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움직임이 포착되다
목운요는 빙등 촛불이 다 녹아내릴 때까지 월왕의 품에 안겨 있다가, 불이 꺼진 뒤에야 그의 손을 잡고 궁 안으로 향했다. 밖에서 하도 오래 머무르다 보니, 두 사람 모두 손발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금란과 금교는 재빨리 난로에 불을 얹고 모피 장옷을 건넸다. 두 사람의 혈색이 서서히 돌아오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뜨거운 생강차를 올렸다.
“왕야, 소저. 어서 따뜻한 생강차로 한기를 없애십시오.”
목운요와 월왕은 생강차를 들고 호호 불다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생강차가 너무 뜨거운 나머지 입조차 댈 수가 없었다. 잠깐 내려 두고 식히는 사이, 월왕이 목운요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대며 말했다.
“요아, 손을 녹여 주마.”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이 목에 닿자마자, 월왕은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사야, 엄청 차가울 텐데 괜찮아요?”
월왕은 부르르 떨면서도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전혀 차갑지 않다.”
그런 월왕의 모습에 목운요는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목운요의 웃음에 그도 따라 웃었다.
“사야, 왜 웃으시는 거죠?”
“글쎄, 그저 마냥 기쁘구나.”
목운요가 월왕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시가 지나기 전에 국수 한 그릇 끓여 드릴게요.”
“나도 같이 가마.”
월왕은 한시라도 목운요와 떨어지기 싫었다.
“금방 올게요. 여기서 잠자코 기다리고 계셔요.”
“난 네 곁이 더 좋다.”
목운요가 난처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럼 같이 가요.”
금란과 금교가 외투를 챙겨 준 뒤 한쪽으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금란 언니, 이럴 줄 알고 미리 주방에 따뜻한 물과 장작을 남겨 두라고 한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준비만으로도 자시가 훌쩍 넘어 버렸을 것이다.
금란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두 분 사이가 워낙 좋고, 또 오늘이 왕야의 생신이기도 해서 어떻게든 만날 거라 생각하고 준비해 뒀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되는 걸까? 음…… 뭔가…… 순진무구해진다고나 할까?”
금교는 한참을 생각해 낸 끝에 순진무구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금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무구는 무슨……. 지금 소저와 왕야 두 분이 바보 같다고 얘기하고 싶은 거잖아?”
금교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좀 그렇잖아. 아무튼, 정말 모든 사람이 다 저렇게 되는 걸까?”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냉수도 달콤하게 느껴지겠지. 저것보다 더한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어.”
금교가 알 듯 모를 듯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한편, 장공주는 곡 마마로부터 매화 숲의 모습을 전해 들으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얘들을 어쩌면 좋담……. 운요가 내일 늦잠을 잘 수 있도록 아침 일찍 깨우지 말라고 당부하거라. 곧 시집보낼 걸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밖에 안 드는군.”
곡 마마가 장공주의 잠자리를 봐주며 말했다.
“장공주 전하, 요즘 기온 차가 커서 무엇보다도 건강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목 소저 쪽은 소인이 잘 당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 * *
월왕이 국수를 다 먹은 후에도 떠날 기미가 안 보이자, 목운요가 이상해하며 물었다.
“사야, 그만 돌아가셔야 하지 않나요?”
“지금쯤 궁문이 모두 잠겨 있을 거다.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오늘 밤 여기서 묵으실래요?”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 제안에 월왕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에 무장 해제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초인의 인내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전에 부황과 정월 대보름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한 적이 있어, 오늘 밤 궁중에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싶구나.”
빨개졌던 목운요의 얼굴이 점차 회복되고 심장도 쿵쾅거림을 멈추었다.
“그럼 어서 가 보세요. 내일 아침 일찍 조회에 나가셔야 하잖아요.”
구정 연회도 지났으니 내일부터 다시 국정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월왕이 목운요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럼 이만 가 보마.”
“네.”
목운요는 월왕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후에야 창문을 닫았다.
매화 숲에 펼쳐진 은하수 같은 풍경과 사랑이 가득 담긴 월왕의 눈빛을 떠올리며, 목운요는 이불을 안고 침상에서 뒹굴었다.
잠자리를 봐주러 온 금란은 그런 목운요의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소저,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주무세요. 며칠 뒤 신부가 될 텐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줘야죠.”
“알겠어요. 금란도 어서 쉬어요.”
* * *
전날 밤의 단꿈에 젖은 목운요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아쉬웠다. 꿈속에서 그녀는 빨간 혼례복을 입고 월왕과 손을 맞잡은 채, 눈에서 꿀이 떨어질 듯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금란이 휘장을 걷자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장공주 전하께서 어제 소저가 늦게 잠자리에 든 걸 아시고, 일부러 깨우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벌써 아침 식사 시간도 훌쩍 넘었어요.”
목운요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말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더니, 오늘은 날이 개었네요?”
“네, 하룻밤 사이에 날씨가 완전히 개었어요. 바깥이 온통 은빛 세상이 되어 있더라고요. 어서 일어나서 구경하셔요.”
목운요가 재빨리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소저, 아까부터 계속 웃고 계신 걸 보아하니 기분이 몹시 좋으신가 보네요.”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보았더니 누가 봐도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어젯밤 꿈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더 짙어졌다.
“네, 기분이 좋네요.”
회귀 전의 목운요는 소씨 대부인 맹 씨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제 발로 짐을 싸서 진왕부에 들어갔었다. 그때의 심정은 불안함과 막막함뿐이었지만, 지금은 혼례를 앞두고 온통 기대감과 행복감뿐이었다.
단장을 마친 목운요는 장공주에게 문안하러 갔다가 한바탕 놀림을 당했다.
돌아오는 길에 선령이 머물렀던 곳을 지나는데 그리운 마음이 솟아났다.
“선령은 아무 소식 없나요?”
“네.”
“분명 혼례식 전에는 온다고 했으니 소식이 오면 바로 알려 줘요. 그리고 소우한테는 따로 청첩장을 보내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선령은 감감무소식이었고, 오히려 북강 쪽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주인님, 북강과 진왕이 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북강에서 진왕에게 철기와 군마를 제공하기로 했고, 진왕은 현재 조심스레 무장들을 포섭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무장? 누구지?”
“순씨 가문 순율(旬律)입니다.”
“이품 효기 참령 순율이라……. 예전부터 유왕와 제씨 가문과 대립하던 자였지?”
“맞습니다. 순율은 원래 일품 충용 장군이었으나, 군에서 부하 두 명을 폭행하여 위국후의 상주로 강직당했습니다. 성격이 포악하고 고집이 셀 뿐만 아니라 공적에 집착이 심해, 무장 신분으로서 여러 차례 조정 대신과 연락을 취해 반란을 꾀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목운요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그래서 진왕이 그자를 포섭한 거군. 한데 폐하의 명령 없인 대군이 함부로 서릉에 들어올 수 없을 텐데……. 게다가 이만 명의 황궁 근위병이 서릉을 지키고 있다는 걸 진왕이 누구보다 더 잘 알 텐데…….”
유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인님. 삼월 초사흘 날, 폐하께서 황실 장원에서 열리는 춘경(春耕) 대전에 참석하실 예정이라, 황궁이 빌 것으로 보입니다.”
목운요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황실 장원에서 열리는 춘경 대전이라……. 알겠다. 릉왕과 이씨 가문은 아직 잠잠하느냐?”
북강과 진왕이 연합했으니 릉왕과 이씨 가문도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릉왕과 진왕 모두 정월 대보름날에 북강 공주를 빙등회에 초대했으나, 북강 공주가 진왕의 초대에만 응한 걸 알고 릉왕이 크게 노했습니다. 하지만 따로 진왕을 겨냥하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암암리에 진왕의 무장 포섭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진왕을 도와주다니?”
예상 밖의 움직임에 목운요는 의아해했다.
“릉왕이 미치지 않고서야 발 벗고 진왕을 도와줄 리가 없지. 어쩌면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기 위한 것일지도 몰라.”
“주인님, 그림자 호위를 몰래 투입시킬까요?”
목운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림자 호위는 인원이 많지 않은 데다 각자 큰 쓸모가 있어서 더 이상 인원을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람을 시켜 알아볼 테니 그만 가 보거라.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는 대로 보고하고.”
그림자 호위는 중요한 순간에 적의 숨통을 자르는 예리한 칼과도 같아, 사소한 일에 함부로 소모할 수가 없었다.
“예.”
유구가 나간 뒤, 목운요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을 이어 갔다.
그때, 금란이 차를 올리며 말했다.
“소저, 내일이 바로 혼례식입니다. 그만 주무시지요.”
목운요는 애써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며 대답했다.
“그래야죠.”
* * *
날씨가 화창한 정월 열여드레.
빨간색 모란 무늬의 융단이 옥화궁에서부터 월왕부 대문 앞까지 쫙 깔렸다.
도로 양쪽에는 근위병이 서 있었고, 중심 거리는 통제됐다. 통행 금지령은 따로 내려지지 않다 보니 백성들은 근위병 뒤편에 옹기종기 모여 구경하느라 바빴다.
백성들 사이에서 목운요의 명성을 따라갈 자는 없었다. 그녀가 전파한 자수법 덕분에 많은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누군가는 비단 천에 손수 꽃송이를 수놓은 다음, 도로 양쪽 나무에 묶어 두기까지 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따라 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서로 나무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까지 일어날 뻔했다.
보다 못한 한 관원이 나서서 말렸다.
“비단 꽃을 수놓는 데에 시간뿐만 아니라 원단까지 들 텐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이에 백성들은 오히려 심기가 불편해졌다.
“저희 모두 온한 군주 덕분에 삼시 세끼 배불리 먹고 있는 건데, 오늘 같은 날 거창한 선물 대신 꽃 한 송이 수놓아 주는 게 뭐가 대수겠습니까? 군주께서도 분명 보잘것없는 저희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말리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