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크게 당한 이 귀비
“네가 소우구나?”
보라색 상의에 어두운 꽃무늬 주름치마를 입은 선령은 어느 때보다도 단정하고 우아해 보였다. 반면 손으로 소우의 볼을 꼬집으며 웃고 있는 그 모습은 옷차림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깜짝 놀란 소우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재미가 들린 선령은 손끝으로 소우의 이마를 콕 찔렀다.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라는 소우의 모습에 선령이 장난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재미있어. 운요, 어서 소개시켜 주지 않고 뭐 해.”
목운요가 소우를 곁으로 데려오며 선령을 힘껏 노려보았다.
“소우는 몸이 안 좋아서 소부에서만 지내다 보니 사람들을 많이 접한 적이 없어. 그러니 함부로 놀라게 하면 안 돼. 소우, 여기가 방금 말한 새로운 친구 선령이에요. 의술이 뛰어나고 좀 엉뚱하긴 하지만, 악의는 전혀 없으니 걱정 말아요.”
소우가 신기해하면서도 부러운 눈으로 선령을 훑어보았다.
“선령 언니께 인사 올려요. 성격이 좋아 보여서 부러워요.”
선령은 바로 소우의 손을 잡고 두 손가락으로 맥을 짚기 시작했다.
“체내의 독소가 다 빠져나가긴 했지만, 각별히 요양에 신경 써야 해. 나중에 이 언니가 귀한 환약을 선물해 줄 테니, 제때 잘 먹는다면 조만간 다시 건강해질 거야.”
“운요가 준 처방으로 벌써 많이 좋아졌어요.”
“내 의술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 운요 말고 날 믿어.”
소우가 보조개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머지, 선령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보조개를 콕콕 찔러 보았다.
소우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실례가 될까 봐 피하지 않았다.
“선령 언니와 운요 두 사람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아요.”
선령이 소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아유, 착해라.”
“보는 눈이 많은 자리니까, 뒷말 안 듣게 신중하게 행동해.”
보다 못한 목운요가 한마디 했다.
“예, 예. 또 나왔네, 잔소리꾼.”
다행히 선령과 소우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졌다.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난 외할머니께 가 볼게.”
“볼일 봐. 소우는 내가 잘 챙겨 줄 테니 걱정 말고.”
목운요가 자리를 뜨자, 두 사람 모두 말을 멈춘 채 경계의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인내심이 부족한 소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진정으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운요뿐이니 오해하지 마. 방금은 운요가 난처해할까 봐 그런 거니까.”
선령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소씨 가문이 운요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나도 다 알아. 물론 몇몇 사람은 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방심하긴 이르지.”
소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선령이 자신한테 악의를 품은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목운요와 더 가까운 사이인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의술과 독술에 능통하다면서? 운요를 잘 챙겨 주기나 해. 혹시라도 다른 목적이 있는 거라면, 소씨 가문이 길바닥에 나앉더라도 복수할 테니까.”
서로 한참을 노려보던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방금 한 말, 운요한테는 비밀이야.”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목운요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금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네요. 소저께서는 걱정 안 되셨어요?”
“소우가 순진해 보여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은 후로는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죠. 선령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쉽게 누군가를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는 두 사람이 나를 위해 거짓 연기까지 하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런데도 두 사람만 따로 있게 두신 거예요?”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외로운 법이죠. 저 두 사람 모두 내 친구인 만큼, 마찬가지로 서로 친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제법 잘 어울리지 않나요?”
목운요가 돌아오자 소우와 선령은 다시 친한 친구처럼 행동했다. 목운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함께 맞장구를 쳤다.
많은 것을 겪은 만큼, 두 사람 모두 의외로 단순한 면이 있었다. 시간을 가지고 서로를 알아 가면 둘도 없는 사이가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 * *
연회가 끝난 뒤.
한 번도 연회를 연 적이 없던 장공주의 갑작스러운 행보에, 후궁 비빈들은 장공주가 이씨 가문을 제대로 상대하려 함을 눈치챘다. 그에 이때다 싶어 너도나도 이 귀비에게 손을 쓰기 시작했다.
하나 충성심 깊은 궁녀들 덕분에, 이 귀비는 많은 화를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러다 닷새 뒤, 궁내에 일이 터졌다.
이 귀비가 뭘 잘못 먹어 두드러기가 난 것이다.
하필 번진 곳이 얼굴이라, 그녀는 곧바로 태의를 불러들였다.
한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제 귀비가 쓰러지는 바람에, 모든 태의가 그리로 불려 갔고, 겨우 남은 태의 한 명을 데려올 수 있었지만 이 귀비의 희한한 증상에 손쓸 방법이 없어 소독 처방만 받을 수 있었다.
참다못한 이 귀비는 큰 소동을 벌였고, 결국 이는 황제한테까지 알려졌다.
제 귀비는 후궁 관리에 이 귀비의 잦은 시비까지 겹쳐 숙환이 재발해 쓰러진 것이었다. 제 귀비가 안쓰러웠던 황제는 이 귀비가 소동을 벌인다는 소식에 노기등등한 채 유리궁으로 향했다.
황제가 왔다는 소식에 이 귀비는 버선발로 마중 나갔다.
평소였더라면 궁녀들이 잊지 않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도록 제안했을 것이다. 지금의 혐오스러운 얼굴로는 동정심은커녕 오히려 반감을 살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이었던 탓에 이 귀비를 말릴 새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시뻘건 데다 핏발까지 선 모습의 이 귀비를 보고 황제는 어지간히 놀랐다.
“어찌 이 지경이 된 것이냐?”
이 귀비는 곧바로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폐하, 누군가가 신첩을 모해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첩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폐하.”
“모해라니? 태의는 뭐라고 하더냐?”
“태의가 처방한 약을 먹었더니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첩도 이런 희한한 증상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태의들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짐이 태의들을 전부 제 귀비에게 보냈다고 원망하는 것이냐?”
“절대 아닙니다. 다만, 제 귀비에게 그렇게 많은 태의가 필요할까 싶어서…….”
병석에 누워 있는 제 귀비를 떠올리자 황제는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제 귀비가 쓰러지기까지 한 마당에 자네는 오히려 원망이나 늘어놓고 있다니,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짐이 의술이 뛰어난 태의를 부를 테니 기다리거라. 다만 지금 모습으로 밖에 돌아다니기엔 적절하지 않으니, 병이 다 나을 때까지 유리궁에서 요양하도록 해라.”
* * *
그 시각, 장공주와 바둑을 두던 목운요는 소식을 듣고 그만 수를 잘못 둬 버렸다. 물러야 하나 고민하는데 다행히 그리 나쁜 수는 아니었다.
장공주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은 실수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는 법이란다.”
장공주라면 이 귀비를 무너뜨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이 귀비를 상대하기 위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배후에서 힘을 조금만 보태 줘도 알아서 나서 주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목운요가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외할머니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할게요.”
“요아는 워낙 총명해서 이 외할미가 가르칠 게 없다. 다만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지. 그런데 이 바둑판과 같이, 기회란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란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결국 완패할 수도 있지. 요아, 앞으로 좀 더 대범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목운요도 자신의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의 기억에 얽매이다 보니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그때와 달라졌다. 자신도 바뀔 필요가 있었다.
“곡 마마, 제 귀비 쪽 상황은 어떤가?”
“이 귀비가 유리궁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제 귀비께서 무척이나 좋아하셨답니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돼 다시 후궁 업무를 시작하셨지만, 여전히 완쾌한 건 아니다 보니, 폐하께서 며칠 더 요양하기를 권하셨다 합니다.”
“위국후 가문은 대대로 용맹한 무장을 배출하건만, 어쩌다 제 귀비같이 영리한 여인이 나왔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목운요가 문득 의문을 표했다.
“외할머니, 제 귀비와 이 귀비는 같은 해에 입궁하여 귀비 호칭도 같은 해에 받았다고 들었어요. 한데 제 귀비께선 왜 이 귀비에 비해 크게 눈에 띄지 않았던 건가요?”
장공주가 웃으며 답했다.
“제 귀비는 위국후 집안의 유일한 딸이다. 어렸을 때부터 심성이 투명하고 교양이 넘쳤지. 게다가 연약한 겉모습과 달리 무예를 좋아해서 사내 네다섯 명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란다. 심지어 황상을 해치려던 자객을 직접 물리치기까지 한 적이 있어, 황상께서도 마음속에 늘 고마움을 간직하고 계시지.”
“그 정도로 뛰어나신 분이라면 더욱이 눈에 띄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육대세가의 세력이 막강해졌을 때, 황상과 위국후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 때문에 황상께선 제 귀비를 비빈으로 들이셨지. 그런데 당시 제 귀비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그로 인해 제 귀비의 가슴속엔 늘 응어리가 맺혀 있었고, 후궁에서도 겉도는 생활을 하다 보니, 황상께서도 그 마음을 헤아려 조용히 지내게 해 준 것이란다.”
목운요는 그제야 영문을 깨달았다.
“그렇군요. 그럼 제 귀비께서 지금은 다 내려놓으신 건가요?”
“내려놓지 못할지언정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지금은 오로지 유왕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목운요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장공주의 어깨를 주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