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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71화 (371/442)

371화 천천히 숨통을 끊는 방법

* * *

그 시각, 서릉은 폭풍 전야였다.

더 이상 재기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진왕이 며칠 사이에 금족령도 풀리고 봉호까지 되찾은 것이다.

게다가 진왕부에 한겨울에 꽃이 만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은 입을 모아 셋째 황자가 천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고 했다.

소식을 들은 릉왕은 이때다 싶어 소문을 더 널리 퍼뜨리려 했다. 자고로 황제만이 천자라 칭해질 수 있기 때문에, 진왕에 대한 황제의 불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릉왕이 움직이기도 전에 진왕이 한발 앞섰다.

진왕은 직접 황제를 찾아가 밖에서 나돌고 있는 과장된 소문에 대해 통촉해 달라고 말했다.

황제는 오히려 그런 진왕의 신중한 모습에 흐뭇해했다. 몇 마디 위로를 건넨 뒤 함께 식사까지 하고 돌려보낼 정도였다.

그러던 중 소문이 와전되다 못해 진왕이야말로 진정한 천자이며, 황제는 황위에서 물러나야 마땅하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차 싶은 릉왕은 다시금 소문을 잠재우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크게 화가 난 황제는 당장 조사를 명했고, 결국 릉왕의 덜미가 잡혔다. 릉왕은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내세우며 모든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웠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처형하고, 릉왕에게 하인들을 똑바로 가르치라고 명했다.

이 일로 황자 세 명의 암투가 수면 위로 떠올라 공공연해졌다.

이씨 가문을 뒤에 업은 릉왕은 지지 세력이 가장 많았다.

유왕은 군사력을 지닌 데다 주위에 정직한 대신들이 많았다.

진왕의 세력은 그중에서 가장 약하긴 하나, 평판이 가장 뛰어났다.

결국 셋 중 누가 황위에 오를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 * *

장공주와 함께 옥화궁에 머물며 허연한은 그동안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 요아와 군월이 구정 전에 돌아올 수 있을까요?”

“요아가 꼭 그 전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마음 놓고 기다려 보자꾸나.”

장공주는 목운요가 특별히 만들어 준 차를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안 봤더니 요아가 벌써 보고 싶구나.”

“그러게요. 늘 곁에 있을 땐 잘 몰랐는데, 갑자기 없으니 하루가 일 년같이 길게 느껴지는군요.”

곡 마마가 다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벌써부터 이러시면 나중에 소저를 시집보내고 나서는 어떡한단 말입니까?”

장공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생각만 해도 심란하군. 요아를 시집보내려니 가슴속에서 살덩이 한 점을 베어 내는 듯하구나. 아무래도 황상께 얘기해서 장공주부에 신방을 차리라고 해야겠구나. 월왕부는 멀어도 너무 멀다.”

허연한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요. 마차로 반 시진이나 걸리니 멀긴 멀지요.”

“이따 바로 황상께 가 봐야겠군.”

그에 곡 마마가 옆에서 웃었다.

“그동안 전하께서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건만, 이번에 소저 때문에 전례를 깨겠네요.”

“조정 사람들은 날 공경하는 척해도, 속으로는 날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이번 기회에 전례를 깨면서, 나에겐 내 자식 외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는 경고를 보내야지.”

허연한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런데 어머니, 전에 요아가 이 귀비를 무너뜨릴 계획이라고 하던데, 제가 나서도 될까요?”

“네 생각은 어떠냐?”

“음, 뱀을 잡으려면 정곡을 찔러야 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뱀이 너무 커서 공격이 어려울 땐, 다른 곳을 찔러 힘을 빼는 방법도 있습니다. 둔탁한 칼이 느리긴 해도 숨통을 끊기엔 충분하거든요.”

“딱 맞는 비유구나. 그럼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느냐?”

“심오한 계략 같은 건 없습니다만, 인과응보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주 귀인과 시위의 간통 사건도 이 귀비가 꾸민 짓인 걸로 압니다. 그 일로 후궁 비빈 여럿이 유산까지 해야 했지요. 그 죗값을 치를 때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긴 하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단다. 이 귀비가 한 짓들에 대해 황상께서 모르고 계시진 않을 거다. 설사 까발린다 해도 이씨 가문이 굳건한 이상, 이 귀비도 기껏해야 벌을 좀 받는 것뿐이겠지.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너에게 복수하려고 달려들 게 뻔하다.”

허연한이 크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금 이씨 가문을 노리는 게 우리만은 아니다. 잘 연합하기만 하면 분명 이기는 싸움이 될 것이야.”

“어머니, 그럼 제가 내일 제 귀비를 찾아뵐게요. 곧 생신이기도 해서 선물을 드릴까 해요.”

“그래.”

* * *

궁에서 작은 연회가 열렸다.

북강 사신은 황제와의 만남에서 은연중에 통혼(두 집안이 혼인 관계를 맺음) 의사를 밝혔다.

황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렇게 연회가 무탈하게 끝난 것도 잠시, 제 귀비가 서재에 찾아와 황제한테 내무사 장부에 이상이 있다고 아뢰었다. 누군가가 칠팔 년간 몇십만 냥을 횡령해 왔다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크게 노한 황제는 당장 내무사 총관을 불러들이고 대대적인 장부 조사에 나섰다.

끝까지 잡아떼던 내무사 총관은 결국 자결했고, 그 밑에서 일하던 관리 세 명도 죄가 두려워 자살했다.

장부 조사 결과, 제 귀비의 말대로 횡령 정황과 더불어, 은자들의 행방이 이 귀비와 연관 있음이 드러났다.

릉왕과 이경주는 곧바로 궁으로 소환됐다. 정전에서 무릎 꿇고 벌벌 떨고 있는 이 귀비를 보자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황제는 이경주를 향해 장부를 냅다 던지며 크게 화를 냈다.

이 귀비는 자신이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내무사 주요 관리들이 전부 죽은 터라 그녀의 결백을 밝혀 줄 이가 없었다.

바로 그때, 시위가 찾아와 ‘궁녀를 심문하는 도중 오래전 주 귀인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며 아뢰었다.

궁녀는 이 귀비가 주 귀인에게 약을 먹인 뒤, 시위를 시켜 주 귀인을 능욕하여 회임까지 시켰다고 자백했다. 뿐만 아니라 캐내면 캐낼수록 오래전 이 귀비가 했던 짓들이 줄줄이 드러났다.

이 귀비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고, 릉왕은 이마에 멍이 들도록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하지만 황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당장에서 이 귀비를 빈으로 강등시키고, 당분간 유리궁에 가두라고 명했다.

뒤이어 내무사 재정비 명령이 내려지자, 제 귀비는 장공주의 조력하에 이씨 가문 사람들을 대거 제거하였다. 그로 인해 릉왕과 이씨 가문의 밀정이 반 이상 줄어들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명으로부터 진왕의 두 다리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릉왕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갈피를 잃었다. 유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 이 상황에 진왕이라니, 이대로라면 정말 황위가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릉왕은 이경주와 상의도 없이, 진왕 신변에 심어 둔 사람을 통해 또 한 번 진왕에게 독을 쓰려 했다.

하지만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진왕에게 발각됐고, 밀정은 심문 끝에 모든 자초지종을 자백했다. 진왕은 직접 그를 데리고 황제한테 가서 독약을 보여 주었다.

황제는 또 한 번 크게 노함과 동시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릉왕이 아무리 권력에 눈이 멀었다 해도, 친동생에게 독을 쓸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황제는 노골적인 처벌 대신, 은밀히 유왕과 진왕에게 힘을 실어 주며 릉왕의 세력을 점차 줄여 갔다.

그렇게 조정 내 세력 싸움은 엎치락뒤치락 끝없이 지속되었다.

* * *

그 시각, 목운요와 월왕은 언성에 도착했다.

서릉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지만, 서릉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구정을 앞둔 성내는 어딜 가나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언성 객사에서 휴식을 취한 뒤, 두 사람은 마차로 갈아타고 천천히 하언촌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다 보니,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네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목운요는 전에 자신과 어머니를 유독 챙겨 줬던 양 씨 아주머니가 생각나 곧장 그리로 향했다.

마을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고, 양 씨의 집은 크고 넓은 새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마차를 보고 신기해하며 졸졸 뒤따라왔다.

개 짖는 소리에 밖으로 나온 양 씨는 문 앞에 멈춰 선 마차와 호위들을 보고 순간 긴장했다. 남편을 불러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마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짙은 보라색 구름무늬 장포에 옥대를 차고, 머리에는 금관을 쓴 남자는 범접 불가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당황한 양 씨가 우왕좌왕하고만 있는데, 남자가 뒤를 돌더니 한 소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소녀는 은빛 비단 장옷을 걸치고 있었다. 장옷이 바람에 날리자 정교한 자수가 수놓아진 꽃무늬 치마가 은은히 보였다.

양 씨는 소녀를 유심히 살피며 낯이 익다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놀라서 크게 소리쳤다.

“운…… 운요?!”

목운요가 양 씨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양 씨는 전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해 보였고 의복도 단정해져 있었다.

“아주머니,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눈시울이 붉어진 양 씨는 곧장 다가가 목운요의 손을 와락 잡았다.

“운요 맞구나! 참 다행이다. 그동안 너와 소청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나저나 그동안 어디에 있었길래 소식 한번 없었던 것이냐?”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저와 어머니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목운요의 대답에 양 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제야 민망함이 몰려왔다.

눈앞의 목운요는 더 이상 여위고 허약한 꼬마가 아니었다. 날씬한 자태에 고귀함이 물씬 풍기는 걸 보자, 문득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운요, 내가…….”

양 씨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목운요는 그런 양 씨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도 아주머니를 늘 생각하고 계셨어요. 이렇게 무사히 잘 지내시는 모습을 보면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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