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68화 (368/442)

368화 제명의 활약

목운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뭔가 큰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지. 제명은 여전히 소식이 없느냐?”

“어제 드디어 소식을 전해 왔어요. 이씨 가문의 의심을 받긴 했지만, 다행히 심각하진 않더군요. 습보헌과 저희의 관계를 알아차리진 못했고, 제명이 의심스러워 철기 밀매죄를 습보헌에 뒤집어씌우려던 것이었어요.”

“제명을 빼내려면 지금이 적기 아닐까?”

목운요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셋째 황자를 이용하자는 말씀인가요?”

“어쩌면 가장 좋은 구실일지도 모르지. 어차피 제명을 이씨 가문으로 보낼 때 그를 이용한 적이 있으니, 한 번 더 이용해도 무방하지.”

“그렇긴 하죠. 이따 바로 육냥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할게요. 사야께서도 당분간은 조정에 나가지 마시고, 폐하의 곁을 지키십시오.”

“그래.”

* * *

릉왕부 내, 릉왕이 음침한 표정으로 제명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제명, 본 왕한테 할 얘기가 없느냐?”

바닥에 꿇어앉은 제명의 안색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한참 침묵하던 제명이 힘껏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네가 셋째 황자의 명을 받고 본 왕에게 접근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꽤 많은 소식을 진왕한테 전했겠지?”

“소인의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왕야를 주인으로 모시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딴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흥.”

릉왕이 손에 든 서신을 제명한테 던지며 말했다.

“끝까지 잡아떼는구나. 본 왕한테 충성을 다한다면서 습보헌의 자산을 몰래 셋째 황자한테 넘겨? 제명, 본 왕이 너를 서운하게 대하진 않았거늘, 왜 배신한 것이냐?”

제명은 서신은 보지도 않은 채 릉왕을 향해 쿵 소리가 나도록 큰절을 올렸다.

“왕야,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셋째 황자께서 가족의 목숨을 가지고 위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명을 따라야 했습니다. 은자를 넘긴 것 외에 왕야와 관련된 소식은 일절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하나 릉왕의 눈빛은 여전히 냉랭했다.

“제명, 본왕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배신이다. 정말 실망스럽구나.”

“주인님.”

제명이 절망한 표정으로 연신 사죄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단지 가족을 구하고 싶었을 뿐, 주인님께 해를 끼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셋째 황자께선 제가 시킨 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 아내를 죽였습니다. 한 번만 더 명령을 어기면 제 아이도 죽이겠다 협박하는 바람에 습보헌의 은자를 건네주는 것으로 시간을 벌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제명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했다. 눈빛에는 고통과 후회가 가득했다.

릉왕은 예리한 눈빛으로 제명을 살폈다. 한참 뒤, 그가 조금은 차분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진왕의 잔인함은 자네가 훨씬 더 잘 알 테지. 설사 시킨 대로 다 하더라도 가족을 가만두진 않을 거다.”

“예…….”

“본 왕을 향한 충성심을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이번에 잘 해낸다면 자네 아이의 목숨을 지켜 주마.”

고개를 번쩍 든 제명의 두 눈에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왕야! 이 은정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잠깐.”

릉왕이 말을 이어 갔다.

“그 전에 조건이 하나 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앞으로 셋째 황자를 완전히 꺾을 수 있도록 본 왕을 도와야 할 것이다.”

“예. 주인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복수할 생각에 제명의 두 눈에서도 빛이 났다.

“소인의 마음속에는 온통 셋째 황자에 대한 증오뿐입니다.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좋다. 셋째 황자가 자식의 목숨을 대가로 본 왕의 소식을 캐물었다고 했지? 그럼 진왕한테 가서 본 왕이 너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사정하거라.”

제명이 잠시 머뭇거렸다.

“주인님. 셋째 황자께선 절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과연 다시 곁에 두려고 할까요?”

“지금 그의 곁엔 아무도 남지 않아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그자는 습보헌이 필요하고 네가 필요한 처지다. 물론,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예, 주인님.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릉왕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거라.”

“예.”

제명이 떠나자, 이경주가 병풍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릉왕의 표정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아직도 제명이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제명이 그 누구보다도 본 왕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이렇게 버려야 하다니 참으로 아쉽군요. 무엇보다 그 눈먼 장님한테 내줘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습니다.”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같이 한시가 급한 상황에, 제명 저자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없으니 차라리 내던지는 게 상책이지요. 혹여 저자가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그때 다시 곁으로 들여도 되는 법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행히 전에 사람을 시켜 강남에 있는 제명의 가족들을 감시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 이번 일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요. 영군진은 이 지경이 돼서까지 가족의 생사를 가지고 위협하는 비열한 짓을 벌이고 있네요.”

“오히려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게 더 셋째 황자다운 겁니다. 진비가 지금은 비록 금족령이 내려졌지만, 폐하께서 셋째 황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커지면 다시 풀려날지도 모릅니다.”

“흥. 장공주와 유왕만 제대로 끌어내렸더라면, 진왕도 절대 지금처럼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

한편, 심복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진왕은 냉소를 지었다.

“습보헌의 주인 제명이 큰형님 사람이었다니……. 한데 이제 와서 나한테 붙으려 한다고? 누굴 바보로 아는 것이냐?”

“전하, 지금 바로 쫓아낼까요?”

“아니다.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두거라.”

이내 안으로 들어선 제명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꿇어앉았다.

“셋째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서거라.”

영군진은 일부러 눈에 붕대를 감아 놓은 상태였다. 자신의 시력이 회복된 사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보다시피 본 왕은 앞이 안 보일뿐더러 두 발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큰형님 곁이 여기보다 백배는 나을 텐데, 어찌 나를 찾아온 것이냐?”

“전하, 부디 궁지에 빠진 소인을 받아 주십시오.”

제명이 한껏 겁먹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소인은 줄곧 이씨 가문과 릉왕 전하를 도와 습보헌을 경영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왕야의 눈 밖에 났을 뿐만 아니라 의심까지 받은 상황입니다. 왕야께서 제 아내까지 죽여, 하나뿐인 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왔습니다.”

“일을 그르쳐? 무슨 일?”

진왕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제명을 훑어보았다.

“그게……. 전에 임강성에 있을 때 릉왕 전하께서 저에게 세금 운송 선박을 가로채라고 시켰는데 실패했습니다. 왕야께서 그 뒤로 저에게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진왕이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입가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돌아가거라. 이미 폐인이 된 마당에 더 이상 큰형님과 겨룰 힘조차 없다.”

제명이 처량한 표정으로 연신 큰절을 올리며 애걸했다.

“진왕 전하. 제가 진왕부 문을 나서는 순간, 바로 살해당할지도 모릅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소인을 살려 주십시오. 소인은 단지 살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그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이냐?”

“소인이 나름 큰 비밀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제 아이를 구해 주신다면, 기꺼이 이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가 알고 있다는 비밀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도리가 없지 않느냐?”

제명의 진지한 모습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예전이라면 이렇게까지 의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볼품없는 빈털터리가 된 데다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린 지금, 하필 자신한테 빌붙으려 하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명은 속이 타는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소인도 사실 여부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일단 말씀드릴 테니 판단은 전하께서 해 주시지요. 이씨 가문이 북강과 몰래 왕래하고 있고, 심지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고 합니다.”

말을 마친 제명은 고개 숙인 채 숨을 죽였다.

순간 찻잔을 들고 있던 진왕의 손이 흔들리더니, 쏟아져 나온 찻물이 옷을 흠뻑 적셨다.

진왕이 다급히 물었다.

“지금 이씨 가문과 북강이라 했느냐?”

“예.”

붕대 뒤로 가려진 진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본 왕보다는 유왕한테 이 소식을 알리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은 안 했느냐?”

“실은…… 유왕부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릉왕 전하의 사람들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지요. 두 분께서는 지금 원수보다 더한 사이라, 소인이 도무지 유왕 전하에게 접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명의 대답에 진왕의 의심도 다소 사라졌다.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일단 머물 곳을 마련해 줄 테니 가 보거라.”

제명이 크게 기뻐하다 곧바로 걱정스레 말했다.

“전하, 소인의 아이는…….”

“걱정 마라. 빠른 시일 내에 구해 와서 다른 곳에 맡길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제명이 나간 뒤, 심복이 입을 열었다.

“전하. 정말 저자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