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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55화 (355/442)

355화 굳은 믿음

쏟아지는 진언에 황제의 이마에 핏대가 잔뜩 섰다.

“더 조사할 것도 없다. 짐은 황후와 누님을 믿어 의심치 않고, 군월은 누가 뭐래도 짐의 아들이다!”

월왕이 그런 황제를 보며 꽉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그에 비해 릉왕은 불만이 한층 더 쌓였다. 이 상황에서도 장공주와 월왕을 믿는다니?

“여봐라. 짐을 살해하려 하고, 또 황후와 장공주를 모함한 이 두 사람을 끌고 가서 쳐 죽이거라!”

“잠깐!”

그때, 진비가 손에 오래된 책자를 든 채 무릎을 꿇고 말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회임하신 후 태의가 진맥한 기록을 신첩이 찾아냈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황후 마마께서 회임하신 기간과, 폐하와 동침을 가진 기간이 반 개월이나 차이가 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황제가 냉랭한 눈빛으로 진비를 쳐다보았다.

“진비, 허락 없이 이런 걸 조사하는 게 죽을죄인 것은 알고 있나?”

“폐하. 신첩은 당시 마마의 회임이 이상하다 느꼈지만, 장공주께서 일부러 속이시는 바람에 의문을 속으로만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소우의한테서 월왕의 신분에 대해 듣게 되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비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을 이었다.

“폐하. 신첩이 저지른 일이 죽을죄인 걸 잘 알지만, 그래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 용기를 냈습니다.”

안색이 어두워진 황제가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장공주는 목운요에게 약을 건네라고 눈짓했다.

“폐하, 이 약을 드십시오.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목운요! 지금 폐하께 무슨 약을 먹이는 게냐?”

진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네가 입궁한 뒤부터 폐하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네가 몰래 무슨 짓을 벌이는 게 아니냐?”

“진비 마마,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목운요가 차가운 말투로 반박했다.

진비는 그런 목운요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폐하께선 그 누구보다도 영명하시니 분명 시비를 가려내실 거라 믿습니다. 장공주께선 월왕의 신분을 숨기고 세력을 키우도록 도와주다가, 월왕이 귀경하고 나서 유난히 폐하 곁을 자주 왕래했지요. 또 마침 잃어버린 딸을 되찾고 의술과 독술에 능한 외손녀까지 데려오다니,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요?”

“진비, 지금 짐의 누님을 비난하는 건가?”

황제가 목운요가 건넨 약을 손에 꽉 쥔 채 진비를 노려보았다.

“폐하, 소씨 가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문원이 목운요 때문에 패가망신했습니다. 이건 분명 우연이 아니라, 장공주께서 목운요를 이용해 방해가 될 만한 사람들을 없애는 것입니다. 스무 살도 안 된 시골 아이가 자수, 다도, 의술 모두 능통하여 민심까지 얻었습니다. 이건 고작 어린아이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분명 배후에서 누군가가 지시하고 있는 겁니다!”

진비는 일부러 ‘지시’라는 두 글자에 힘을 주며 장공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장공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폐하. 지금 백성들은 모두 장공주와 목운요를 칭송하지, 폐하에 대한 칭찬은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하운방과 불선루는 방방곡곡에 세력을 키워 둔 상황입니다. 장공주는 폐하의 곁에서 판단을 흐리게 하고, 목운요는 요양한답시고 늘 곁에 머무르고, 월왕은 대신 일 처리를 하고. 지금 폐하의 곁에 이들 말고 다른 믿을 만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관원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진비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폐하, 군진이 그렇게 되면서 신첩도 더 이상 욕심이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그동안 베푸신 은정을 생각해, 더 이상 간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폐하.”

이 귀비도 나서서 말했다.

“폐하, 이번 일은 절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관원들도 무릎을 꿇으며 청을 드렸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폐하.”

정전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황제가 사람들을 쭉 훑어보더니, 목운요가 건넨 약을 주저 없이 삼킨 다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짐은 누님을 믿는다.”

진비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입이 닳도록 진언했거늘, 어찌 황제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일까!

참다못한 릉왕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부황, 소자도 고모님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증거가 나온 이상, 제대로 조사하지 않으면 결코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 주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제대로 조사해 고모님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냉랭한 눈빛으로 릉왕을 바라보았다.

“조사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감히 대력조에 큰 공을 세운 장공주를 조사하려 하다니, 다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게냐?”

릉왕은 속으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부황, 고모님의 생각도 들어 보시지요. 혹시 생각이 다르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황제가 눈을 찌푸리며 장공주를 향해 말했다.

“누님, 오늘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간에, 황제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혹여 누님이 정말 다른 마음을 품은 거라면, 자신은 절대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군월의 출신에 대해선 두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든 소문은 뜬구름 같은 유언비어에 불과했다.

황제는 옛날 일을 회상하며 저도 모르게 아파 오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에게선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장공주가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황상, 근거 없는 소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니 염려 마십시오. 황상께서도 철없는 아이의 장난이라 생각하고 옥체를 살피십시오.”

“역시 짐을 위하는 건 누님뿐입니다…….”

황제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한참 후에야 겨우 화를 억눌렀다.

“죄인 낙붕은 짐을 암살하려 한 죄로 자객과 함께 데려가서 죽이거라. 진비는 장공주를 모함한 죄로 봉호를 박탈하고 오늘부로 냉궁에 유폐하도록 한다.”

진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먹을 꽉 쥔 두 손에서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주르륵 흘렀다.

“장공주, 폐하의 믿음과 은정을 이용해 황실 혈통까지 어지럽히다니, 이건 명백히 조정의 기강을 무너트리는 짓이야!”

“닥쳐라!”

황제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네가 그동안 짐을 보필한 공을 봐서 오늘 목숨을 살려 둔 줄 알아!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누님께 무례를 범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진비는 처량한 웃음을 지었다. 친정이 무너지고 진왕마저 망가진 지금, 그녀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오랫동안 계획해 온 일인 만큼 절대 이 기회를 쉽게 놓치지 않으리라.

“장공주 전하, 신첩이 한 말에 대해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을 건가요? 폐하께서 당신을 위해 본인의 명성 따위 개의치 않고 증인을 죽이려 하는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요?”

진비는 장공주와의 싸움에서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기지 못한다면, 적어도 황제의 가슴에 가시라도 박으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가시가 깊이 박히지 않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기필코 장공주에 대한 황제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장공주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비, 대체 무슨 해명이 듣고 싶은 게냐? 황상께선 이미 월왕이 자신의 친자식이라고 똑똑히 말씀하셨다. 그러니 내가 월왕의 출신을 속였다는 죄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나머지 얘기는 더 해명할 가치도 없다. 그렇게 충성심이 넘친다면 폐하의 말을 믿고 받들어야지, 어찌 의심하는 것이냐?”

진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증거들과 증인들이…….”

“역적의 자식들이 뱉은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리고 운요의 재능이 정 믿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조사해도 좋다. 대놓고 지적한 이상, 그럴 만한 증거를 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그 죄를 물을 것이다! 목운요는 본 궁의 외손녀인 만큼, 그 누구도 함부로 모함하고 누명을 씌워서는 안 된다!”

장공주의 곁에 서 있던 목운요가 약병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진비 마마께서 제가 폐하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약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억울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용한 약 처방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태의들께서 그 기록에 대해 여러 차례 검증하고 확인합니다. 이 양신환도 미리 태의들의 확인을 거친 약입니다. 한데 여전히 제가 태의들의 눈을 속이면서까지 나쁜 짓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의들도 얼른 나서서 덧붙였다.

“폐하, 소신들이 증언하건대 온한 군주의 말씀은 전부 사실입니다. 모든 약 처방은 저희들이 여러 차례 검증을 거친 거라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태의원의 명예와도 연관된 일이다 보니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혹여라도 태의원이 장공주, 온한 군주와 연합해 황제를 해하려고 한다는 누명을 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폐하께 아룁니다. 소신도 온한 군주의 처방이 전혀 문제없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나서서 증언하는 태의들을 보고 진비는 자신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애가 탄 릉왕은 수시로 이경주의 눈치를 살폈다.

연회 시작 전까지만 해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건만, 영락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절대 반박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증거들이, 부황의 눈에는 오로지 근거 없는 모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릉왕은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한쪽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월왕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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