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빈틈
목운요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러다 문득 선령 옆에 놓인 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또 뭘 연구 중이야?”
“아- 그건 쓰다 남은 가임초인데, 필요하면 가져가서 써. 누굴 골탕 먹이기에 딱 좋은 약이지. 물론 예뻐질 수도 있어.”
“더 예뻐지긴 하겠지만, 임신과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끔찍해.”
체내에 노폐물과 어혈을 모아 뒀다가 아홉 달 뒤에 한꺼번에 배출하는 그 고통을 참아 낼 자신이 없었다.
“듣기론 북강 귀족 여인들은 가임초를 굉장히 애용한대. 얻기 힘든 귀한 거라 보통 사람들은 오매불망하기도 하고.”
“잠깐.”
목운요가 가임초 가루가 든 약병을 힘껏 쥐었다.
“그러니까, 이 약초가 북강에서도 흔치 않아 귀족 여인들만 쓴다는 거지?”
“무슨 일인데?”
“이 귀비가 어떻게 가임초를 가지고 있었을지 늘 궁금했거든.”
당시엔 이씨 가문이라면 가임초 정도야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씨 가문과 북강 왕족이 심상치 않은 사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선령이 목운요의 찻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혹시 이걸로 이씨 가문을 상대하려고?”
“아니, 이걸로는 부족하지. 좀 더 조사해야 해.”
“네가 부탁한 대로 사람을 시켜 이경주의 아들들에 대해 알아보고 있어.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듯해.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게 알아보려면 굉장히 조심할 수밖에 없어.”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건 아니니 천천히 해도 돼. 그보다 폐하께서는 이 귀비에게 어떤 처분을 내리셨대?”
“글쎄. 아직 궁녀를 심문하는 중이고 또 장공주 전하도 함께하시니, 절대로 쉽게 넘어가진 않겠지.”
이 귀비에 대한 처분이 아직 내려지기 전이라는 말에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내일 다시 올게.”
“네가 월왕한테 만들어 줬던 찐빵이 먹고 싶어.”
선령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지난번에 많이 줬는데 벌써 다 먹은 거야?”
“턱도 없이 부족하지. 그땐 강아지 모양이었는데, 이번엔 여우 모양으로 해 주면 좋겠어.”
“좋아. 이따 답설이 데려올 테니 둘이 같이 간식을 먹으면 딱이겠네.”
눈여우를 데려온다는 말에 선령은 목운요를 노려보며 쫓아냈다.
“당장 나가!”
약점만 골라서 공격하다니, 언젠가는 반드시 담력을 키워 내리라…….
목운요가 웃으며 방에서 나왔다. 그래도 선령 덕분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이씨 가문과의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당황할수록 실수하기 마련이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침착하는 것이었다.
제명이 이씨 가문의 손에 들어감으로써 불리한 건 사실이지만, 분명 반격의 기회가 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 * *
저녁 즈음, 이 귀비에 대한 소식이 다시 전해졌다.
“소저, 이 귀비가 소우의한테 가임초를 먹였다는 사실을 폐하께서 알게 되셨지만, 이 귀비를 따르는 궁녀들이 죽을지언정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혐의가 이 귀비를 향하고 있긴 하나 확실한 죄명을 단정 짓기 어려워, 겨우 경서 열 권 베껴 쓰는 걸로 결론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목운요는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이 귀비라면 당연히 가족을 빌미로 궁녀들이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도록 미리 협박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경서 열 권을 베끼는 처벌은 너무 가볍다 생각합니다.”
목운요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궁 안의 여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요?”
금란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폐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
“네, 바로 그거예요. 폐하의 총애만이 후궁 여인들이 발을 붙일 수 있는 근본이죠. 그러나 이 귀비는 입궁할 때부터 남들보다 신분이 높아, 폐하의 큰 사랑을 받은 적은 없어도 다른 여인들보다 순탄한 나날을 보냈었죠. 그러다 보니 한 번도 누군가에 의해 처벌을 받아 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우연히 곡 마마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요. 이 귀비는 입궁하자마자 비빈으로 봉해지고, 황후 마마께서 변을 당하시는 바람에 후궁을 관리하는 자리가 비어 바로 귀비로 신분이 올랐다지요.”
“후궁이 서로 물어뜯는 곳이긴 하지만, 모두에게 다 그런 건 아니죠. 적어도 이 귀비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지금의 후궁은 자그마한 바람 소리에도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라, 이번 일로 이 귀비도 후궁의 저격을 받게 될 거예요. 과연 이 귀비가 얼마나 버틸까요?”
금란은 크게 깨달은 듯 감탄했다.
“아무리 궁녀들이 충성을 다해 보필한다 해도 빈틈을 보일 때가 있겠지요…….”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한번 풀리면 끝도 없는 실타래와 같아요. 빈틈을 노려 헐뜯기 바쁜 후궁에서 이 귀비를 노릴 이가 한둘이 아닐 거예요.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이 귀비는 곧 설 자리가 없어질 테죠.”
그날 이후, 금란과 금교는 후궁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이 귀비가 처분을 받은 뒤 많은 사람들이 문안을 핑계로 그녀를 떠보려 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장공주를 찾아가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연회에서 이씨 가문이 대놓고 장공주를 겨냥했으니, 혹여나 장공주도 이 귀비를 눈엣가시로 생각한다면 자신들의 사적인 복수를 하는 김에 장공주의 환심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공주도 그런 이들을 모른 체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날을 골라 꽃구경 연회를 열었다.
연회에는 황제도 초대되었다. 후궁의 여인들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하나같이 화려하게 치장해 꽃보다도 더 눈에 띄었다.
목운요는 장공주와 담소를 나누다 금 부인을 만나러 갔다.
금 부인은 목운요를 보자마자 기뻐하며 인사를 올리려 했다. 그 모습에 목운요가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
“의모님, 예를 거두세요.”
목운요의 한결같은 모습에 금 부인의 우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요아는 점점 더 예뻐지는구나. 전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었지만 한층 더 아름다워져서 감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과찬입니다, 의모님.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목운요가 무릎을 굽히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의부님과 질문 아우도 잘 지내시지요?”
“덕분에 잘 지낸다. 너를 무척이나 그리워한단다.”
“제가 너무 무심했네요. 조만간 찾아뵈어야겠어요.”
금 부인이 활짝 웃었다.
목운요의 출신이 밝혀진 뒤, 조운년과 함께 장공주를 뵈러 간 적이 있었다. 목운요가 군주 신분을 얻다 보니, 의부모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운요는 단호히 거절했고, 장공주도 그동안의 보살핌을 고맙게 생각한다며 의부모 관계를 인정했다.
그리고 지금, 금 부인과 조운년은 모든 이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금 부인과 담소를 나눈 목운요는 소씨 가문의 이부인 척 씨를 만나러 갔다가 소우와 조우했다. 목운요가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
소우는 불평 가득한 표정으로 목운요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목운요가 웃으며 물었다.
“소우, 혹시 저한테 화났어요?”
목운요가 여전히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자, 소우도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 보러 자주 오겠다고 해서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한 번도 온 적이 없잖아요. 결국 참지 못하고 장공주부에 서신을 보냈더니, 궁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쳇.”
목운요가 금란을 시켜 미리 준비한 간식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간식을 소우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오늘 올 줄 알고 직접 만든 거예요. 입맛에 맞아요?”
소우가 눈을 크게 떴다.
“날 위해 만들었다고?”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너무 달고 느끼한 건 몸에 안 좋다고 해서 일부러 덜 달게 만든걸요.”
소우는 냉큼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크기도 적당해 한입에 넣기 좋았다. 연거푸 세 개를 더 먹고 나서야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더 있으니까 입맛에 맞으면 이따 연회 끝날 때 금란에게 따로 챙기라고 할게요.”
“좋아요.”
차를 마시려고 보니 찻잔 안에 든 게 다름 아닌 최근 인기몰이 중인 화과차였다. 소우는 가슴 한편이 따뜻해져 왔다.
“운요, 실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줄 게 있어요.”
소우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무슨 일인가요?”
“소우의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 의하면 소부 마당에 노부인이 쓴 친필 서신이 있고, 거기에 월왕의 출신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면서요. 이를 증거로 진비가 장공주를 고발했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어머니와 내가 바로 사람을 시켜 마당을 샅샅이 뒤지다가 그 편지를 찾아냈죠. 당장 없애려 했는데, 아무래도 전달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소우가 목운요의 두 손을 맞잡았다. 마침 두 사람이 입은 옷의 소매가 길어, 서신을 몰래 주고받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날 연회가 끝난 뒤, 목운요도 사람을 시켜 서신을 수소문했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혹여나 소우의가 이미 가져간 게 아닐까 의심까지 했었는데, 소우가 찾아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목운요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소우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하지만 말투에는 여전히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그럼 이따 갈 때 남은 간식 다 싸 줘요.”
“네, 전부 드릴게요.”
목운요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순수하고 단순한 소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게 했다.
“참, 깜빡 잊을 뻔했네요. 최근에 새로운 친구 하나를 알게 됐는데, 엄청 좋은 사람이거든요. 한번 만나 볼래요?”
“새로운 친구? 하지만…… 나도 좋아해 줄까요?”
“당연하-”
목운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다가와 소우의 볼을 꼬집었다.
깜짝 놀라 돌아봤더니, 선령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