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뜻밖의 재력
역사에 도착한 유왕은 내부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북강에서는 총 열여섯 명의 사신을 파견했고, 그중 총책임자는 주사(主使) 도걸(图杰)이었다.
“많기도 하군. 도 사절은 어디 계시냐?”
역사 관리가 냉큼 아뢰었다.
“유왕 전하, 저기 중간에 앉아 계신 분이 주사 도걸 대인이십니다.”
유왕이 곧바로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도 사절이시군요.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도걸이 냉랭한 표정으로 일어서며 말했다.
“우리 북강에서 호의를 가지고 폐하를 뵙고자 찾아왔는데, 어찌 궁으로 안내하지 않는 건가요?”
“대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서운합니다. 단지 여러분께 며칠간 정비할 시간을 드리려는 호의였는데 말이죠.”
“우리 북강 남아들은 일곱 날 일곱 밤을 꼬박 새더라도 적들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건강합니다. 고작 먼 길을 달려왔다고 쉬어 갈 필요가 전혀 없지요.”
도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하하. 듣기론 대력조 문인들은 닭 잡을 힘도 없다던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긴다더군.”
“내 말이, 아마 내 주먹 한 방이면 쓰러질걸?”
수군대는 소리가 빠짐없이 유왕의 귀에 들려왔다.
도걸은 입꼬리를 올리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유왕 전하, 하루 빨리 폐하를 뵙게 해 주십시오.”
유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여러분께서 굳이 휴식을 마다한다면 바로 준비해 주시지요.”
“준비? 무슨 준비 말이죠? 저흰 언제든지 입궁하면 됩니다.”
그에 유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대력조에 오셨으니 지킬 건 지키셔야지요. 부황께서는 대력조의 군주이시며,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입니다. 그러니 뵙기 전에 미리 예의범절을 익혀야 할 뿐만 아니라, 몸을 깨끗이 하고 의복도 갈아입어야 합니다. 어길 경우 그에 따른 처벌을 받을 수도 있지요.”
누군가가 불평을 드러냈다.
“우린 북강 사신인데 왜 대력조의 법규를 지켜야 한단 말인가?”
유왕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우리 대력조의 군주를 뵙길 원치 않으시면 편한 대로 하셔도 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력조의 법규를 지키는 것이 좋을 겁니다.”
화가 잔뜩 난 도걸이 반박하려는 순간,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곧바로 화를 억눌렀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바로 예부 사람들을 보낼 테니, 그들의 말대로 하시면 됩니다.”
* * *
궁으로 돌아온 유왕은 한껏 신이 난 표정으로 월왕을 찾아갔다.
월왕은 한창 재산 목록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곧 있을 혼례 때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예물을 보내고 싶었다.
“아우, 예부 전수정(田守正)을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
“전 시랑(侍郎)께선 연세가 지극하셔서 버텨 내지 못할 겁니다.”
전수정은 고리타분할 정도로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몇 해 전, 혼사가 정해진 그의 여식이 나들이 때 마차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당시 길 가던 농부가 도와주려고 그녀의 팔을 잡았을 뿐인데, 전수정은 기어코 혼사를 무르고 그 농부한테 딸을 시집보냈다.
이 일로 서릉 전체가 한동안 떠들썩했다. 시집간 딸은 자살 시도까지 했으며, 전수정의 아내는 상심이 큰 나머지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간 후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그자더러 북강 사신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게 하면 적어도 한 명은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하나 월왕의 만류에도 유왕은 끄덕없었다.
“태의들과 같이 보내면 된다. 명성을 중요시하는 전 시랑이라면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혹 이번에 온 사절단에 대해 알아봤느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내가 오늘 일부러 주사 도걸의 심기를 건드려 봤는데, 화를 내기 일보 직전에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를 듣더니 곧바로 자제하더구나.”
월왕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건 제가 알아볼 테니 형님께서는 조정에 집중해 주십시오. 큰형님께서 이번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긴 했으나, 아무래도 그의 편인 대신들의 수가 적지 않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유왕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우는…… 정말 이대로 포기할 건가?”
“형님, 제 뜻은 여기에 없습니다. 천하를 가슴에 품은 형님과 달리, 저는 오로지 운요 한 사람만 품고 있습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 형님을 밀어드릴 테니, 나중에 황위에 오르게 되시면 그때 저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십시오.”
“어차피 자네는 황자이니 어딜 가든 기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요아가 군주인 데다 장공주 전하의 유일한 외손녀라 저보다 더 기세등등한걸요.”
“자네는 봉지(封地)도 있고 예부를 다스리고 있지 않은가.”
“요아는 하운방과 불선루를 소유하고 있지요. 게다가 고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산업과 부황께서 상으로 내리신 토지까지……. 형님, 하운방과 불선루 두 곳이 한 해에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시죠?”
그에 유왕은 거침없이 추측해 보았다.
“두 군데 모두 규모가 크다 보니, 한 해에 최소 몇십…… 아니, 몇백만 냥은 벌어들이겠지?”
찻잎 장사는 이윤이 많이 남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선루 같은 경우 한정된 인원에게만 판매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그만큼 수익이 적을 것이다. 게다가 목운요가 수시로 기부를 하는 터라 오히려 적자일지도 모른다.
월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형님, 운요가 매년 벌어들이는 순이익만 은자 천만 냥이 넘습니다.”
유왕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우, 거짓말이지?”
천만 냥이라니! 그건 대력조 한 해 조세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고작 자수와 찻잎 장사로 그렇게나 많이 벌다니?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하운방이 겉으로 봤을 땐 의상만 판매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외에도 방직, 원단, 자수 실 등 광범위하게 뻗어 나가 있지요. 불선루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손님 접대는 수입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 찻잎 장사가 주요 수입원입니다. 게다가 두 군데 모두 점포가 널리 펴져 있어서 선박, 육상 운수 등과도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으니…….”
유왕은 듣고 있는데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만, 그만. 더 말했다간 당장이라도 하운방과 불선루를 빼앗고 싶을지도 몰라.”
월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이래도 제가 기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왕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 대장부는 자고로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요아가 잘 버는 건 좋은 일이지…….”
그때, 우항이 들어와 알렸다.
“왕야, 목 소저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이거라.”
안으로 들어선 목운요가 인사를 올리는 동안, 유왕은 줄곧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던 목운요는 월왕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월왕이 부자연스러운 기침 소리로 유왕에게 신호를 보냈다.
유왕도 자제하고 싶었으나, 오늘따라 목운요의 뒤에서 반짝반짝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제수씨…….”
목운요가 멈칫하다가 웃으며 물었다.
“아주버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목운요는 월왕 앞에서만 쑥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제 곧 월왕과 혼사를 치르니, 아주버님이라는 호칭도 서슴지 않았다.
유왕이 바로 답했다.
“방금 아우랑 네 얘기를 했단다. 넷째 아우가 평소에 과묵하여 걱정이었는데, 역시 운요 네가 그의 남다른 점을 알아봐 줬구나. 혹시라도 나중에 아우가 너를 울리거나 괴롭힌다면 언제든지 나한테 이르거라. 이 아주버님이 제대로 혼내 주마.”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중에 목운요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넷째 아우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목운요는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주버님. 월왕 전하와 잘 살게요.”
유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난 북강 사신들과 볼일이 있으니 이만 가 보마.”
“네.”
유왕이 떠나자, 목운요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월왕을 바라보았다.
“대체 유왕 전하와 무슨 얘기를 나누신 거예요?”
“형님께서 대장부로서 기를 펴고 살아야 한다고 하시더구나…….”
“기를 편다고요?”
“그래. 하지만 난 형님과 생각이 다르단다. 앞으로 모든 일은 네 결정에 맡길 것이다.”
목운요가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안 되지요. 부군이야말로 집안의 기둥이니 모두 전하의 뜻을 따라야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월왕이 목운요를 와락 끌어당겼다.
“그럼 어디 부인과 입맞춤이라도 해 볼까나?”
목운요가 냉큼 그의 볼을 힘껏 눌렀다.
“정말 못 말리는 부군이네요.”
월왕은 목운요를 품에 안은 채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요아, 사실 둘째 형님께 하운방과 불선루에 대해 알려 줬다.”
“잘하셨어요. 유왕 전하께서도 언젠가는 알 텐데, 조사해서 알게 되는 것보다 먼저 알려 드리는 게 피차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신경을 써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법이다. 서로의 배려가 없다면 아무리 진한 혈육 사이라 해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그보다 북강 사신들이 한동안은 예의범절을 익히느라 골치 아프게 될 것이다. 그동안 그림자 호위더러 사신들의 신분을 알아보게 하는 건 어떨까? 형님께서 아무래도 그들의 신분이 의심스럽다고 하시더구나.”
“네, 저한테 맡기세요. 셋째 황자 쪽은 잠잠한가요?”
“대신들을 꾀어내려 애를 쓰고 있긴 하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직 두 눈이 회복됐다는 소식을 퍼뜨리지 않았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