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숨겨 왔던 비밀
“나야말로 네 덕을 많이 봤단다. 전에 네가 가르쳐 준 자수법으로 처음엔 손수건 같은 걸 만들다가, 점점 익숙해지다 보니 옷까지 만들게 되면서 살림살이도 점점 나아졌지 뭐니. 운요야, 정말 고맙다.”
“아주머니께서 솜씨가 좋은 덕분이지요.”
“어서 들어와서 목이라도 축이거라.”
예전이나 다름없는 목운요의 태도에, 양 씨도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양 씨는 남편에게 시위들을 대접하라 이른 뒤, 목운요와 월왕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양 씨가 식사 준비를 서두르자 목운요가 다급히 말렸다.
“아주머니, 저희는 식사하고 왔어요. 이번에 아버지를 뵈러 온 김에 잠깐 들른 거예요. 아버지를 뵙고 나서 곧장 서릉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이리 급하게 돌아가는 게냐?”
양 씨는 내심 아쉬웠다.
“설날 대목이라 음식 준비를 많이 해 두었거든. 잠깐만 쉬고 있으면 식사 준비가 끝날 것이다.”
“아주머니, 식사는 정말 괜찮으니 이야기를 더 나누어요.”
양 씨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너희 모녀가 떠난 뒤 사람들이 몇 번이나 마을로 찾아와 너희의 행방에 대해 캐물었단다. 마을 사람들 모두 한동안 불안에 떨었었지. 그런데 이렇게 두 사람 다 무사하다고 하니 이제야 한시름 놓이는구나.”
목운요는 양 씨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아버지를 만나 뵈러 갈 시간이었다.
그에 양 씨도 얼른 나섰다.
“내가 바래다주마. 길이 순탄치 않아 찾아가기 쉽지 않을 게야.”
“그럼 부탁드립니다.”
월왕이 시위들을 제자리에서 대기시킨 뒤, 목운요와 함께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한참을 걷던 양 씨는 한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목운요를 위로했다.
“너무 슬퍼 말거라. 네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네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쁠 거란다.”
이내 양 씨가 한쪽으로 물러났다.
눈앞의 자그마한 무덤을 보고 목운요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월왕은 마차에서 가져온 찬합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무덤 주변의 잡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목운요과 양 씨도 나서서 돕자 얼마 안 지나 주변이 깔끔해졌다.
목운요는 찬합에서 미리 준비해 온 술안주를 꺼내 무덤 앞에 둔 뒤, 초를 켜고 술잔에 술을 채웠다.
“아버지, 불효자 운요가 왔습니다.”
월왕은 목운요가 인사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옆으로 가서 다시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영군월, 장인어른을 뵙습니다. 앞으로 일편단심 운요만을 바라보며 운요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맹세하오니, 저희를 지켜봐 주십시오.”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자, 목운요는 조금씩 마음을 추슬렀다.
“아버지. 어머니와 저는 진짜 가족을 만나 잘 지내고 있어요. 소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고, 아버지를 해한 사람들 모두 대가를 치렀으니 편히 눈감으세요.”
월왕이 목운요를 부축해 일으키며 장옷을 여며 주었다.
“요아, 바람이 차구나. 그만 돌아가자.”
“네.”
목운요가 마지막으로 목성의 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만 가 볼게요. 정월 열여드레에 제가 이 사람한테 시집가요. 부디 저세상에서 저희를 지켜 주세요.”
두 사람이 떠날 채비를 하자, 양 씨가 다가와서 말했다.
“운요야. 이번에 가면 언제 올지 기약이 없으니 우리 집에서 식사라도 하고 갔으면 한다.”
목운요와 월왕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아주머니.”
양 씨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그래. 추우니 어서 돌아가자꾸나.”
양 씨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목운요가 전에 살던 곳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비워 둔 탓에 문고리에 녹이 슬어, 월왕이 힘껏 밀자 끼익하고 대문이 열렸다.
목운요가 냉랭한 눈빛으로 마당을 살폈다.
“여긴 이 씨가 살던 곳이에요. 저와 어머니는 잠깐 머물다 바로 경릉성으로 떠났죠.”
목운요와 함께 집 안에 들어선 월왕은 못내 마음이 아파 왔다.
그도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지내긴 했지만, 적어도 생계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목운요는 생계를 걱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 씨의 핍박까지 받아 왔을 걸 생각하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요아, 참 고생 많았구나.”
목운요가 멈칫하더니 곧바로 웃음을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만 좀 힘들었을 뿐이지, 그 외에는 괜찮았어요.”
그때, 밖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밖으로 나와 보니 한 중년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유 씨 아저씨?”
목운요는 깜짝 놀랐다. 오작 유 씨는 전에 그녀와 어머니에게 도움을 많이 준 이였다. 두 사람이 하언촌을 떠나기 전에 마차를 얻어 준 적도 있었다.
유 씨가 월왕과 목운요를 보며 인사를 올렸다.
“월왕 전하와 온한 군주를 뵙습니다.”
“예를 거두세요. 여긴 어떻게 오신 거죠?”
“하언촌으로 마차와 호위들이 갔다기에 혹시나 해서 와 보았습니다. 다행히 군주가 맞으셨군요. 실은 옛 벗의 부탁으로 물건을 전해 주러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죠?”
유 씨가 서신 한 통과 옥패 하나를 꺼내 목운요에게 건넸다.
“모두 목성이 남긴 것입니다. 목성이 생전에 당부하길, 군주께서 진짜 신분을 찾지 못하면 이 물건들을 전부 없애고, 찾게 된다면 군주께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목운요가 떨리는 마음으로 서신과 옥패를 받았다. 그리고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서신을 개봉했다.
목운요의 곁에서 함께 서신을 본 월왕은 크게 놀랐다.
서신에는 목성이 허연한의 출신에 대해 조사한 과정이 적혀 있었다. 거의 알아낼 즈음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목성이 육대세가 중 목씨 가문의 서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소란 중에 두 모자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생모의 병이 위중해지자 목성은 소씨 가문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다 소청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서신을 다 읽은 목운요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쩐지 아버지는 보통 시골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껴졌었는데, 목씨 가문 출신이었다니.
그녀는 옥패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작은 옥패에는 기린 모양이 각인되어 있었고, 아래에 ‘성’ 자가 새겨져 있었다.
목운요가 서신과 옥패를 넣어 두며 유 씨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고인의 부탁을 들어주니 저도 마음이 한결 편안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내 유 씨가 곧장 뒤돌아 떠났다.
목운요는 복잡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목씨 가문 출신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요.”
월왕이 그런 목운요를 살며시 품에 안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앞으로 잘 살아가는 것이 장인어른의 가장 큰 바람일 것이다.”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서신에 아버지의 출신과 어머니를 위해 진실을 알아내려 했던 노력이 다 적혀 있으니, 어머니께서 보시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실 거예요. 적어도 아버지의 마음이 진짜였다는 걸 어머니도 알게 되실 테니까요.”
허연한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늘 응어리 하나가 맺혀 있었다. 바로 목성의 마음마저 소씨 가문의 계획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비록 내색한 적은 없지만, 허연한은 지금도 가끔은 하늘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짓곤 했다.
하나 이 서신을 보게 된다면 허연한의 마음속 응어리도 사라질 것이리라.
“장인어른께서도 참 고단하셨겠구나. 소씨 가문과 맞서면서, 한편으론 장모님의 출신을 밝히려 애쓰고, 게다가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으니. 한 발, 한 발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요아. 육대세가가 제거된 이유가 정세 안정이긴 하나, 모든 세가가 다 권세를 탐했던 건 아니다. 목씨 가문은 대력조에 큰 공을 세웠었지. 돌아가자마자 부황께 청을 올려, 목씨 가문 사당을 세우자고 제안하마.”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출신을 밝힌 이유는 단지 저에게 자신이 소씨 가문의 하인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일 거예요. 아버지는 단지 어머니에게 안정적인 삶을 주고 싶었을 뿐, 출신과 가문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거죠. 그냥 마음 편히 하언촌에 머물게 해 드리고 싶어요.”
월왕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은 양 씨네서 식사를 마친 뒤 고마움을 전하고 마차에 올랐다.
아버지의 유품까지 받았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언성에 돌아온 두 사람은 곧장 배를 타고 서릉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서릉의 소식은 끊임없이 전해졌다.
릉왕의 생모 이 귀비가 황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쓰는 한편, 자신을 박해하는 다른 비빈들을 향해 복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후궁에서 지낸 세월만큼이나 많은 약점을 손에 쥐고 있었던 이 귀비는 순식간에 후궁을 뒤집어 놓았다. 비빈들의 문제가 하루건너 터진 것이다.
화가 난 황제는 후궁을 낱낱이 조사했고, 각종 사건을 기록한 책자는 두께가 족히 이 척이나 됐다. 비빈들은 거의 다 떳떳지 못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었고, 그중에서 그나마 제 귀비가 가장 결백한 편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으나, 다행히 목운요가 넉넉히 남겨 둔 약 덕분에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결국 후궁 비빈들을 크게 호통치고 꽤 많은 사람을 탄압한 끝에, 후궁이 드디어 다시 조용해졌다.
이 귀비가 신분을 회복할 기미가 없자, 이씨 가문은 궁으로 미인을 보냈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관심이 없을뿐더러, 곧바로 이 귀비가 있는 유리궁으로 보내 버렸다. 이 일로 이씨 가문은 조정 내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북강 사신들도 인내심이 바닥났다. 대력조에 통혼 제안을 했지만 계속 답변이 미뤄지자, 북강 공주가 이미 대력조로 오고 있으니 적합한 상대를 고르라고 통보를 내린 것이다.
목운요는 소식이 적힌 종이를 월왕한테 건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야, 과연 어떤 황자가 이 북강 공주를 데려가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