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한밤중의 어느 날
월왕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북강의 왕인 혁련엽은 부황의 권력을 부러워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대력조 흉내 내기에 급급하지. 하지만 북강과 대력조가 엄연히 다른 상황이다 보니, 오히려 백성들의 상황만 나빠지고 있다. 그런 곳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도 이해는 가는구나.”
목운요는 일부러 육냥의 과거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육냥을 어떡하면 좋을까요?”
“그동안 네 곁에서 많은 도움을 줬고, 또 그만큼 능력도 있으니 이곳에서 맘 편히 지내게 하자꾸나. 북강 쪽은 내가 해결하마.”
월왕은 목운요에 대한 육냥의 마음을 일찍이 눈치챘다. 하지만 육냥은 한 번도 선을 넘는 일 없이 목운요의 옆을 묵묵히 지켜 온 자였다.
물론, 연적을 계속 곁에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상대방이 자진해서 포기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목운요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사야,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아무 일 없겠죠?”
월왕이 목운요를 품에 안으며 달랬다.
“걱정 마라. 아무 일 없을 것이다.”
* * *
육냥의 진짜 신분은 목운요에게 있어 꽤나 큰 충격이었다. 궁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그녀의 얼굴은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금란이 걱정스레 물었다.
“소저, 괜찮으세요?”
“네. 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혹스러울 뿐이에요.”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육냥의 신분이 언젠가는 온 세상에 알려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게 분명했다.
“소저, 정 걱정되면 육냥에게 한동안 멀리 떠나 있으라고 하시지요.”
“육냥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꽤 많아, 지금 떠나면 오히려 유언비어를 초래할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그래도 소저께선 애초에 그를 거둬들일 때 진짜 신분을 전혀 몰랐기에 큰 문제는 안 되지 않을까요?”
“나는 떳떳해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죠. 게다가 북강 공주의 태도로 보아, 뭔가 꾸며 낼지도 몰라요.”
게다가 방해꾼인 이씨 가문까지 합세한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리라.
금란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소인이 우둔하여 소저께 아무 도움이 못 되네요…….”
“그런 말 말아요.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월왕 전하와의 혼례가 코앞인 걸요…….”
두 사람은 정말 힘겹게 오늘까지 왔다. 누군가가 방해를 한다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목운요의 두 눈에도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무슨 짓을 꾸민다면…… 제대로 혼쭐을 내 줘야죠.”
* * *
그 뒤로 한동안 북강 측은 큰 움직임이 없었고, 릉왕과 진왕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잠잠했다. 서릉 전체가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목운요는 채의한테 하운방의 일을 맡기고 혼례 전까지 궁에서 조용히 지냈다.
사실 전통에 따르면, 혼인을 앞둔 남녀는 삼 개월 동안 서로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이 워낙 급하게 정해진 데다 딱히 지켜보는 이도 없어 편하게 지냈다.
그렇게 정월 대보름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사흘 뒤면 혼삿날이라 이번만큼은 아무래도 만남을 자제하는 게 좋을 듯했다.
월왕의 생일날이기도 한 정월 대보름에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나, 며칠 뒤면 부부의 연을 맺어 매일 함께 지낼 것을 생각하니 위안이 됐다.
계단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목운요의 눈빛이 밤공기처럼 차가웠다.
금란이 겉옷을 살며시 걸쳐 주며 머리카락을 모아 밖으로 빼 주었다.
“소저, 밤공기가 찹니다. 그만 들어가시죠.”
목운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이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아요. 금교와 둘이 먼저 들어가서 쉬어요.”
“……네.”
목운요의 단호한 말투에 금란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었다. 대신 안으로 들어가서 난롯불을 더 세게 피우고 생강차를 준비한 다음 조용히 기다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자 목운요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입김을 불었다. 이럴 때 그 누구보다도 그리운 사람이 바로 월왕이었다. 그는 항상 크고 따뜻한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움에 잠긴 사이, 이마에 문득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밤하늘에 새하얀 눈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목운요는 미소를 지으며 금란이 남겨 둔 등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옥화궁은 황제가 특별히 장공주에게 마련해 준 거처였다. 호화로운 장식과 널찍한 마당은 심지어 황제의 거처인 양심거보다도 한 수 위였다.
뒤편에는 매화 숲이 조성되어 있었고, 특히 추위에 강한 한매(寒梅)만 심겨 있었다. 장인들의 정성스런 보살핌 덕에 며칠 전에 벌써 꽃눈이 돋아났다. 지금쯤 아마 꽃이 피어 있을지도 모른다.
등을 들고 뒤편으로 향하던 목운요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매화 숲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인 눈은 신경 쓰지도 않고 큰 상자에서 빙등을 조심스레 꺼내 열심히 바닥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분주한 뒷모습에 목운요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이 메어 왔다. 그러나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야, 한밤중에 뭐 하시는 거예요?”
바삐 움직이던 그림자가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준수한 얼굴에 조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요아, 이 시간에 왜 여길…….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
목운요가 다가가 손수건으로 그의 머리와 몸에 쌓인 눈을 털어 주며 말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데 뭐 하고 계셨던 거예요?”
따스한 등에 비친 목운요의 모습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안쓰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월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다 방금 빙등을 만져 자신의 손이 아직 차갑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손을 빠르게 놓았다.
“그게…… 운요가 궁밖에 나갈 수 없다 하여, 여기서라도 빙등을 구경할 수 있게 준비 중이었다.”
그의 대답에 목운요는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어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거예요……. 그걸 혼자 하려고 하다니, 심지어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밤에 말이죠. 옷이라도 좀 껴입든가, 제가 안 왔더라면 다 만들어 놓을 때쯤 사야도 그대로 얼어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러자 월왕이 미소를 지으며 목운요를 와락 품에 안았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싶어 마치 보물을 품듯 그녀를 안고 좌우로 흔들거렸다.
“너에게 빙등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얼어 죽어도 좋아.”
목운요가 두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그럼 전 한평생 과부로 살아야 하는 건가요?”
월왕이 냉큼 고개를 저었다.
“난 이 정도 추위에 끄떡없으니, 과부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너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이상, 무슨 일이 있든 약속을 지켜 낼 것이다.”
목운요는 눈앞의 월왕이 바보스럽기만 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생강차 좀 마셔요. 오늘 생일인데 국수 한 그릇 못 해 줘서 마음에 걸렸던 참인데, 마침 잘됐네요.”
월왕은 그제야 목운요를 품에서 놔주며 그녀의 외투를 여며 주었다.
“요아, 그 전에 준비 중이던 걸 마저 하고 가면 안 될까? 저기 처마 밑에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
그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그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날마다 그녀를 웃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의욕이 넘치는 월왕의 눈빛에 목운요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좋아요. 대신 저도 같이할래요.”
“안 돼.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기 때문에 온전히 내 손으로 해야 한다.”
월왕은 목운요를 처마 밑까지 데려다준 뒤, 다시 매화 숲으로 달려가 빙등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그런 월왕의 모습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주변에 점차 자리 잡는 빙등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토록 냉정한 사람한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었다.
마지막 빙등까지 옮겨 놓은 월왕은 빙등 하나하나에 불을 지폈다.
흰 눈이 흩날리고 매화꽃이 만개한 숲속에서, 따스하게 밝혀진 빙등들이 어느새 반짝이는 은하수를 이루었다.
목운요는 꿈처럼 아름다운 눈앞의 풍경과, 이걸 만들어 낸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두 눈 가득 담으려고 애썼다.
월왕은 마지막 빙등을 밝힌 뒤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보았다.
“요아, 마음에 드느냐?”
목운요는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는 그의 모습에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월왕도 그제야 환한 웃음을 보였다. 준수한 얼굴은 더욱더 눈이 부셨다.
“요아가 좋으면 나도 좋다.”
목운요는 들고 있던 등을 내팽개치고 한걸음에 달려가 월왕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러고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싼 채, 발끝을 세워 입술을 포갰다.
맞닿은 두 입술은 서로의 마음을 아낌없이 전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댔다. 뜨거운 숨소리가 한데 섞이며 주변의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 뒤에야 서로를 놓아주었다. 목운요는 월왕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터질 듯한 그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사야, 이러다 제가 응석받이가 되면 어쩌죠.”
월왕의 일거수일투족에는 그녀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목운요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고 있었고, 이러다 깊이 빠져 헤어져 나오지 못할까 봐 두려움도 생겼다.
월왕은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더 응석받이로 만들어서 아무도 뺏어 가지 못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절 보물처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사야뿐일걸요.”
월왕은 말없이 목운요를 토닥였다. 그에게 있어 목운요는 마치 밤하늘을 비추는 밝은 달과도 같았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누구나 그녀가 발하는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그걸 모르고 있는 눈치였고,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