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릉왕부 수색
서립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장공주는 만류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 냈다.
“황상께서 이미 결정하셨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황제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서 오랫동안 본 적 없던 후련함이 엿보였다.
“역시 누님은 언제나 짐의 편이군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묵묵히 응원하는 것뿐입니다.”
장공주가 직접 먹을 갈아 붓을 적신 다음, 황제의 손에 쥐여 주었다.
황제는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며 조서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유왕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을 천천히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하늘이 그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을 듯싶었다.
앞으로는 유왕 스스로가 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며, 그나마 다행인 건 유왕 곁에 믿음직한 군월이 있다는 것이었다…….
황제가 붓을 멈춘 뒤 조서에 옥새를 찍었다.
“누님, 지금쯤 군유와 군월이 릉왕부로 찾아갔겠지요?”
“그랬을 겁니다.”
장공주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상, 군릉에게는 충분히 기회를 주신 거나 마찬가집니다. 군유가 워낙 사리 분별에 능하니, 절대로 친형제의 목숨을 해치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이게 가장 좋은 결과일지도 모르지요.”
황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붓을 들었다.
“누님, 조서 하나를 더 써야겠습니다.”
장공주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떤 걸…….”
“군월이 황위보다 운요와 평생 함께하는 것을 택했으니, 뭔가 버팀목 없이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군유와 우애가 깊다지만, 황권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지요. 혹시라도 나중에 군유와 갈라서더라도, 운요와 한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조서 하나를 남기는 게 좋겠어요. 군월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유아에게 약속했거든요.”
장공주는 코끝이 찡해졌다.
“세상 부모 마음은 다 똑같군요. 황후가 알게 된다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황제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유아가 나중에 짐을 만나 주지 않을 수도 있답니다.”
“그럼 제가 톡톡히 혼내 주지요.”
“아닙니다. 누님께선 만수무강하셔서 짐 대신 군유와 군월을 잘 돌봐 주셔야 합니다.”
장공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새로 쓴 조서에 옥새를 찍어 장공주에게 건넸다.
“누님, 이 조서는 운요에게 전달해 보관하도록 하시지요. 운요라면 어쩐지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겠습니다.”
황제는 그제야 마음의 짐을 던 듯, 한결 편해진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잠이 들었다.
* * *
한편 릉왕부 내에서는 한창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릉왕은 술잔을 단숨에 비운 뒤, 무희가 던진 붉은 천을 홱 잡아당겨 무희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주 예쁘게 생겼구나.”
다가가 입술을 훔치려던 그때, 시위들이 황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유왕과 월왕 전하께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릉왕부를 포위했습니다.”
음악 소리가 순간 멈추고, 무희들은 모두 바닥에 꿇어앉았다. 릉왕은 품에 안았던 미인을 내팽개치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바닥에 쓰러진 무희는 이마를 부딪쳐 피가 철철 났지만, 감히 닦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시위가 당황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전하, 유왕과 월왕 일행이 릉왕부 주변을 포위하여 곧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릉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쪽에서 피 흘리고 있는 무희를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본 왕이 피를 싫어하는 걸 모르냐? 끌고 가서 죽여라.”
무희는 새하얗게 질린 채 사시나무 떨듯 하며 애원했다.
“전하, 제발 살려 주십시오……!”
“끌고 가라!”
시위들이 곧장 무희를 끌어내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릉왕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자신들도 봉변을 당할지도 몰랐다.
릉왕은 빠른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유왕과 월왕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둘째 아우, 넷째 아우. 무슨 일로 릉왕부에 행차한 것이냐?”
하지만 유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명령했다.
“뒤져라!”
릉왕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분노를 금치 못했다.
“영군유,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형님께서 유왕비를 납치한 정황이 발견되어 릉왕부를 수사하려는 것입니다.”
“뭣이라? 당장 멈추지 못해?”
릉왕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
“여봐라!”
곧 갑옷으로 무장한 시위들이 들어와 유왕 일행을 가로막았다.
“영군월. 내가 명색이 네 큰형님이다. 그런데 어딜 감히 함부로 내 왕부를 뒤지는 것이냐?”
그에 유왕이 냉소를 지으며 답했다.
“형님, 송구하지만 지금 대꾸할 시간이 없습니다. 여봐라,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라!”
순간 릉왕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그가 옆에 있는 시위한테 명했다.
“왕부 강제 침입은 명백한 중죄다. 누구든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죽여라! 결과는 내가 책임진다!”
유왕은 시선을 돌려 월왕을 바라보았다.
“넷째 아우, 부탁하네.”
고개를 끄덕인 월왕이 천천히 칼을 빼 들었다.
릉왕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영군월, 지금 유왕의 지시를 따르는 것…… 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
월왕은 릉왕의 목에 검을 조준한 채 소리쳤다.
“반항하는 자는 모두 죽는다!”
우두머리인 릉왕이 붙잡히자, 그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우항은 재빨리 사람들을 거느리고 릉왕부 내 시위들을 포위했다.
그사이 목운요는 눈여우를 품에 안고 유구와 함께 릉왕부 안으로 들어섰다. 눈여우는 릉왕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그의 주변에서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약이 오른 릉왕은 눈여우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눈여우도 날카로운 발톱으로 릉왕을 할퀴었다.
결국 릉왕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다리에는 세 갈래 선명한 핏자국이 남았다.
릉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월왕을 노려보았다.
“영군월, 내 반드시 부황께 일러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월왕은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고 냉소를 지었다.
“저희가 어떻게 이리 대놓고 릉왕부에 들어왔겠습니까?”
순간 멈칫한 릉왕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부황께서 정말…… 너희의 만행을 허락하셨단 말이냐?”
“만행을 저지른 건 형님이지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양심을 어기고 만행을 저질렀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나 다름없습니다.”
“네가 감히 날 가르치려 들어? 제대로 미쳤구나……!”
그때, 목운요가 눈여우를 품에 안으며 릉왕에게 물었다.
“유왕비를 어디에 숨긴 거죠?”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답설이 당신 몸에서 나는 유왕비의 체취를 맡았거든요.”
“흥, 한낱 짐승으로 날 모함하려는 거냐?”
릉왕이 이대로 끝까지 함구한다면, 결국 릉왕부에서 직접 찾아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반 시진이 지나도 별다른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유왕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릉왕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대체 방화를 어디에 숨긴 것이냐?”
“영군유,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으니 이 손 당장 놓거라!”
유왕의 얼굴이 점점 더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손등에는 핏대까지 섰다.
“방화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 백배로 당하게 될 줄 알아!”
하나 릉왕은 도리어 냉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흰 함부로 릉왕부에 쳐들어와 나에게 칼을 겨누었을 뿐만 아니라, 여우 새끼를 시켜 내게 상처까지 입혔다. 내일 당장 이 모든 걸 부황께 일러 너희의 죄를 물을 것이다.”
“영군릉……!”
그때, 월왕이 분노한 유왕의 손을 잡으며 제지했다.
“형님.”
유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할 수 없이 월왕의 뜻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기세가 등등해진 릉왕이 다시금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가슴 쪽에서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해졌다. 월왕이 릉왕의 가슴팍을 힘껏 찬 것이다.
릉왕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퍽 하고 쓰러졌다. 죽을 듯한 아픔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영군월…… 네놈이 감히……!”
월왕이 태연하게 입을 뗐다.
“형님께서는 장차 황제가 되실 분이니 이런 명예롭지 않은 일은 제가 하지요.”
그사이 목운요는 미리 준비해 온 독약을 꺼냈다. 어차피 무례를 범한 이상, 죄명 하나 더 추가되는 것쯤이야 큰 대수가 아니었다.
릉왕의 눈빛에 두려움이 가득 찼다.
“너희들……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이냐?”
“형님이 제 손에 죽는다면, 과연 부황께서 이미 죽은 아들을 위해 살아 있는 아들마저 죽이실까요? 제가 아는 부황이라면 기껏해야 감금형을 내리시겠지요. 그리고 둘째 형님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전 금방 풀려날 겁니다.”
유왕이 그제야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반면 릉왕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월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살기에,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월왕은 목운요에게서 건네받은 독을 강제로 릉왕의 입에 넣어 버렸다. 계속 시간을 끌다간 진왕과 이씨 가문에도 소식을 들어갈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속전속결이었다.
잠시 뒤, 안색이 창백해진 릉왕이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민방화는…… 땅굴에 있고, 입구는 납치당한 곳 바로 옆에 있는 저택의 마른 우물이다. 땅굴은 황궁으로 이어져 있고, 거기 숨겨져 있다…….”
황궁 밑에 있는 땅굴이라니, 이토록 은밀한 곳이라면 아마 영원히 못 찾았을 것이리라.
목운요는 우항에게 해독제를 주며 당부했다.
“일각 뒤에 반 알 먹여요.”
유왕 일행은 빠르게 릉왕부를 벗어났고, 월왕과 목운요도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