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고육지책
진왕이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벗으며 옷에 남은 찻물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이씨 가문과 북강이라……. 결코 지어낸 얘기 같진 않다. 저자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큰형님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지!”
“대력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강과 왕래를 하다니, 그건 호랑이에게 고기를 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진왕이 다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명의가 말한 약재는 준비되었느냐?”
시력이 회복되고 나니 두 다리로 걷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두 가지만 더 찾으면 됩니다.”
“그래. 전에 시킨 것도 잘 준비되었지?”
“예, 전하. 모두 준비 마쳤습니다.”
“그래 계획대로 된다면 내일 부황께서 금족령을 해지할 뿐만 아니라, 봉호도 다시 하사하실 것이다. 만약 내가 북강과 이씨 가문 사이의 증거를 찾아낸다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
진왕은 제명의 말이 전부 사실이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 만한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길 테니까.
심복이 새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전하. 곧 월왕과 온한 군주의 혼인날이라 소인이 미리 선물을 준비해 뒀습니다만, 혹시 다른 분부가 있으신지요?”
순간 진왕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없다. 이만 가 보거라.”
“예.”
심복이 나가자마자, 진왕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이튿날 아침.
진왕부의 매화나무 숲과 호수에 하룻밤 사이 꽃이 폈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에 황제는 시위를 보내 확인하고 오게 했다.
진왕부에 다녀온 시위가 사실이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자, 조정 전체가 순간 들끓었다.
일부 관원들은 분명 하늘의 계시라고 주장했다. 꽃이 미리 피는 것은 자고로 길조이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직접 진왕부에 가 보기로 했다. 관원들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장공주에게도 어김없이 소식이 전해졌다.
“요아, 황상께서 겨울에 피는 연꽃이 있다며 함께 구경 가자시는구나.”
“그런 신기한 광경은 놓칠 수가 없죠. 다만, 어머니께서는 감기에 걸려 외출이 어려우실 것 같아요.”
“연한은 쉬게 두어라. 연꽃 구경은 역시 여름이 제격이긴 하지. 공들여 피운 한겨울의 연꽃은 구경 안 해도 그만이다.”
장공주는 모든 것을 훤히 꿰뚫은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한겨울에 연꽃이 피었다? 누가 봐도 일부러 계획한 일이 틀림없었다. 하다 하다 이런 수작까지 부리다니, 셋째 황자의 계략이 상상 그 이상이었다.
* * *
진왕부에 들어선 사람들은 활짝 핀 매화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피어난 꽃들은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그때, 사람들의 눈에 연못 옆에 무릎 꿇고 있는 영군진이 들어왔다. 얇은 흰색 장포를 걸친 영군진은 두 손을 합장한 채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눈썹에는 성에까지 끼어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에도 그는 미동이 없었다. 마치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듯했다.
이에 황제가 헛기침을 하자 영군진도 그제야 눈을 떴다.
한데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영군진이 갑자기 눈을 부여잡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크윽.”
황제와 동행한 태의들은 서둘러 달려갔다. 이내 한 태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외쳤다.
“폐하, 황자 전하의 눈이 회복됐습니다! 오랜만에 빛을 보다 보니 통증이 나타났을 뿐, 지금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회복이라니? 그 말인즉, 군진이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다는 말인가?”
“예.”
태의가 대답하자 관원들이 놀라워하면서 앞다투어 축하 인사를 올렸다.
“폐하, 역시 한겨울에 꽃이 피는 것은 하늘의 예시임이 틀림없습니다. 황실에 좋은 일이 생기려나 봅니다.”
황제는 기뻐하며 영군진에게 다가갔다.
“군진, 부황이 보이느냐?”
영군진의 맑은 두 눈에도 기쁨이 가득 여려 있었다.
“부황……. 부황을 다시 볼 수 있다니, 하늘이 소자의 소원을 들어준 게 틀림없습니다! 하늘이 제 다른 소원인 부황의 만수무강도 들어줄 거라 믿습니다.”
황제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방금…… 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냐?”
“예. 더 이상 부황을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 이렇게나마 부황께 효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황제가 다급히 외투를 벗어 그에게 걸쳐 주었다.
“군진. 네 마음을 잘 알았으니 더 이상 그러지 말거라.”
영군진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황. 사실 전에는 부와 명예를 잃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잃고 나니,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더군요. 철이 없는 소자 때문에 부황께서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자의 수명을 부황의 건강과 맞바꾸겠다고 하늘에 빌었습니다.”
황제는 영군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냐…….”
하지만 영군진은 오히려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부황. 하늘이 소자의 소원을 들어준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제 두 눈도 낫게 해 주었겠지요.”
한편 영군진을 바라보는 목운요의 눈빛은 시종일관 냉랭했다. 참으로 거짓 연기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초연한 모습을 보일수록 황제의 마음이 더 연약해진다는 걸 잘 아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군진의 말에 황제는 가슴이 찡해졌다.
“군진, 너를 어쩌면 좋겠니……. 태의, 진왕의 몸 상태는 어떠한가? 두 다리도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가?”
진왕이라니? 사람들은 황제가 곧 진왕의 신분을 회복할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조정에 또다시 비바람이 불리라.
태의가 바로 답했다.
“폐하, 그건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태의가 영군진의 두 다리를 눌러 보며 관찰하는데, 영군진의 심복이 다급히 말했다.
“태의, 전하 무릎에 상처가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상처?”
황제의 두 눈에 안쓰러움이 가득 찼다.
“혹시 아까 바닥에 꿇고 있을 때 생긴 상처인 것이냐?”
무릎에 상처가 날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오래 꿇고 있었던 걸까? 이러다 두 다리가 낫더라도 통증이 계속될지도 몰랐다.
태의가 조심스레 진왕의 바지를 걷어 올렸다. 무릎은 동상에 걸린 데다, 피멍투성이였다.
“진왕 전하, 무릎 상태가…….”
영군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작은 상처일 뿐, 괜찮습니다.”
황제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군진, 어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게냐?”
“부황. 어리석은 게 아니라 하늘에 제 진심이 닿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래야만 제 소원을 들어주어 부황의 건강을 지켜 줄 테니까요.”
“너…….”
황제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태의, 최선을 다해 진왕을 치료하거라. 그 어떤 후유증도 남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진왕의 효심을 높이 사, 오늘부로 금족령을 해제하고 진왕 봉호를 회복한다. 하사품으로는 옥여의 한 쌍과 진주 열 곡…….”
옥여의란 말에 진왕은 속으로 미소를 금치 못했다.
옥여의는 부황이 기분이 아주 좋을 때에만 내리는 상으로, 이를 하사한다는 건 예전의 일을 반쯤 용서한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목운요는 아무 말 없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진왕이 드디어 조정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됐으니, 그동안의 계획도 드디어 막을 올릴 때였다.
* * *
목운요가 옥화궁으로 돌아와 손을 녹이는데, 선령이 뜨끈한 생강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셋째 황자한테 갔다 왔다며. 별일 없었어?”
목운요가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웃으며 답했다.
“이젠 진왕이라 불러야 해.”
“진왕?”
선령이 혀를 끌끌 찼다.
“진왕 전하의 계획이 성사됐나 보군. 그나저나 진작에 다 나은 눈을 지금까지 감춰 오다니, 참으로 대단하시지. 게다가 눈밭에서 열흘도 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니, 얼마나 독하게 마음먹은 걸까?”
“진왕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한테도 매정하거든. 재기를 위해 모든 걸 내놓은 거지. 물론…….”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절대 진왕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목운요의 중얼거림에 선령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왜 진왕을 그토록 미워하는 거야? 혹시 전생에 큰 원한이라도 있었던 거야?”
목운요가 잠깐 멈칫했다 선령의 이마를 장난스레 밀었다.
“그래, 아주 흉한 꼴을 봤거든.”
“그랬단 말이지? 두고 봐. 내가 아주 톡톡히 혼내 줄 테니.”
목운요가 말릴 새도 없이 선령은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뒤돌아서 나갔다.
마침 다과를 들고 들어오던 금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목운요에게 아뢰었다.
“소저, 이 귀비께서 얼굴에 난 발진이 점점 심각해져 또 난동을 부리셨다지 뭐예요. 이씨 가문에 몇 번이나 서신을 보냈다 하니 아마 곧 소식이 있을 듯합니다.”
“알겠어요.”
* * *
이틀 뒤, 잠자리에 들려던 목운요의 방에 촛불이 흔들리더니 유구가 갑자기 나타났다.
“주인님, 역사에 머무르고 있는 북강 사신들의 신분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이씨 가문이 북강에 서신을 보내 미인 파상이란 독에 대해 물었으나, 북강이 완강히 부인하면서 사이가 틀어진 듯합니다.”
유구가 건넨 문서를 넘겨 보던 목운요는 마지막 장에서 멈칫했다.
“곽오(郭奡), 이자가 대력조 사람이라고?”
“곽오의 선조가 전조(前朝) 관원이었는데, 전조가 멸망하자 가문 전체가 북강으로 도망갔다 합니다. 후손들도 대대로 북강에 정착해 지금은 북강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전조……. 곽씨 가문…….”
목운요가 다시 한번 문서를 자세히 살피더니 유구를 바라보았다.
“이 곽오란 자를 유심히 살피거라. 북강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북강 왕족의 신임을 얻은 걸 보면 기필코 남다른 데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눈에 띄지 않게 사절단 속에 묻혀 있다니,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구나.”
“예.”
“이씨 가문도 계속 예의주시하거라. 이씨 가문이 이 귀비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북강에 다시 연락을 취할 거고, 단서를 얻지 못하면 직접 북강 왕족에게 연락할 수도 있다. 그때 증거가 될 만한 걸 확보한다면 이씨 가문을 무너뜨릴 승산이 있을 것이다.”
“예, 맡겨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