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사과부터 하시지요
월왕과 목운요는 마주 보고 맞절하며 예식의 마지막 순서까지 마쳤다.
예관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한 북강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예식을 마치겠습니다.”
월왕은 미소 지으며 손수 면사포를 들어 올린 뒤, 아리따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북강 일행을 향해 말했다.
“이제 온한 군주는 본 왕의 왕비가 되었으니, 무슨 일이든 본 왕과 이야기하십시오.”
북강 사신들은 월왕의 냉랭한 눈빛에 옴짝달싹 못 했다.
월왕은 어찌 보면 그들이 가장 잘 아는 대력조 황자였다. 월서가 변경에 있다 보니 맞붙은 적이 많았던 것이다. 그의 손에 죽어 난 북강 정예병이 수두룩해 자연스레 두려움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예전의 월서는 날씨가 열악하고 인구가 적어, 북강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주인 없는 땅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월왕이 월서로 파견된 이후로, 모든 게 끝이 나 버렸다. 북강이 아무리 많은 정예병을 파견해도 월서 땅을 밟을 수 없었고, 오히려 반격당해 번번이 물러남으로써 꽤 많은 피해를 보기까지 했다.
그때, 한 사신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월왕, 저희가 찾아온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온한 군주께서 북강의 여섯째 황자를 강제로 대력조에 감금시켰습니다. 이는 명백히 북강을 무시하고 도발하는 행위입니다. 온한 군주께서 이에 대해 해명하지 않는다면 우리 북강도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월왕이 냉랭한 표정으로 비웃었다.
“고작 사신 주제에 북강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월왕의 말에 사신이 혁련이락을 쳐다보았다.
혁련이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의 뜻이 바로 북강의 입장입니다.”
월왕의 얼굴에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일단 본 왕의 왕비는 당신들의 여섯째 황자가 누군지 조차 모릅니다. 그리고 알았다 한들, 어떡할 겁니까?”
혁련이락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우리 북강을 멸시하는 겁니까?”
“제가 듣기론, 북강에 현재 역병이 기승을 부려 백성들의 반발이 심하다 하더군요. 그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력조로 사신을 파견해 역병 처방전을 얻어 민심을 다시 얻고자 하는 것이고요. 제 말이 맞습니까?”
그에 방금까지 도발하던 사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객으로 온 대력조 관원들도 눈앞의 상황에 각자 생각에 잠겼다.
정말 월왕의 말대로라면 북강의 현재 상황을 틈타 일부 영지를 빼앗아 올 수도 있었다. 그동안 북강이 대력조를 침략한 것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혁련이락의 눈빛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월왕 전하, 방금 전 사신이 한 말이 다소 과격한 점 인정합니다. 워낙 애타게 오라버니를 찾고 있던 터라, 온한 군주에게 잡혀 있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아 그만 표현이 지나쳤습니다…….”
북강의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기에, 일단은 굽히고 들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이대로 월왕과 대립했다간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전쟁이 나면 손해 보는 쪽은 결국 북강이었다.
대력조 관원들은 북강이 꽁무니를 내리는 모습에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혁련이락의 말에 월왕의 말투는 더욱 냉랭해졌다.
“공주 말대로라면 왕비에 대한 발언이 경솔했던 거군요. 그렇다면 우선 사과부터 하시지요.”
월왕의 단호한 대답에 유왕은 무척이나 통쾌해했다.
반면 북강 사신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월왕 전하, 지금 명백히 왕비를 감싸 주는 것입니다!”
“방금 공주께서 본인 입으로 직접 과격했음을 인정했습니다. 설마 공주가 거짓을 말한 겁니까?”
북강 사신은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월왕이 언변에 능하지 않다더니, 알고 보니 거짓 소문이었다. 이렇게 말 한마디만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만큼의 언변이라면,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혁련이락이 난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월왕 전하. 방금은 제가 경솔한 탓에 사신들이 오해한 것이니 부디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월왕은 그런 공주를 바라보며 목운요의 손을 잡았다.
“공주께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왕비입니다.”
“예……. 전부 제 불찰입니다. 월왕비께 사죄드립니다.”
혁련이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사과를 하였기에, 앞으로 더 이상 육냥을 빌미로 목운요를 공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목운요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혁련이락 공주를 향해 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전 개의치 않으니 공주께서도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혁련이락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월왕비의 아량에 탄복합니다. 그럼 저흰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뇨. 귀빈이 오셨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요. 여봐라, 혁련이락 공주와 북강 사신 대인들을 자리로 안내하거라.”
“네.”
* * *
월왕부 분위기가 다시 들끓어 올랐다.
목운요가 신방에 들어간 사이, 월왕은 하객들에게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장신구를 제거한 목운요는 침상에 앉아 깊은 사색에 빠졌다. 그녀는 릉왕과 진왕이 계략을 꾸며 예식이 망쳐질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들은 잠잠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릉왕과 진왕의 의중을 추측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그때, 금란과 금교가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왔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특별히 전해 드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마마께서 아침부터 공복이라 시장하실 거라며 걱정하셨습니다.”
월왕의 세심함에 감동한 목운요는 겨우 생각을 정리한 뒤 물었다.
“육냥은 별일 없나요?”
“네, 조용히 월왕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간단히 요기한 다음, 침상에 기대 월왕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너무 피곤했던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두근거림에 잠에서 벌떡 깨어났다.
“금란?”
금란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네, 왕비 마마.”
“사야께선 아직 안 돌아오셨나요?”
“네, 아직입니다.”
“그래요…….”
목운요는 방금 느낀 두근거림이 신경이 쓰였다.
“선령도 아직인가요?”
“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문득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뭔가 일이 생겨 늦어진 것이겠죠. 유왕비와 소우한테는 따로 음식을 준비해 줬죠?”
한 명은 회임 중이고 한 명은 몸이 약해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 그만 잊었습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잠시 뒤, 금란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분부대로 따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유왕비께선 몸이 편찮으셔서 먼저 돌아가셨고, 소 소저께서는 무탈하십니다.”
“유왕비께서 미리 가셨다고요? 유왕 전하는요?”
“왕야와 함께 계십니다.”
목운요는 갑자기 가슴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떠나신 지 얼마나 됐죠?”
“일각 조금 지났습니다.”
“육냥에게 유왕비를 무사히 황궁까지 모시라고 해요.”
목운요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유구까지 불러 당부했다.
“가서 육냥을 도와주거라.”
“예, 주인님.”
* * *
날이 점점 어둑해져 왔다.
잠깐 잠이 든 목운요는 문어귀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월왕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신방 문 앞까지 온 것이었다.
성 공공이 황급히 사람들을 말렸다.
“왕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만 돌아가게. 왕야의 첫날밤을 망친 자는 앞으로 내 밑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아!”
함께 온 이들은 모두 월왕의 심복이었다. 다들 궁금한 마음에 따라왔다가 성 공공의 으름장에 놀라 순식간에 뒷걸음쳤다.
“왕야, 백년해로하십시오!”
“좋은 소식 기대하겠습니다!”
방 안에서 듣고 있던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이들은 전부 월왕을 따라 월서에서 서릉으로 온, 하나같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월왕이 아무것도 없이 월서로 파견되었을 때부터 줄곧 함께해 왔으니 서로의 우애가 굉장히 깊어 보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자, 성 공공이 월왕의 옷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왕야, 첫날밤인데 신부를 너무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월왕은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초가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빨리 뛰며 머릿속에 윙 소리가 났다. 과음한 것도 아닌데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마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길게 드리운 휘장을 지나자마자 목운요의 두 눈과 마주쳤다. 맑고 깨끗한 눈동자는 웃음을 머금고 있어, 한 번의 눈 맞춤만으로도 그의 가슴이 녹아내렸다.
“요아…….”
월왕은 자신의 쉰 소리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목운요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사야…….”
그녀에게 한 발짝씩 다가갈 때마다 월왕은 온몸이 점차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귀를 간지럽히는 그녀의 목소리는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이 순간 설령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더라도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잔뜩 긴장한 월왕의 모습에 목운요는 소리 내어 웃어 버리고 말았다.
“사야, 첫날밤이니 합근주부터 마실까요?”
월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이 놓인 탁자로 향했다. 땀이 흥건한 손은 술잔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였고, 술을 따르는 내내 손이 덜덜 떨렸다.
목운요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방으로 퍼지는 혼례복은 마치 활짝 핀 빨간 꽃송이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두 그림자는 점차 중첩되며 서로의 숨결을 나누었다.
한데 그때, 방문이 덜컥 열렸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유구의 목소리에 방 안 분위기가 와장창 깨졌다. 목운요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재빨리 문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유구가 몸에 핏자국을 묻힌 채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유왕비께서 사라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