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육냥의 진짜 신분
“예를 거두거라. 제명은 어떤 상황이냐?”
궁에 있을 때 유구가 간간이 소식을 전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듣는 것이 훨씬 마음이 놓였다.
“제명은 무사합니다. 진왕이 북강과 연락하기 시작했다고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아무래도 주인님께서 보내신 서신이 효력을 발휘한 것 같습니다.”
처음 서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육냥은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진왕같이 영리한 사람이 이런 단순한 꾀에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왕은 단단히 믿고 있었고, 심지어 몰래 북강에 연락을 취하기까지 했다.
“제명에게 만사 조심하라고 하거라. 혹시라도 상황이 나빠지면 당장 진왕한테서 빠져나와야 한다. 진왕이 워낙 속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 그냥 뒀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몰라.”
진왕은 자신의 능력에 자신만만한 사람이라, 지나치게 완벽한 계획은 오히려 그의 의심을 사는 편이었다. 반대로 이번 서신처럼 허점 가득한 계략은 오히려 그의 사고를 헷갈리게 하고 은연중에 믿음이 가게 만들었다.
목운요는 잠시 멍해 있는 육냥이 걱정스러워 조심스레 물었다.
“육냥,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육냥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목운요를 쳐다보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란이 다급히 들어와 알렸다.
“소저, 북강 공주께서 오셨습니다. 소저가 여기 계신 걸 알고 온 듯합니다. 그리고 저더러 왜 자신의 오라버니를 잡아 둔 건지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목운요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오라버니라니?”
“저도 잘못 들은 줄 알고 재차 확인했습니다만…….”
그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육냥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인님, 혁련이락이 말한 오라버니가 바로 접니다.”
육냥의 말에 목운요는 크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육냥, 너…….”
“주인님, 벌을 내려 주십시오.”
목운요는 미간을 힘껏 찌푸렸다. 육냥이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북강 왕족이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왕족이 어찌 노비 신세가 된 것이냐?”
“소인의 생모는 북강에 잡혀간 대력조 여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용모 때문에 북강 왕에게 보내졌고, 제가 태어난 뒤 공을 세운 북강 귀족에게 넘겨져 모욕을 참지 못해 자살했습니다. 이후 저는 노예 신분으로 북강 왕궁에서 자라게 되었고, 제 모친을 모욕한 귀족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러다 겨우 탈출해 대력조로 도망쳐 왔고, 인신매매범들한테 잡혔다가 주인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육냥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을 치욕이라 여겼기에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두워진 목운요의 표정에 금란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육냥이 갑자기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 들더니 자신의 가슴 앞에 갖다 댔다.
“주인님, 걱정 마십시오. 절대 주인님께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목운요의 표정이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육냥, 대체 날 주인으로 생각하긴 한 게냐?”
그녀의 분노 가득한 두 눈을 보고 육냥은 온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인님…….”
목운요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육냥이 들고 있던 비수를 빼앗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금란, 북강 공주한테 올라와서 얘기하자고 전해 줘요.”
“네.”
곧바로 북강 공주가 금란의 뒤를 따라 올라왔다. 그리고 육냥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육냥은 냉랭한 표정으로 혁련이락을 쳐다보았다.
눈앞의 공주는 꽃같이 아름답지만 심보는 전갈보다도 독했다. 그동안 그녀의 손에 죽어 난 형제자매가 수두룩했다.
목운요가 금란을 향해 말했다.
“금란, 손님께 차를 내줘야죠?”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혁련이락의 눈길이 목운요에게로 향했다.
“온한 군주를 뵙습니다. 제 오라버니가 워낙 과묵하다 보니 곁에 두시느라 애를 많이 쓰셨겠네요.”
“바로 여기로 찾아온 걸 보니 꽤 수소문하셨나 보네요. 쓸데없는 얘기는 제쳐 두고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혁련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너울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군주,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저는 단지 그동안 오라버니를 챙겨 주신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목운요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혁련이락을 쳐다보며,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공주께서 따로 할 얘기가 없으시다면, 대력조의 차나 맛보시지요. 심신 안정에 좋은 차인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대력조의 차 맛이 아무리 좋다 한들, 고향의 차만큼 마음에 들진 않겠지요.”
“그래도 대력조에 오셨으니 맛이라도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란은 한쪽에서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밖에 오가지 않았지만, 방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혁련이락이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자태는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러웠고, 딱 봐도 대력조의 예의범절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차를 비운 혁련이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 모두 오라버니 걱정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동안 실컷 놀았으니 이제 돌아와야죠?”
하지만 육냥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목운요의 곁에 서 있었다.
목운요는 찻잔을 내려놓곤 손수건으로 살며시 입가를 닦았다.
“공주 전하, 살펴 가십시오. 의복 제작을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하운방을 찾아 주십시오. 그 외 다른 일은 아쉽게도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혁련이락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군주, 욕심이 지나치시네요. 약혼까지 하신 분이 어찌 다른 남자를 꽉 잡고 안 놔주시려는 거죠?”
그 말에 금란의 안색이 매섭게 바뀌었다.
“그게 무슨……!”
방금 한 말은 분명 목운요의 정조를 더럽히는 발언이었다.
목운요는 눈빛으로 금란을 말렸다. 그러고는 옅은 미소를 유지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더 볼일 없으신 것 같으니 살펴 가십시오.”
혁련이락이 육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남릉(南菱)과의 혼약을 잊으신 건 아니죠? 북강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마음을 저버리진 말아요.”
아무 반응도 없던 육냥이 그 말에 갑자기 목운요를 쳐다보며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런 육냥의 반응을 지켜보던 혁련이락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하나 속으로는 심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대체 목운요란 이가 얼마나 매력적이길래 얼음같이 차가웠던 월왕을 부드럽게 녹이고, 살육의 검과 같았던 오라버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주인님, 혼약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급히 해명하려던 육냥은 목운요의 투명한 두 눈과 마주치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목운요는 두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생각이 많아졌다. 육냥의 이런 반응에 그녀도 그의 마음을 눈치챈 것이다.
“육냥,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소인은 주인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북강 공주가 직접 찾아온 걸 보아하니, 너를 북강으로 데려가려는 속셈인 듯하구나. 그런 거라면 더 이상 내 곁에 머물 수는 없을 것 같다.”
“주인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북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북강은 그에게 있어 악몽과 치욕의 땅이었다. 그곳에선 단 하루도 느껴 보지 못했던 살아 있다는 감정을 목운요를 만나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목운요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육냥. 너도 잘 알다시피 난 혼사를 앞두고 있고, 내 마음속엔 영군월 단 한 사람뿐이다.”
육냥의 마음을 눈치챈 이상, 되도록 빨리 그가 마음을 접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 절대 딴마음을 가지지 않을 겁니다. 다만 주인님의 곁에 남아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육냥이 머리를 숙인 채 공손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것이냐?”
목운요는 순간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월왕과 함께한 뒤로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육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두 눈이 목운요가 비치는 순간 점차 생기를 회복했다.
“주인님께서 육냥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순간부터, 소인은 새로운 삶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데 주인님의 곁에 더 이상 육냥이 설 자리가 없다면, 제 삶도 계속될 의미가 없을 겁니다.”
“너…….”
육냥의 단호한 표정에 목운요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으니 일단 월왕부에 가 있거라. 북강 공주가 네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다시 하운방에 찾아올지도 모르니, 월왕부로 잠시 피신하여 대책을 찾아보도록 하자.
“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목운요는 완성된 혼례복을 황궁으로 보낸 뒤, 육냥과 함께 월왕부로 향했다.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던 월왕은 목운요를 보자마자 가까이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요아, 왜 이리 늦게 온 것이냐?”
“성 공공, 사야와 이야기 나눌 일이 있으니 육냥을 데려가서 쉬게 해 주세요.”
성 공공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주 전하.”
월왕은 목운요를 서재로 데리고 왔다. 딴 데 정신이 팔린 듯한 목운요를 보자 걱정이 앞섰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사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육냥의 신분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북강 왕의 아들이더군요. 그러니까 북강 왕족 신분이었어요.”
월왕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북강 사신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냐?”
“북강 공주가 하운방으로 직접 찾아와 육냥을 북강으로 돌려보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육냥 본인은 그걸 원치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