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축복 속에서
그와 함께 여덟 개나 되는 정전 문이 동시에 열리더니, 문밖에 서 있는 월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짙은 빨간색 혼례복은 준수한 이목구비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검은 머리는 등 뒤로 드리우고 머리 위에는 금색 관이 번쩍번쩍 빛이 났다. 평소 차가운 칼날과도 같던 월왕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노을처럼 두 눈이 다정함으로 가득 찼다.
월왕은 눈앞의 목운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만든 혼례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미리 봐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가 직접 입은 모습을 보니 새삼 경국지색이란 단어의 뜻이 이해가 됐다.
단아하게 올린 머리는 아름다운 목선을 더욱 부각시켰고, 구슬 비녀는 그녀의 미모를 한층 더 눈부시게 했다.
자신을 향해 웃음 짓고 있는 모습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월왕은 목운요를 본 순간부터 등 뒤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온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오늘이 정말 그녀와 혼례를 올리는 날인가 말인가?
“사야…….”
귀를 녹이는 목소리와 함께 월왕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큰 걸음으로 빠르게 다가가 목운요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목운요가 흠칫 놀라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야, 인사부터 올려야죠. 왜 벌써 들어오신 거예요?”
인사 올리는 차례에서 갑자기 다가가 신부의 손을 덥석 잡다니.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월왕은 순간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순서도 잊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들어온 이상 다시 나가는 것도 웃길 것 같아, 그가 곧바로 목운요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군월, 외할머니와 장모님을 뵙습니다.”
목운요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 뭐라고 부른 거지?
비록 자신과 월왕이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항렬이 항렬인지라 호칭에 있어서 굉장히 큰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각자 부르기 편한 호칭으로 가기로 했는데, 월왕이 갑자기 호칭을 바꾼 것이다.
장공주는 뜻밖의 상황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운요에겐 오라버니가 없으니, 네가 직접 데려가거라.”
그러자 월왕은 곧장 목운요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요아, 혼례를 치르러 가자.”
목운요는 두 팔로 월왕의 목을 감싼 채 환한 웃음을 지었다.
“사야, 너무 힘들어서 안 돼요. 그냥 업어 주세요.”
월왕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내 보물이라 이렇게 꼭 안고 가야 한다.”
그는 목운요의 저항에도 꿈쩍 않고 큰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그때, 마마가 뒤따라오며 소리쳤다.
“월왕 전하, 면사포를 빠뜨리셨습니다!”
도저히 참지 못한 유왕은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성 공공은 그런 유왕이 마땅치 않아 몰래 눈총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왕야가 왕비를 안고 씩씩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왕야께서 장가를 가시다니, 이제 남은 소원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서 작은 왕야가 장가가는 것을 보는 것뿐이었다!
* * *
월왕은 목운요를 안은 채로 궁문까지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어 그녀를 가마에 앉혔다.
그리고 조심스레 치맛자락을 정리해 준 뒤, 뒤따라온 마마로부터 건네받은 여의와 사과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요아, 곧 도착할 테니 조금만 참거라.”
목운요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네, 사야.”
월왕도 입을 헤벌쭉하며 웃었다.
우항은 그런 월왕의 모습이 웃음거리가 될까 봐 가까이 다가가 재촉했다.
“왕야, 그만 출발하시지요. 곧 길시입니다.”
신부 맞이 행렬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마에 앉아 있던 목운요는 붉은 면사포를 올리고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스산한 겨울 풍경과 달리 나무에 각양각색의 비단 꽃이 걸려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꽃구름과도 같았다.
백성들은 행렬이 지나가자 큰 소리로 외치며 축복했다.
“왕야와 군주의 대혼을 경축드립니다……!”
“평생 행복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다자다복하십시오!”
여러 축복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진 다자다복이란 말에 사람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마 안에 있던 목운요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반면 행렬의 가장 앞쪽에서 말을 타고 가던 월왕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보고 백성들은 더 크게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행렬은 백성들의 축복 속에서 월왕부 앞에 도착했다. 월왕은 말에서 내린 뒤, 목운요를 가마 안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이를 본 마마가 황급히 말렸다.
“월왕 전하, 부군 댁에 도착한 뒤에는 신부가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법입니다.”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월왕은 혼례식 절차를 다 외웠으니 아무 걱정 말라며 큰소리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고 있자니 과연 믿어도 될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존 관습을 뒤로한 채 목운요를 안고 월왕부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하객들의 환호로 월왕부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내시가 큰 소리로 알렸다.
“주상 전하 납시오, 장공주 전하 납시오!”
하객들은 곧바로 일어서서 예를 올렸고, 그사이 길시가 다가왔다.
황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영군월과 목운요를 번갈아 보았다.
“길시가 됐으니 식을 올리거라.”
예관이 진중한 목소리로 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 앞에 나란히 선 목운요와 월왕은 인연의 끈을 의미하는 붉은 명주를 손에 잡고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다.
“천지신명에게 절하시오.”
마마의 안내에 따라 돌아서서 인사 올리는 목운요의 머릿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앞으로 남은 생의 모든 순간을 월왕과 함께할 걸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는 월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불행한 삶을 겪게 한 이 세상을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그 대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여인을 얻었음에 감사했다.
예관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됐다.
“부부, 맞절하시오!”
월왕의 눈이 기쁨과 기대로 가득 찼다. 예식이 끝나면 두 사람은 진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목운요의 부군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승천하고 행복감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한데 맞절하기 바로 직전, 밖에서 갑자기 큰 소란이 들려왔다.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이덕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알렸다.
“폐하, 북강 공주와 사신들이 북강 왕자 혁련역지를 돌려보내라며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북강 왕자 혁련역지?”
그때, 북강 공주와 사신들이 월왕부 안으로 들어왔다.
“혁련이락이 폐하를 뵙습니다.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소란스럽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워낙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찾아왔습니다.”
북강 사신들도 하나둘 입을 열었다.
“북강 황자 혁련역지가 온한 군주에게 감금되어 대력조에 머무르고 있다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해 보시지요.”
“북강에서 성의를 가지고 화친까지 청했건만, 온한 군주는 암암리에 북강 왕족을 이용하고 속이다니. 이는 북강에 대한 멸시나 다름이 없습니다.”
북강 공주가 한껏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폐하, 혁련역지는 저의 여섯째 오라버니입니다. 다른 오라버니를 구하려다 실종되었는데, 알고 보니 온한 군주께서 강압적으로 곁에 두고 계셨더군요. 군주, 제 오라버니의 신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놓아주지 않는 거죠?”
월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북강 공주와 사신들이 목운요를 모함하려 들자 가슴속에서 열화가 치밀어 올랐다.
목운요는 면사포를 손으로 올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은 냉랭했다.
입을 열어 반박하려는 순간, 월왕이 그녀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요아, 부군이 면사포를 올리기 전까진 신부가 올려서는 안 된다.”
월왕이 면사포를 살며시 내린 뒤 돌아서서 북강 일행을 바라보았다.
“혁련 공주, 그리고 사신 여러분. 오늘이 저 영군월의 혼례식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니. 이를 저에 대한 선전 포고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황위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힘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그도 오랫동안 황위를 준비해 왔다 보니 얼마든지 북강을 상대로 전투력을 겨뤄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순간 혁련이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는 단지 오라버니를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월왕이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사람을 찾는 건 언제든지 가능하겠지만, 제 혼례식은 이번 한 번뿐입니다. 그 누구든 간에 오늘 예식을 망친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혁련이락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월왕의 눈빛과 마주하자 온몸에 한기가 퍼지며 안색마저 하얗게 질려 버린 것이다.
월왕이 시선을 돌려 멍하니 서 있는 예관에게 말했다.
“계속하시지요.”
하나 북강 사신 한 명이 굴하지 않고 끼어들었다.
“월왕, 저희 북강 여섯째 황자께서…….”
그에 월왕이 팔을 들어 올리자, 우항과 우의가 잽싸게 다가가 북강 사신을 냅다 차 버렸다.
북강 공주는 놀라서 소리쳤다.
“월왕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월왕의 표정이 점점 더 냉랭해졌다.
“오늘이 본 왕의 혼례식이라 피를 안 보는 걸 다행으로 아십시오. 아니었더라면 당신들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월왕이 놀란 얼굴의 예관을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예관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예식을 계속 진행하였다.
“부부, 맞절하시오!”
월왕은 붉은 비단을 손에 쥐며 한결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요아, 일단 예식을 끝까지 마치자꾸나.”
면사포 아래에서 목운요도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믿음직스러운 목소리에 화가 점차 사라지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네, 예식부터 치러요.”
평생 한 번뿐인 혼례식인 만큼 아무런 아쉬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북강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모함은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