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북강 공주의 등장
“왜 갑자기 그게 궁금해진 게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성년이 된 황자 네 명 중 릉왕과 유왕은 이미 혼인을 했으니, 사야와 진왕만 남았잖아요. 북강에서 공주를 보낸 걸 보면 뭔가 계획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 진왕은 두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았으니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아서요.”
목운요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에 월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나같이 황위에 관심도 없고, 오로지 여인에게만 정신이 팔린 황자가 과연 북강 공주의 마음에 들까?”
목운요가 콧방귀를 뀌며 월왕을 흘겨보았다.
“공주님 취향이 그럴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둘째 형님인 유왕을 겨냥한 것 같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이씨 가문은 이미 북강 왕족과 연이 있어, 통혼한다 한들 큰 이득은 없을 것이다. 지금 조정 내 세력으로 봤을 때 둘째 형님이 릉왕 다음이니, 둘째 형님을 선택하는 게 가장 이득이지.”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유왕 전하를 겨냥한 거라면 유왕비께서 상심이 크시겠네요.”
서로 죽고 못 사는 유왕과 유왕비 사이에 갑자기 북강 공주가 끼어든다면, 과연 어떤 일이 생길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째 형수라면 미리 대비를 해 둘 거다.”
황실 여인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일반 사람보다 수배는 막중했다. 여자들의 암투가 어쩌면 전장보다도 훨씬 치열하고 잔혹할지도 몰랐다.
* * *
서릉에 거의 다다를 때쯤, 배가 갑자기 크게 휘청거렸다.
목운요는 마침 선실에 있었다. 배가 흔들리면서 화로가 넘어지는 바람에 선실에 불이 붙었다.
함께 있던 월왕은 목운요를 품에 안고 배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을 부어 불을 꺼 버렸다.
“요아, 괜찮느냐?”
목운요는 손등에 화상을 입어 찌릿찌릿 아파 왔다.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바람도 없고 수면도 잔잔해서 배가 크게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때마침 우항이 문을 두드리며 아뢰었다.
“주인님. 저희 배와 북강 공주를 태운 배가 부딪쳤는데, 상대 배가 크게 파손돼 더 이상의 운항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해서 북강 공주를 서릉까지 태워 주길 부탁드린다고 합니다.”
북강 공주?
목운요가 통증을 완화하려고 손을 가볍게 털며 말했다.
“얼마 전에 얘기했던 북강 공주를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세상이 참 좁군요.”
월왕이 냉랭한 투로 말했다.
“우리 배를 북강 공주한테 넘겨주거라. 나와 운요는 마차로 가면 된다.”
“알겠습니다.”
공주 신분이다 보니 모른 척할 수는 없었지만, 크게 얽히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월왕은 공주한테 배를 양보하고 목운요와 함께 마차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목운요는 화상약을 꺼내 상처에 조심히 바르면서 월왕을 흘깃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사야께 접근하려는 작정인데, 일부러 피했다가 끝까지 쫓아오면 어떡하려고요?”
이 넓은 강 위에서 배끼리 부딪치는 확률은 결코 높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일부러 월왕한테 접근하려는 핑계일 뿐이었다.
월왕이 약을 빼앗아 대신 발라 주며 빨갛게 부어오른 목운요의 손등에 입김을 불었다.
“네가 싫어할 걸 뻔히 아니까 그런 거지.”
목운요가 웃으며 월왕에게 살짝 입맞춤했다.
“칭찬이에요.”
월왕은 곧바로 한 번 더 입맞춤을 시도하려 했으나, 목운요가 재빨리 일어서서 피했다.
“마차로 갈아탈 거면 어서 짐을 챙겨 내리죠.”
월왕은 아쉬운 마음에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그래.”
이내 배가 멈추자 두 사람은 곧바로 마차로 갈아탄 뒤 길을 떠났다.
뱃머리에서 너울을 쓴 미모의 여인이 떠나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뚫어지게 쳐다보던 여인은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시녀한테 분부했다.
“출발하거라.”
“예.”
* * *
북강 공주와 만나지 않기 위해 목운요와 월왕은 일부러 여유롭게 움직였다. 서릉에 도착했을 땐 벌써 섣달 스물아홉 번째 날이었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장공주와 허연한은 목운요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목운요가 빠르게 다가가 인사 올렸다.
“외할머니, 어머니를 뵙습니다.”
허연한이 얼른 다가가 목운요를 일으켜 세우며 위아래로 샅샅이 훑어보더니, 아무 탈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장공주와 허연한의 걱정 가득한 모습을 보자, 목운요는 가슴이 아파 왔다.
“앞으로 다시는 오랜 시간 집을 떠나지 않을게요.”
장공주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목운요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다. 고단했을 텐데 어서 쉬거라.”
“피곤하지 않아요. 북강 공주 일행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천천히 왔거든요. 그러니 같이 식사해요, 외할머니, 어머니.”
함께 식사를 마친 뒤, 목운요는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곤 목성이 남긴 서신과 옥패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서신을 읽은 허연한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생각이 옳았어. 목성은 절대 날 속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목운요는 가슴 한편이 저리는 걸 느꼈다.
“어머니. 아버지는 진심으로 저희를 사랑했어요.”
한바탕 울고 난 허연한은 두 눈이 퉁퉁 부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목운요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공주는 목성의 출신에 대해 듣고 나서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목성이 목씨 가문 출신이라니…… 이런 운명의 장난이 또 있을까. 연한아, 이제 과거는 모두 잊고 맘 편히 하루하루를 보내거라.”
허연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장공주가 목운요를 보며 물었다.
“요아, 그나저나 북강 공주를 만났다고 했느냐?”
“네. 저희 배와 부딪치는 바람에 저와 사야가 배를 양보해 주고 마차로 왔거든요.”
목운요는 허연한의 표정이 이상한 걸 눈치채고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허연한이 조심스레 말했다.
“북강 공주 혁련이락(赫連璃洛)이 어제 서릉에 도착하자마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단다. 월왕이 공주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배를 내주었다고 말이다.”
목운요가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저흰 그저 공주의 신분을 생각해서 일부러 배를 양보해 준 거예요.”
“그뿐만이 아니다. 어제 유왕 전하께서 북강 공주를 마중 나갔는데, 배에서 내릴 때 공주가 유왕 전하의 품으로 쓰러졌다는구나.”
목운요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왜 쓰러진 거죠?”
“환경이 낯설어서 그렇다더구나.”
목운요의 표정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리고 폐하를 뵙고 나서 출궁하던 중 치마가 찢어졌는데, 마침 진왕과 만났다지…….”
“혹시 릉왕과도 우연히 만났다던가요?”
“공교롭게도 릉왕과는 아직 만난 적이 없다는구나.”
어이없어하는 목운요를 보고 장공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구정 연회에 북강 공주도 참석한다고 하니 궁금하면 직접 보면 그만이지.”
“그렇네요.”
* * *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 목운요는 한창 바삐 돌고 있는 허연한을 발견했다.
“어머니, 일찍 일어나셨네요?”
“명절맞이 떡을 좀 만들어 볼까 하는데, 외할머니께서 좋아하시겠지?”
목운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저도 그래서 일찍 일어났거든요.”
두 모녀가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금란, 금교, 사금까지 합세한 덕분에 잠깐 사이에 십이 간지 모양을 한 떡이 줄줄이 완성됐다.
허연한은 다 만들어진 떡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지금 바로 외할머니께 가져다드릴 테니, 요아도 얼른 오너라.”
“먼저 가 계세요. 저는…… 좀 더 만들어서 사야께 갖다 드리려고요.”
목운요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허연한은 문득 경릉성에서 구정을 보낼 때가 떠올라 웃으며 말했다.
“경릉성에서 군월이 직접 떡을 만든 적이 있었지. 이마에 왕자가 새겨진 호랑이는 결국 요아가 먹어 버렸더랬지?”
목운요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럴 리가요. 잘못 기억하고 계신 거예요.”
“그래,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보구나. 그나저나, 요아는 예쁘게 빚지 못할 텐데 좀 도와줄까?”
“어머니, 또 절 놀리시네요. 그럴까 봐 일찌감치 틀까지 만들어 둬서 이번에는 잘 만들 수 있어요…….”
목운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허연한은 그런 목운요가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럼 어서 만들거라. 이따 옷을 입어 봐야 하니 늦으면 안 된다.”
“네.”
월왕이 자신이 빚은 게 먹고 싶다길래 여러 번 도전해 봤었지만, 도무지 모양이 정교하게 잡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틀까지 제작한 참이었다. 덕분에 반죽을 넣기만 하면 예쁘게 만들어져 쉽고 간편했다.
시루에 담긴 떡을 유심히 살피던 목운요는 손으로 호랑이 모양을 하나 더 만들어 넣었다. 뭔가 부족한 듯싶어 이마에 ‘왕’ 자까지 그려 두었다.
* * *
옷을 차려입고 황제에게 문안 가려던 월왕에게 우항이 찬합을 건네며 말했다.
“주인님, 목 소저께서 보내셨습니다.”
월왕은 들뜬 마음에 찬합을 열었다. 안에는 하얗고 포동포동한 토끼 모양 떡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배를 콕 찔렀더니 옴폭 들어갔다가 다시 원상 복귀되어 귀엽기 그지없었다.
우항은 슬쩍 곁눈질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야, 왜 비휴(貔貅, 곰과 비슷하다고도 하고 곰과 비슷하다고도 하는 맹수) 한 마리가 섞여 있는 겁니까?”
흉측한 모양의 비휴는 귀엽고 깜찍한 토끼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