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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56화 (356/442)

356화 드러나지 않은 진실

“넷째 아우.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는데, 혹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라도 있는 게냐?”

릉왕의 질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월왕에게 집중됐다.

월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형님, 부황께서는 이미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형님께서도 부황의 말을 의심하는 건가요?”

릉왕의 표정이 순간 굳어 버렸다.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왜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월왕의 목소리엔 살기가 등등했다.

“공연하던 무희는 사실 자객이고, 내세운 증인은 하필 낙씨 가문 사람인 데다, 여러 가지 증거가 한꺼번에 쏟아지다니. 참으로 대단한 연극이군요.”

릉왕이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제 기억이 맞다면 형님께선 무예에 능통하지 않으시지요? 하지만 아까 보니 손쉽게 자객을 제압하시더군요.”

“그건 부황의 안전이 걱정되는 마음에 용기가 솟아나서였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된다는 게냐?”

“하지만 다들 보다시피, 자객은 검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경공도 심상치 않았는데 어찌-”

한데 월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압당한 자객과 낙붕이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했다.

그에 릉왕은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죽은 자는 증언할 수 없으니 월왕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진 것이다.

정전의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았다.

한참 뒤, 황제가 입을 열었다.

“흥겨워야 할 연회가 웃음거리만 남고 말았구나. 여봐라. 이 시체들을 갖다 버려라. 땅에 묻힐 가치도 없다.”

“예, 폐하.”

“근위대 총령은 오늘부로 궁내를 낱낱이 조사하거라. 짐이 사는 곳에 다시는 난장판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진비는 더 이상 짐의 눈에 띄지 않게 당장 치워라.”

“예.”

사색이 된 진비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끌려 나갔다.

목운요는 뭔가 수상함을 느꼈다. 진비의 성격대로라면 이대로 쉽게 물러설 리가 없었던 것이다.

문무백관들이 모두 자리를 뜨자, 황제가 릉왕과 유왕을 향해 손짓했다.

“둘 다 물러가거라. 짐이 월왕과 따로 할 얘기가 있다.”

“예.”

릉왕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정전을 나오자마자 유왕을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둘째 아우, 력양궁은 살 만한가?”

유왕도 입꼬리를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력양궁은 본디 태자들이 머무는 곳이라 당연히 살기 편하지요. 그나저나 형님이야말로 행동하기 전에 신중하게 고민하시지 그랬어요. 부황께선 개국 황제 다음으로 영명한 군왕이신데, 그리 쉽게 흔들릴 거라 착각한 건 아니지요?”

릉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는 지금, 굳이 표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둘째 아우, 아직 방심하긴 일러. 두고 봐, 언젠가는 너를 력양궁에서 쫓아내고 말 테니까.”

유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형님, 언제부터 허풍이 이리 느셨습니까? 형님께서 고모님의 심기를 건드린 데다 부황의 노여움까지 샀으니, 더 이상 역전할 기회는 없습니다.”

유왕은 격노한 릉왕을 뒤로한 채 웃으며 력양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릉왕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이경주를 찾아갔다.

태화전 내, 황제의 두 눈에서 화가 점차 사라지고 미안함과 불안함이 가득 찼다.

“군월, 오늘 일은 마음에 두지 말거라…….”

“부황.”

월왕이 확고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자,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정녕 부황의 자식이 맞습니까?”

“당연하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월왕의 어깨를 감쌌다.

“군월,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너는 짐의 아들이고 대력조의 넷째 황자다. 그리고 네 모후는 짐의 마음속의 유일한 아내다! 알겠느냐?”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월왕은 황제의 눈빛에서 다급함과 불안감, 그리고 회피를 느꼈다.

한참의 침묵 뒤, 월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황제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방금 전에 한 말에 모든 기력을 쏟아부은 듯했다.

서립이 빠르게 다가가 황제를 부축했다.

“폐하, 늦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래. 누님도 어서 가서 쉬십시오. 군월도 궁에 남고 싶으면 하룻밤 머물다 가거라.”

군월의 마음이 누구보다도 심란할 테니, 이 기회에 장공주를 찾아가 궁금증을 풀고 또 위로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장공주는 황제의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황제가 자리를 떠난 뒤, 장공주가 월왕에게 물었다.

“군월, 혹시 궁금한 게 있느냐?”

월왕이 입을 떼려다 결국 충동을 억누르며 장공주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습니다. 고모님, 어서 돌아가 쉬십시오.”

“그래. 요아, 돌아가자꾸나.”

진실이 무엇이든, 그동안 황제가 월왕과 부자의 정을 나눈 건 불변의 사실이다. 월왕이 고작 그런 증거에 근거해 이 모든 걸 부정했다면 그보다도 더 실망스러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월왕은 장공주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모두가 떠나고, 월왕은 홀로 정전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가까운 곳에 가서 앉더니 사정없이 술을 부어 넣었다.

그때, 문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목운요였다. 그녀는 아직 남아 있는 월왕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사야, 아직 계셨네요. 혹시 가셨을까 봐 외할머니를 옥화궁에 모셔다드린 다음 바로 달려왔지 뭐예요.”

“요아, 같이 한 잔 기울이지 않을래?”

목운요가 웃어 보였다.

“전 조금만 마셔도 정신을 잃는 걸 사야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그럼 사야 말동무가 되어 줄 수 없어서 안 돼요.”

그러면서 그녀가 술을 월왕의 잔에 가득 채워 줬다.

월왕은 바로 술잔을 비운 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목운요를 와락 품에 안았다.

“요아. 진비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지?”

목운요는 월왕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늘 냉정하게만 보이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약해 보였다.

“사야, 폐하를 믿으셔야 합니다.”

“믿어야…… 겠지? 믿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진실이 뭔지도 알고 싶다. 모후의 사인과 나의 출신, 그리고 부황께서 왜 그때의 일을 숨기려고 하는지도……. 이 수많은 수수께끼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구나.”

목운요는 아무 대답 없이 월왕의 품에 기대 조용히 위로를 건넸다.

한참 뒤, 월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요아. 규칙을 가장 중요시하는 부황께서 우리 둘의 혼사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그는 황실의 혈통이 아닌 게 분명하다.

“폐하께선 사야가 친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부황께서 친히 말씀하셨으니 아니어도 맞는 거지.”

월왕은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다시 술을 들이켰다.

목운요는 속으로 몰래 한숨을 쉬며 잔을 채워 주려 했다. 그에 월왕이 손으로 거절을 표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요아, 옥화궁까지 바래다주마.”

“사야?”

목운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 월왕은 고개를 저으며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스산한 기운을 내뿜을 뿐이었다.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입추가 지나서인지 날씨가 꽤 서늘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월왕과 목운요는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옥화궁 입구에서 금란과 금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요아, 어서 쉬거라.”

“사야, 정말…… 괜찮은 거죠?”

“그럼. 아무 일 없으니 들어가거라.”

목운요는 두어 발자국 가다가, 뒤돌아 월왕을 바라보았다.

“사야, 황후 마마의 일은 계속 알아보실 건가요?”

월왕은 입술을 깨물다 한참의 고민 끝에 대답했다.

“그만둬야지.”

보화사에서 장공주가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진실이 생각보다 잔혹하더라도 계속 조사할 건지 말이다.

당시 그는 무조건 끝까지 조사할 거라 대답했다. 자신의 힘으로 모후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부황의 두 눈에 드리운 아픔을 보니 진실이 무엇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부황이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건강 상태라면, 자칫하면…….

목운요가 다가와 월왕의 손을 꼭 잡았다.

“사야. 폐하께서 지난번에 외할머니와 함께 남해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서릉의 일이 일단락되면 저희가 두 분을 모시고 다녀와요. 마침 저도 남해에 가 본 적이 없거든요. 듣자 하니 그곳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다가 있다더군요. 바다가 질리면 그 후엔 월서로 가요. 폐하와 외할머니께서 분명 완전히 바뀐 월서를 보고 크게 놀라실 거예요.”

월왕이 머릿속의 어지러운 생각을 누르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목운요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돌았다. 궁문에서 월왕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눈부셨다.

옥화궁으로 돌아온 목운요가 조심스레 자신의 방으로 향하자, 곡 마마가 낮은 소리로 장공주에게 아뢰었다.

“전하, 군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장공주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적당한 시기에 이 귀비가 소우의한테 가임초를 먹인 사실을 퍼뜨리거라. 그리고 내무사에다 제 귀비를 도와 최대한 빨리 장부들을 정리하라고 전하거라.”

“네, 전하.”

장공주는 그제야 침상에 누웠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보자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내가 그동안 잘해 왔던 게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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