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용의자
* * *
정전으로 들어선 황제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민방화는 유력한 황후 후보인 데다 아이까지 회임 중이었다. 그런데 감히 황실의 사람을 건드리다니, 이건 명백히 황실의 존엄을 짓밟는 일이었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관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입으로는 만세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누가 알까. 황제의 눈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탁자 위에 놓인 조사 결과를 보자 다시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젯밤 일은 다들 들었겠지. 유왕비가 납치되어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심병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납치범 중 궁수가 적어도 쉰 명은 된다는구나.”
관원들은 모두 쩔쩔매며 머리를 숙였다.
황제는 더욱 크게 화를 냈다.
“천자의 땅에서 감히 궁수가 대놓고 활보하다니, 얼마나 비웃음거리가 될 일이냐!”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어찌 고정한단 말이냐! 그들의 목적이 유왕비 납치가 아닌 짐을 암살하는 것이었더라면? 아마 자네들은 새 군주를 세우느라 떠들썩했겠지!”
관원들이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근위대 총령, 납치범들은 잡혔느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왕비를 무사히 찾아내야 한다!”
그때, 유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부황. 소자, 몇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심 대인 말에 의하면 당시 매복 중인 궁수가 적어도 수십 명은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 많은 이의 종적을 감춰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게다가 그날 밤 화재 진압에 나섰던 근위병들을 가로막은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남치범들은 근위병의 행적을 꿰뚫을 만한 정보력까지 가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거짓 단서를 남기고 동쪽 성문 경비들을 매수해 저희를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져 갔다. 황자비를 납치하는 것도 모자라 성문 경비까지 매수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 않았다.
“군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부황,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유왕비를 납치한 자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게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유왕비는 주변에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번 납치는 소자를 겨냥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황, 아무래도 누군가가 유왕비를 이용해 소자에게 타격을 주어 조정 형세를 어지럽히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왕은 말을 마치면서 릉왕을 슬쩍 쳐다봤다. 이에 릉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둘째 아우, 왜 갑자기 날 쳐다보는 거지? 혹시 내가 사람을 시켜 유왕비를 납치했다고 의심하는 것이냐?”
“누구나 용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유왕이 냉랭하게 답했다.
“자네가 왕비를 아끼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네. 행방불명이 된 왕비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 생각하고 자네의 죄는 묻지 않지.”
릉왕의 느긋한 말투는 어쩐지 얄미운 느낌까지 들었다.
유왕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형님께선 어제 일찍 들어가셨더군요. 이 승상과 만남을 가지셨다면서요?”
“내가 외할아버지를 만나 정사를 논의한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것이냐? 그나저나 내 행적을 꿰뚫고 있다니, 설마 사람을 시켜 날 감시라도 한 것이냐?”
“정사 논의가 잘되셨기를 바랍니다.”
릉왕은 잔뜩 화가 나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부황, 소자가 이리 양보했는데도 둘째 아우가 계속 몰아붙-”
“그만!”
황제가 큰 소리로 호통쳤다.
“왜 이리 시끄럽게 구는 것이냐! 군유, 군월. 두 사람은 짐을 따라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만 돌아가거라.”
“예.”
릉왕은 유왕과 월왕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 * *
황제는 두 사람을 서재로 데려와서 입을 열었다.
“군유, 왕비를 납치한 배후가 군릉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냐?”
유왕이 잠시 침묵하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부황 말씀대로 큰형님을 의심하고 있는 게 맞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왕도 의심이 가는 상황입니다.”
황제가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군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잘 압니다.”
유왕이 침통한 눈빛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형제간의 우애를 가슴 깊이 새기라는 부황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릉왕과 진왕의 계속되는 소행에 소자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황실 투쟁이 잔혹하긴 하나, 암암리에 맺어진 약속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조정 내 싸움으로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흙탕 싸움이라도 정해진 선이 있고, 그 선이 넘어가는 순간 황족 전체가 큰 피해를 보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릉왕과 진왕이 그 선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황제는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지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군유,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들과 전혀 연관이 없을 수도 있지 않느냐.”
유왕이 무거운 말투로 답했다.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서릉 내에 궁수들을 숨기고, 성문 경비들까지 매수할 만한 자는 릉왕과 진왕 외에는 없습니다.”
황제가 주먹을 꽉 쥔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일, 당장 알아보거라.”
이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그 시각, 목운요는 유구가 보내온 소식을 보며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어젯밤 근위병을 막아선 이들이 이씨 가문과 연관이 있는 게 확실하냐?”
“네. 북강에서 온 자들로 보이고, 그들이 몸을 숨긴 장소가 삼 개월 전 이씨 가문이 몰래 사 둔 곳이었습니다.”
“유왕비의 행방은?”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목운요의 걱정이 깊어졌다.
“육냥은 아직 소식이 없느냐?”
“육냥도 감감무소식입니다.”
“알겠다. 계속 알아보거라.”
유구가 나가려던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목운요의 앞에 나타났다.
“유일, 주인님을 뵙습니다.”
“폐하 곁을 지키지 않고 여긴 웬일이냐?”
“폐하께서 유왕비의 행방을 쫓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목운요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외할머니께선 별말씀 없으셨느냐?”
“장공주 전하께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주인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
목운요가 낮은 소리로 곱씹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구, 네가 알아낸 소식을 유일한테 말해 주고, 유일은 유왕비를 납치한 배후로 릉왕을 지목하거라.”
“그럼 진왕과 이씨 가문은…….”
“릉왕과 진왕, 거기에 이씨 가문까지 끌어들인다면, 유왕이 이 기회를 빌려 정적들을 없애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조정 대신들이 크게 반발하겠지. 그러니 일단은 릉왕부터 무너뜨리고 나머진 천천히 처리하는 게 좋겠다.”
“예.”
한 시진 뒤, 유일은 릉왕이 사람을 시켜 서릉 내에 불을 지르고 근위병을 가로막은 증거를 황제의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이를 본 황제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찻잔을 냅다 던져 버렸다.
유왕이 무릎을 꿇은 채로 말했다.
“부황,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유왕비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소자의 아이를 품은 채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소자는 아마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지도 모릅니다.”
황제는 탁자 위에 놓인 밀서를 보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네 뜻대로 하거라……. 나도 더 이상 여력이 없구나. 다만 무슨 일이든 스스로 정한 한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네 형과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왕이 그 자리에서 황제를 향해 머리를 세 번 조아린 다음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서던 황제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서립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태의들이 곧장 달려왔다.
* * *
유왕과 월왕은 부리나케 유왕부로 가서 동원 가능한 인력을 전부 모으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눈앞의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사야, 무슨 일인가요?”
월왕의 눈빛이 반짝였다.
“부황께서 둘째 형님의 뜻대로 해도 된다고 명을 내리셨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릉왕부를 수색할 거다.”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럼 서두르는 게 좋겠네요.”
황제가 유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건 릉왕을 포기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릉왕과 그를 옹호하는 대신들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지금이야말로 릉왕을 제대로 짓밟아 버릴 최적의 기회였다.
“우항에게 인력을 더 모으라고 하였다. 지금 이 인원으로는 릉왕부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궁수 오십 명을 동원할 만한 능력이라면, 릉왕부 안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더 숨겨져 있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황제한테 버림받은 걸 눈치채면 바로 반항할 수도 있고, 이씨 가문도 뒤에 있다 보니 충분한 준비 없이는 섣불리 나서기 어려웠다.
목운요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회귀 전 자신이 진왕의 음해로 월왕부에서 죽은 일이 떠올랐고, 놀랍게도 지금 상황과 굉장히 비슷했던 것이다.
“사야, 그래도 서둘러 주세요. 둘째 형님이 릉왕부에 갇혀 있을지도 몰라요.”
월왕이 차디찬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안심시켰다.
“요아, 무사히 구해 올 테니 걱정 말거라.”
“……네.”
* * *
반 시진 가까이 정신을 잃었던 황제가 서서히 눈을 떴다.
장공주는 얼른 다가가 황제를 살폈다.
“황상, 깨어나셨군요. 물 좀 드릴까요?”
그녀를 본 황제는 힘겹게 입을 열며 쉰 목소리를 내었다.
“누님…….”
“황상…….”
장공주가 황제의 손을 꼭 잡으며 안쓰러운 눈을 했다.
“누님, 짐도 늙긴 늙었나 봅니다. 도저히…… 버틸 힘이 없네요…….”
“그런 말 마십시오. 태의가 말하길, 근심으로 인한 병이라고 하니 며칠 쉬면 금방 나으실 겁니다.”
황제는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어 올렸다.
“천군만마를 이끌어 승리를 거두고, 전란을 평정해 대력조를 지켜 냈던 이 손이…… 지금은 붓을 잡을 힘도 없네요.”
장공주는 더욱더 마음이 아파 왔다.
“사람은 언젠가는 늙는 법이지요. 그래야 아이들이 커서 뒤를 잇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일어나려고 하자, 서립과 장공주가 얼른 부축했다.
“황상, 아직 몸이 허약하니 당분간은 쉬시는 게 어떨까요?”
하나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탁자로 향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지만 벌써 숨이 차고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졌다.
“누님, 아무래도 시일이 많이 남지 않은 듯합니다. 아직 정신이 맑을 때 황위 계승 조서를 미리 써 둬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