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여심을 사로잡는 비법
* * *
구정이 점점 가까워졌다.
예부 전수정의 구박 아래 북강 사신들은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다만 얼마 참지 못하고 다시 난동을 부릴 거라는 유왕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꽤 잘 버텨 내고 있었다.
마침내 예의범절 교육이 끝나고, 유왕은 직접 가서 확인한 후에야 그들의 입궁을 허락했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북강 사신들을 삼 일 뒤에 펼쳐질 작은 연회에 초대하기로 했다.
그 시각, 옥화궁 내.
“외할머니…….”
장공주는 간절한 표정의 목운요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어이 하언촌으로 돌아가 목성을 위해 분향하겠다니, 말리진 않으마. 다만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빨리 다녀와서 구정은 함께 보내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허락을 받은 목운요는 곧장 방으로 향했다.
짐을 싸고 있는 금란과 금교를 지켜보며 선령이 말했다.
“어차피 궁에서 할 일도 없는데, 너랑 같이 다녀올까 봐.”
“아버지 제사 지내러 가는 건데, 따라와서 뭐 하려고?”
목운요가 장공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고집을 부린 건, 혼인을 앞두고 아버지를 한 번쯤은 찾아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혼자 남으면 심심하단 말이야. 서릉에서 하언촌까지 한참 걸릴 텐데. 게다가 장공주 전하께서 너를 잘 지켜 주라고 했으니 당연히 따라가야지.”
“사야께서도 함께 갈 거라 별일 없을 거야.”
“나보단 잘 보살피지 못할걸? 됐고, 어서 출발이나 하자. 더 늦어지면 머물 곳이 없을지도 몰라.”
선령은 곧장 목운요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 * *
월왕은 마차에 기댄 채 궁문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아, 어서 가자.”
그에 한발 먼저 마차에 오른 선령이 목운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운요, 어서 타.”
그제야 선령의 존재를 눈치챈 월왕이 깜짝 놀라자, 선령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월왕 전하를 뵙습니다. 장공주 전하로부터 군주의 곁에서 잘 보살피라는 명을 받아, 이번에 함께 하언촌으로 가게 됐네요.”
장공주의 명이라고 해야, 월왕이 자신을 마차 밖으로 내던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선령의 해명에도 월왕의 표정이 영 좋지 않자 목운요가 나서서 타일렀다.
“저희 둘이 마차에 탈 테니 사야께서는 말을 타고 가셔야겠네요.”
양해를 구하는 목운요의 눈빛에 월왕도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알겠다.”
목운요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했건만, 갑자기 다른 이가 끼어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선령을 목운요 곁에 두지 말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한편, 마차 안에서 선령은 승리의 웃음을 지었다.
“대체 왜 사야한테 짓궂게 구는 거야?”
“짓궂다니, 모두 너를 위해서야. 남자들이란 혼인 전에는 별도 달도 따 준다지만, 혼인하고 나면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많아. 지금 여러 가지 시련을 줘서 마음을 확인해야 나중에 덜 후회하는 법이지.”
그러더니 선령이 갑자기 귓속말을 했다.
“필요하면 환각 가루를 만들어 줄 테니 월왕한테 먹여 봐. 그럼 모든 비밀을 남김없이 털어놓을 거야.”
목운요가 힘껏 눈을 부라렸다.
“헛짓하지 마. 설사 숨기는 게 있더라도 전부 날 위해서일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비밀이 없을 순 없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절대 건드리지 못하는 구석이 있는 법이었다.
* * *
마차는 무사히 서릉을 벗어났다.
선령이 손난로를 목운요의 손에 쥐여 주며 물었다.
“운요, 그런데 왜 갑자기 하언촌에 가려는 거야?”
“갑자기 내린 결정은 아니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하언촌을 떠난 뒤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거든. 그러다 올해 드디어 외할머니의 품으로 돌아왔고 아버지의 사인도 밝혀졌으니, 제대로 제사를 올려 드리려고 해.”
그동안의 많은 일들 때문에 아버지가 기억 속에서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은 늘 가슴 한쪽을 뜨겁게 달궈 웃음 짓게 했다.
목운요의 슬픈 표정을 본 선령은 한쪽에 기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모든 아버지의 소원은 딸이 행복하게 사는 것일 거야. 우리 집 영감만 봐도 그래. 내가 속 썩일 땐 화가 나서 펄쩍 뛰더니, 약선골이 무너지자 날 위해 밑천을 두둑이 남겼잖아. 그동안 내가 강호를 누비며 다녔던 게 당연히 내 능력 덕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영감이 몰래 많은 도움을 줬던 거였어.”
목운요의 눈빛도 아련해졌다.
“아버지는 유독 날 보물처럼 여기며 사랑해 주셨어. 몸이 약해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다닐 수 없으니, 아버지가 늘 함께 놀아 주고, 나무도 타고, 물놀이도 하고, 새도 잡고, 물고기도 잡고 했었지……. 돌이켜 보면 유년 시절의 반은 그렇게 아버지 품에서 사랑받으며 자랐던 것 같아. 그런데…… 제대로 효도하기도 전에 일찍 떠나셨지…….”
선령이 주머니에서 토끼 모양의 떡을 꺼내 목운요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회상하는 건 좋지만 절대 울진 마. 난 누가 내 앞에서 우는 거 딱 질색이야. 눈물 떨구기만 해? 간지럼을 태워서 하루 종일 웃게 만들어 줄 테니까.”
상심에 젖었던 목운요는 선령의 말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훈훈한 마차 안과 달리, 말을 탄 월왕의 얼굴은 한겨울의 시냇물보다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진 우항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 월왕과 떨어져 가는 중이었다.
그때, 월왕이 마음에 걸린 목운요가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사야, 들어와서 따뜻한 차라도 한 모금 하시지요.”
목운요와 눈이 마주친 월왕은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괜찮다.”
하지만 대답하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온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걱정스러운 눈을 한 목운요가 쥐고 있던 손난로를 건넸다.
“사야, 이거라도 가슴에 넣어요.”
월왕은 냉큼 건네받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어서 창문 닫거라. 바깥 공기가 차서 감기 걸릴라.”
목운요가 안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밖으로 손을 뻗었는데, 손가락 끝이 얼어 버릴 듯 차가웠다. 이런 추위 속에서 말을 타고 있는 월왕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파 왔다.
“사야, 조금만 더 가면 배로 갈아타니 그때까지만…….”
“요아, 걱정 말거라. 난 괜찮다.”
월왕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그 모습을 선령은 마차 안에서 유심히 살폈다. 성격이 차갑고 말주변이 없다더니, 누가 봐도 여우 탈을 쓴 늑대임이 틀림없었다.
원래 서릉만 벗어나면 떠날 생각이었는데, 목운요를 지키려면 배로 갈아탈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한편, 월왕은 따끈따끈한 손난로를 가슴에 품으며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이를 지켜보던 우항은 이 모든 것을 머리에 새겨 두었다.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적당히 뻔뻔스러워야 하고, 적당히 흑심도 품어야 했다.
월왕이 가장 좋은 예시였다.
춥고 열악한 월서에서 오래 지낸 월왕은 추위에 무척이나 강했다. 하지만 목 소저 앞에선 오들오들 떨면서 동정심을 유발했다. 사랑을 위해서는 약간의 거짓말도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것이다.
우항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써먹어 보리라 다짐했다.
* * *
마차는 어느새 강변 부두에 다다랐다. 목운요와 월왕 일행은 곧장 배에 올랐다.
한데 선령이 자신의 짐을 꺼내 들더니 목운요를 향해 손을 저으며 인사했다.
“난 볼일이 있어 약선골에 다녀올 테니 무사히 잘 다녀와. 혹시라도 강도를 만나거든 독 가루를 냅다 던지고. 알았지?”
“어쩐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그때, 강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신나게 팔을 흔들었다.
선령은 순간 당황하더니 황급히 얼굴을 너울로 가렸다.
“먼저 갈게. 네 혼인날 전엔 서릉으로 돌아갈 거야.”
그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돌아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강 맞은편에 있던 사람은 조급했는지 물 위를 가볍게 밟으며 강가에 도착했다. 대단한 경공이었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는 훤칠한 키와 달리 스물을 갓 넘은 듯 어려 보였다.
그는 목운요와 월왕을 보자 발걸음을 멈추고 의복을 정리하며 인사 올렸다.
“저희 사저(師姐, 같은 스승을 둔 손위 여성)를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운요는 문득 선령이 차고 있던 향낭이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인사 올리곤 곧바로 선령의 뒤를 쫓아갔다.
“사저, 잠시만요……!”
그에 선령은 잡히기라도 할세라 더 빨리 도망갔다.
“사저, 천천히 가십시오. 오랜만이라 할 얘기가 한 보따리란 말이에요. 사저, 약선골에 저희 둘밖에 안 남았는데 사이좋게 좀 지냅시다……!”
목운요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야, 저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죠?”
“그래. 잘 어울리는군.”
부디 두 사람이 잘돼서 다시는 자신과 목운요의 곁에서 알짱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목운요가 월왕한테 찻잔을 건네며 나긋이 물었다.
“사야, 지금쯤 서릉은 어떤 상황일까요?”
사실 이 시점에 제사 지내러 가는 건 서릉의 어지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다.
어차피 자신과 월왕 모두 서릉의 일에 깊이 참여하지 않기로 한 이상,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월왕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걱정 말거라. 둘째 형님께서 잘 해결하실 거다. 그리고 부황도 고모님도 계시니 아무 일 없을 거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