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57화 (357/442)

357화 그대를 만나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황상을 황위에 앉히며 나름 수중의 권리는 포기했다지만, 그 세력이 여전히 컸던 건 사실이다. 황상께선 영명하시니 당연히 눈치챘을 것이다.”

“전하께서 그 힘을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황후 위유의 일에 나도 책임이 있지.”

“황후 마마께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겁니다. 폐하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음에 그런 것이지, 장공주 전하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애써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 위유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나와 황상도 그리 쉽게 육대세가를 없앨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이 모든 걸 군월한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구나.”

곡 마마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로 인해 마음이 너무 힘드시다면, 월왕 전하께 털어놓는 건 어떨까요? 전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말하더라도 황상께서 직접 하셔야지, 내가 끼어들어선 안 되는 일이다.”

곡 마마가 고개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공주는 한참 뒤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서 쉬거라. 그 나이에 밤새면 큰일 날라.”

곡 마마가 작게 미소 지었다.

“소인, 한평생 전하의 곁을 지켜 왔습니다. 여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 부디 내쫓지 말아 주십시오.”

“그럼 침상이라도 가져다 놓거라.”

“네, 전하.”

* * *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한 목운요는 장공주의 안색이 나쁘지 않은 걸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외할머니, 제 솜씨 좀 맛보세요.”

“안 그래도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요아가 곧 어머니를 따라잡겠어.”

“앞으로도 자주 만들어 드릴게요.”

“그러라고 하고 싶지만, 욕심일 것 같구나. 곧 있으면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벌써 보내기 싫으니, 원.”

목운요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시집가도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월왕부로 모셔 와서 맛있는 거 해 드리면 되죠.”

“그럼 더할 나위 없이 좋지. 군월이 감당할 수 있겠지?”

목운요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벌면 되죠.”

장공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군월이 참으로 복 받았구나.”

아침 식사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사람들은 일부러 어젯밤 연회에서 일어난 일은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 * *

그 시각 조정.

릉왕은 멍하니 서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황, 정녕…… 둘째 아우를 태자로 세우실 건가요?”

황제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격이 차분하고 일 처리도 완벽한 군유야말로 황태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소자, 반대하옵니다!”

릉왕의 반대 발언에, 관원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황태자를 세우는 일이 국가 대사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태도로 보아 어느 정도 확신이 든 듯하였다. 지난밤 소란이 벌어지자마자 오늘 급하게 황태자를 세우려고 하니,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런 방법으로 이씨 가문과 릉왕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려는 건 아닐까? 아니면 진심으로 유왕을 높이 사서 후계자로 세우려는 것일까?

화가 나 눈이 시뻘게진 릉왕이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부황. 황태자는 자고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맡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우는 용맹하고 전투에 능하지만, 결국 전장에서만 그 능력이 빛을 발할 뿐입니다. 훌륭한 장수가 될 순 있지만, 결코 바람직한 황태자 후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부황.”

릉왕을 옹호하는 관원들도 잇달아 무릎을 꿇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황제는 그런 릉왕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유왕이 적합하지 않다면 네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후보는 누구냐?”

“황태자를 세우는 일이 국가 대사인 만큼, 여러 대신과 상의하에 후보자를 추천받은 다음, 신중히 고민해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릉왕은 자신을 추천하고 싶었으나, 너무 속 보이는 행동일 것 같아 관원들의 추천을 받는 방식을 제안했다.

그때, 유왕이 앞으로 나섰다.

“부황. 소자의 능력이 아직 부족하여 황태자 자리에 오르기에 턱없이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하나 그만큼 스스로를 단련하여 대력조를 더욱더 번성시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둘째 아우. 나라를 다스리는 건 말만 번지르르하면 되는 게 아니라, 지혜와 책략, 담력과 식견을 요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눈앞의 형세를 파악하여,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 황태자 자리가 탐나는 건 잘 알겠지만, 개인적인 욕심으로 백성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서는 안 되지. 부족한 수장은 군대를 망치고, 현명하지 못한 군왕은 나라를 망치는 법이야!”

유왕과 릉왕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참 뒤, 유왕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부황,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자도 관원들의 추천으로 후보를 뽑은 다음 선택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황제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그래. 그럼 구정쯤을 기한으로 하자꾸나. 올해는 맘 편히 명절을 보내겠군.”

“예.”

릉왕은 여전히 썩 달갑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게다가 조정 대신들의 마음이 자신에게 더 많이 향해 있어, 이대로 잘 유지만 한다면 과반수가 자신을 추천할 거라 확신했다.

* * *

소식은 빠르게 후궁까지 전해졌다.

목운요는 탁자 위에 찬합을 내려 두며 손으로 머리를 괴고 월왕을 기다렸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잤더니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일각이 지난 뒤, 월왕은 탁자 앞에서 졸고 있는 목운요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그녀의 주변에는 무지갯빛 햇살이 아름답게 번져 있었다. 빨갛게 물든 두 볼은 마치 말랑말랑한 복숭아처럼 탐스러워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은 지경이었다.

월왕은 조심스레 목운요의 곁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잠에서 깬 목운요가 비몽사몽간에 물었다.

“사야?”

“왜 벌써 왔느냐?”

“사야께서 아침을 거른 채 조정에 나갔을 것 같아 아침을 가져왔어요.”

“요아…….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내 곁에 있어 줄 거니?”

목운요가 두 눈을 깜빡이다 손가락을 접어 가며 말했다.

“처음 사야를 만났을 때 중상을 입은 모습이 노숙자나 다름이 없었는데도 전 서슴없이 도와드렸어요. 다시 만났을 땐 심지어 제 목에 칼을 들이댔는데도 하운방 수익의 삼 할을 내주었고요. 당시 꽤 많은 도움이 되었죠?”

“그럼. 큰 도움이 됐지.”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손가락을 접었다.

“또 월서에서 많은 사람이 끼니마저 때우지 못한다길래 생강차를 보내 드렸죠. 그것만 해도 꽤 많은 은자가 들었다고요.”

“네가 보내 준 생강차 덕분에 월서 백성들이 무사히 겨울을 났다.”

목운요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뿐만 아니라 소금세 사건 때도 제 덕분에 크게 한 건 하셨죠? 그리고 불선루 수익에 나중에 빌려준 돈까지 하면…… 열 손가락으로 세어도 모자라겠네요.”

월왕이 주먹 쥔 그녀의 두 손을 제 손으로 감싸며 씁쓸하게 웃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내가 한결같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구나.”

목운요가 고개를 저으며 월왕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사야께선 힘든 월서 생활을 잘 이겨 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회를 찾아다니셨잖아요.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궁지에 빠진 저를 도와주셨고요. 모두 마음 깊이 기억하고 있어요. 사야가 아니었으면 하운방과 불선루도 오늘날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전부 사야 덕분이에요.”

목운요의 맑고 투명한 두 눈에는 빙산도 녹일 듯한 강렬한 믿음이 타오르고 있었다.

월왕의 가슴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요아, 난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윈 중요치 않다. 단지 너에게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을 뿐이다.”

“저는 사야께 실망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사야께서 왕야로 남지 못하더라도, 제가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몇 달간 하운방이 벌어들인 수익으로 평생 쓰고도 남을 테니, 아무 걱정 마시고요.”

월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마.”

“암요. 적어도 사람들이 봤을 때 장가 하나는 정말 잘 갔다고 부러워할 거예요.”

월왕이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래. 어쩌면 내 평생의 운을 널 만나는 데에 썼는지도 몰라.”

목운요도 활짝 웃으며 월왕의 품에 안겼다.

“사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가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야께서 어떠한 결정을 하든 전 늘 곁에서 함께할 거예요.”

월왕이 더욱 힘껏 그녀를 껴안았다. 두 눈을 가리던 슬픔도 점차 사라졌다.

“요아. 실은 어제 밤새 많은 생각을 했다. 난 생각보다 야망이 크지 않아. 그동안 열심히 세력을 키워 온 것도 온전히 모후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그 집념이 사라진 순간, 정신적 지주를 잃은 듯 허전함이 밀려오더구나. 그래도 다행인 건, 나에게 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아, 내 마음속의 새로운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겠느냐?”

냉궁에서 나고 자란 그는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목운요를 만난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마음이 점점 그녀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고, 무채색이었던 두 눈에도 점차 빛깔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이 사람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월왕의 눈빛에, 목운요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들었다. 그가 말하는 정신적 지주란, 앞으로 살아갈 목표와 동력으로 삼겠다는 큰 결심처럼 느껴졌다.

“사야.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는 게 억울하지 않으시겠어요?”

“그게 너라면 절대 억울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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