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63화 (363/442)

363화 부탁하는 자세

“이 귀비가?”

목운요는 의아해했다.

“폐하께서 외출을 금하셨을 텐데?”

“이 귀비가 폐하께 찾아가, 소저께 자신의 병을 맡기고 싶다고 청했다 합니다. 마침 대신들이 모두 계셨고, 릉왕과 이 승상이 함께 사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금족령을 풀어 줬다네요.”

목운요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선령이 먼저 냉소를 지었다.

“흥. 연회에서 너를 모함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도움을 청하려고 하다니. 이렇게 낯 두꺼운 사람은 처음 보네. 운요, 이런 사람은 도와줘 봤자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니 모른 척하는 게 상책이야.”

목운요가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래도 옥화궁까지 왔으니 만나는 봐야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

선령이 놀라서 물었다.

“정말 이 귀비를 치료해 주려는 건 아니지?”

“혹시 전에 이씨 가문의 자식들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던 일 기억해? 지금이 바로 직접 이 귀비를 진맥할 수 있는 기회잖아. 과연 이 귀비가 어떻게 이경주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하지 않아?”

선령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진맥해 볼게.”

치료해 주는 일이 큰 대수는 아니었다. 정 안 되면 진왕처럼 치료한 다음 다시 반쯤 죽을 지경으로 만들면 되니까.

“그래.”

* * *

옥화궁 내, 이 귀비가 두꺼운 너울을 쓴 채 바닥에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장공주 전하, 신첩을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장공주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 귀비, 난 의술에 까막눈이라 어찌 도울 방법이 없다.”

이 귀비는 쭈뼛쭈뼛 장공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장공주 전하, 실은 온한 군주께 도움을 청하고자…….”

“그럼 운요한테 가서 사정하는 게 맞지. 내 아무리 외할머니지만 결정은 운요가 직접 해야 하는 거니까.”

장공주의 표정이 점점 더 냉랭해졌다. 부탁하러 온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이 귀비가 눈에 거슬렸다.

이 귀비도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겨우 억누르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곡 마마가 들어와 알렸다.

“전하, 군주께서 오셨습니다.”

장공주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어서 들이거라.”

“운요, 외할머니를 뵙습니다. 이 귀비 마마께서도 계셨군요. 인사 올립니다.”

무릎을 반쯤 굽히며 인사 올리는 목운요를 보고, 이 귀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목운요가 일부러 자신의 우스운 꼴을 보려고 지금 나타난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도움을 청하러 온 이상, 어쩔 수 없이 웃는 얼굴을 보여야 했다.

“운요, 예를 거두거라.”

장공주가 목운요를 곁으로 부르며 상냥한 투로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목운요는 장공주의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며칠 동안 밖으로 도느라 외할머니와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했잖아요. 그리고 눈이 내린 걸 보니 외할머니께서 설수로 우린 장미꽃 차를 좋아하신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차를 우려 드리려고요.”

장공주는 몇 개월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 준 외손녀가 기특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리 효심 깊은 외손녀에게 예쁜 장신구를 선물해 줘야겠구나. 나에게 오랫동안 간직한 보물들이 많이 있으니, 잘 골라내는 건 너한테 달렸다.”

“그럼 눈 크게 뜨고 잘 골라 볼게요.”

두 사람은 이 귀비를 없는 사람 취급하듯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 귀비는 대화가 잠깐 멈춘 사이를 틈타 겨우 입을 열었다.

“온한 군주, 실은 군주께 도움을 청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다네.”

목운요는 시선을 이 귀비한테로 향하며 웃음을 거두었다.

“우둔한 제가 귀비 마마께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요?”

목운요의 차가운 표정을 보자, 이 귀비는 얼마 전 연회에서 자신이 목운요를 모함했던 것이 떠올랐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두 사람에 대한 원망이 더욱 커져만 갔다.

목운요는 그런 이 귀비의 속내를 꿰뚫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한참 뒤에야 이 귀비가 입을 열었다.

“운요. 얼마 전에 뭘 잘못 먹었는지 얼굴에 열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나을 기미가 없이 점점 더 심해져만 가는구나. 네 의술이 태의들보다 한 수 위라 들어서, 이렇게 네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단다.”

목운요는 이 귀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비록 너울을 쓰고 있어 이마와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얼굴이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작은 두드러기가 빼곡히 나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해지게 했다.

“제 하찮은 의술로는 귀비 마마께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목운요의 말에 이 귀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운요. 전에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 의술을 의심했는데, 온전히 폐하의 옥체가 걱정되는 마음에서 그런 거지, 절대 너한테 앙심을 품은 게 아니란다. 태의들이 입을 모아 네 의술을 칭찬하는 걸 듣고 진심으로 탄복해서 이렇게 찾아왔으니, 내가 손윗사람인 걸 봐서라도 선심을 베풀어 주었으면 하는구나.”

목운요의 거절이 두려운 나머지 이 귀비는 항렬 얘기까지 꺼냈다.

그에 옆에서 듣고 있던 장공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씨. 자네가 제멋대로 구는 건 익히 알았지만, 권세로 상대를 억누르기까지 할 줄은 몰랐네. 손윗사람이니 운요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네의 병을 치료해 줘야 한다고 협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손윗사람으로서 자네한테 아무 일이나 시켜도 되겠군.”

이 귀비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연신 사죄했다.

“신첩이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간 고통에 시달려 초조한 마음에 언행이 경솔했습니다.”

그녀의 변명에도 장공주의 화가 풀리지 않자, 이 귀비가 목운요를 향해 몸을 숙였다.

“운요, 방금 한 말은 실수였다…….”

“귀비 마마,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도와드리는 건 문제없지만, 제 의술이 깊지 않아 완치될지는 미지수입니다. 대신 의술과 독술에 아주 능한 선령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전에 역병 처방전도 이 친구한테서 얻었죠. 괜찮으시다면 이 친구한테 도움을 청해 보도록 하지요.”

“운요, 고맙구나.”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목운요가 도와주겠다고 하니 잘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운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편전으로 선령을 부를게요. 정확한 진단을 위해 일단은 깨끗이 세안을 해 주셔야 해요.”

“그래, 바로 다녀오마.”

이 귀비가 떠나자 목운요가 장공주를 바라보았다.

“이 귀비를 붙잡아 주셔서 감사해요.”

“네가 전에 이 귀비가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를 조사하겠다고 한 것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었으면 절대 저자를 옥화궁에 들이지 않았을 거다.”

목운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는 편전으로 가 볼게요.”

“그래.”

목운요는 선령과 함께 편전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돌아가며 이 귀비를 진맥한 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맥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이경주의 아들들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듯싶었다.

목운요가 진맥 후에 한동안 말이 없자, 이 귀비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운요, 대체 왜 이런 병이 생긴 것이냐?”

“이는 미인 파상(破相)이란 독인데, 북강에서만 나는 화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목운요는 말을 마친 뒤 이 귀비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이 귀비의 얼굴엔 온통 걱정만이 가득했다. 이 귀비가 이씨 가문과 북강의 일을 모르고 있거나, 그녀의 연기력이 뛰어나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럼 해독할 방법은 있는 것이냐?”

“이 독을 해독하기란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미인 파상이란 독을 만드는 화초는 워낙 신기해 꽃에 독이 있는 반면, 가지와 잎은 해독제 역할을 합니다. 다만 반드시 독을 추출했던 꽃의 가지와 잎이어야만 해요. 그래서 해독이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겁니다.”

대답을 들은 이 귀비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게…… 정말이니?”

“아무래도 생소한 독이라 태의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귀비 마마께서 다시 여쭤보시면 태의들도 답을 주실 겁니다.”

이 귀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목운요를 쳐다보았다. 그 많은 태의들이 눈치채지 못한 걸 목운요가 한눈에 알아차리다니, 설마 그녀가 독을 탄 건 아닐까?

이 귀비의 생각을 눈치챈 목운요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귀비 마마. 해독하고 싶으시면 독을 쓴 사람을 찾으셔야 합니다. 혹시나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목운요의 말에 이 귀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독을 쓴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진작에 잡아다가 해독제를 내놓으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운요. 정말 다른 해독법은 없는 것이냐?”

목운요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답했다.

“없습니다.”

입술을 꽉 깨문 이 귀비의 두 눈이 생기를 잃어 갔다.

“알겠다. 두 사람에게 신세를 많이 졌으니 조만간 사례하도록 하마.”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마.”

이 귀비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자리를 뜨자, 선령이 목운요를 보았다.

“일부러 이 귀비 앞에서 북강 이야기를 꺼내며 거짓말을 한 거지?”

“난 아는 대로 말했을 뿐이야.”

“귀신을 속여. 미인 파상이니 뭐니, 내가 난생처음 들어 본 독이거든? 꽃에 독이 있고 가지와 잎은 해독제라니, 이 세상에 그런 신기한 약초가 있다고? 어디 나한테도 구경 좀 시켜 주시지?”

선령은 그러면서 목운요를 간지럼 태우려고 달려들었다. 그에 목운요가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사실대로 말해 주면 되잖아. 네 말대로 이 귀비의 반응을 보려고 북강 이야기를 했던 게 맞아.”

“대체 왜? 설마 이씨 가문이 북강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어?”

“이씨 가문과 북강 왕족 사이에 암거래가 있어.”

선령은 깜짝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명백히 매국 행위인데?”

“아직 확실치는 않아서 조금 더 알아봐야 해. 방금 북강 얘기를 꺼낸 것도 이 귀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피기 위해서였어. 오랫동안 이씨 가문은 릉왕의 세력을 키우는 데 몰두했고, 이 귀비는 후궁 업무를 도맡으며 그 세력이 내무사에까지 침투해 있지. 정녕 반역을 꾀하는 거라면 상황이 불리한 게 사실이야.”

선령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귀비가 분명 태의들을 불러다 물을 테니, 내가 그 전에 미리 안면 있는 태의 몇 명에게 독에 대해 말해 둘게. 들통날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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