공주 혁련이락과 두 눈이 마주쳤다.

“혁련 아가씨?”

“진왕 전하를 뵙습니다. 사적인 일로 찾아온 거라 아가씨라 자칭한 거니 놀리지 마십시오.”

혁련이락이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침실 배치가 아주 독특하네요.”

“지극히 평범할 따름인데 어디가 독특하다는 거죠?”

“따뜻함이 느껴져 심신이 편안해지는군요.”

진왕의 눈빛이 반짝였다.

“공주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언제든지 놀러 오십시오. 대환영입니다.”

진왕은 일찍이 혁련이락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지만, 아직 확답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혁련이락은 미소를 지으며 두 볼을 붉혔다.

“전하께선 언제쯤 폐하께 저희 사이에 대해 말씀드릴 생각이신가요?”

진왕이 입꼬리를 올리며 시치미를 뗐다.

“저희가 어떤 사이인지요?”

“당연히 부부의 연을 맺어 평생을 함께하고자 하는 사이지요.”

부부의 연이라……. 진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지만 속으로는 크게 비웃었다. 혁련이락은 경국지색이긴 하나 심보가 악독하여,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는 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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