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뜻밖의 증인
이상함을 눈치챈 월왕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여인에게 힘껏 던졌다. 그러나 여인은 술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폐하를 호위하거라! 어서!”
월왕이 여인을 제지하려는데, 릉왕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릉왕은 월왕을 힘껏 밀쳐 낸 다음, 여인을 제압하고 비수를 빼앗아 들었다.
“네 이년, 감히 부황을 암살하려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사이 시위들이 여인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황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객이 짐의 코앞까지 들이닥치다니, 근위병들을 제대로 정리해야겠군.”
근위대 총령이 바로 엎드려 죄를 청했다.
“폐하, 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때, 자객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노려보았다.
“네 이놈, 오늘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이 원한은 악귀가 되어서라도 꼭 갚을 것이다. 피 맺힌 원수는 피로 갚을 거란 말이다!”
릉왕이 그녀를 발로 힘껏 차며 소리쳤다.
“닥치지 못할까! 어디서 감히 모함인 게냐!”
“모함? 하하하. 육대세가 일족을 잔인하게 멸한 저자가 어찌 황제란 말인가?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황제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근위병들을 뒤로 물러가게 한 뒤 여인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지?”
“말 못 할 이유가 없지. 난 낙씨 가문의 사람이고, 복수를 위해 왔다.”
장공주가 안색이 어두워진 황제를 보며 낮은 소리로 타일렀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여인이 이번에는 장공주를 보며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장공주. 낙씨 가문에서 당신에게 그토록 진심을 보여 줬거늘, 당신은 낙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뒤에서 몰래 일을 꾸몄었지. 그동안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안 들었던 거야?”
장공주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죽이시죠.”
“누님 말이 맞습니다.”
황제가 차오르는 화를 누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여봐라, 이자를 끌고 가 쳐 죽이거라.”
“미련한 황제, 장공주를 그토록 믿는 것이냐? 저 여자가 황위를 빼앗고 네 목숨을 위협할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느냐?”
여자가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그에 정전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하하. 장공주란 말에 신하들이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꼴 좀 봐. 어찌 황제보다 장공주를 더 두려워할까? 당신이 그토록 치켜세우는 장공주가 사실은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왜 모르지? 저 여자가 몰래 무얼 꾸미고 있는지 당신은 꿈에도 모를걸? 미련한 황제여, 언젠가는 그 믿음에 발등이 찍힐 게야!”
근위병들이 서둘러 여자의 입을 막으며 강제로 끌어냈다.
“그만!”
황제가 그런 근위병들을 멈춰 세웠다. 얼굴에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짐이 육대세가를 모두 멸한 건 그들이 나라의 안정을 위협하고, 백성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어서였다. 물론, 그 후손들이 복수심에 불타는 것도 이해는 한다만, 짐 앞에서 누님을 모함하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방금 한 얘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네 혀를 잘라 버릴 것이다!”
“하, 내가 무서워할 거 같아? 누님을 그토록 존중한다고 하니, 그럼 저 사람의 진면모를 낱낱이 밝혀 주지. 저 여자가 당신을 황위에 앉히고 권력에도 욕심내지 않는 것이 오로지 오누이의 정 때문인 줄 알지? 착각하지 마. 당신은 단지 저 여자의 손에 든 바둑알일 뿐이야.”
황제가 냉소를 지었다.
“그런 말 따위 믿지 않는다.”
“그럼 저 여자가 당신의 친자식이 아닌 월왕의 신분을 은폐한 것도 알고 있나?”
자객이 내뱉은 말에 모든 이들이 삽시에 혼란에 빠졌다.
목운요는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월왕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월왕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황제는 잠시 당황하더니 손에 든 찻잔을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무엄하구나!”
그러나 자객은 오히려 큰 소리로 웃을 뿐이었다.
“장공주,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황후와 낙 씨의 사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숨기고, 심지어 아이까지 황제의 자식이라 속였잖아. 그리고 그 아이는 바로 지금의 넷째 황자 영군월이고!”
관원들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는 굉장히 돈독했다. 황후의 친정이 육대세가 중 하나인 데다 그녀가 십 년간 회임하지 못해도,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혹 회임 중인 비빈이 황후에게 무례라도 범하면 가차 없이 처벌을 내려,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그런 황후가 회임하자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질투심에 눈이 먼 황후는 황자 열 명을 연달아 독살하고 임신한 비빈까지 해치려 했다.
조정 대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황후를 사형에 처하라며 상주를 올리자, 황제는 한 달 가까이 조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여론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황후를 냉궁으로 보내었다.
그때 이후로 황후는 가시처럼 황제의 가슴속에 박혀 영원한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하고, 건드릴 엄두도 못 냈다.
월왕이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부황, 저 사람의 말이 사실인가요?”
자객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황제가 아니라 장공주한테 물어야지. 월왕, 정말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 왜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는 장공주가 유독 당신한테만 잘해 줬을까? 아무도 당신한테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왜 저 여자만 수시로 냉궁으로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당신을 지켜 줬을까? 다 계획이 있었던 거지. 그렇게 당신의 믿음을 얻은 다음, 그걸 이용해 당신을 황위에 앉혀 대력조를 자기 손바닥에 넣기 위한 거라고!”
월왕의 날카로운 눈빛은 당장이라도 상대를 반 토막 낼 것만 같았다.
“닥쳐! 일개 역적의 후손 주제에, 그 말을 어찌 믿지?”
“못 믿겠다는 건가? 당신 등허리 쪽에 자그마한 갈색 모반이 있을 거야. 그건 낙씨 가문 남자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표식이지. 그리고 황후와 낙 씨의 관계에 대해 잘 아는 이도 아직 살아 있다.”
황제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오며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목운요가 약병을 꺼내 들자, 이를 본 장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목운요를 말렸다.
황제의 표정이 점차 무섭게 바뀌었다.
“지금 황후와 낙 씨가 간통한 사이라고 했느냐?”
“그래. 더 놀라운 건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누님이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여태껏 숨겼다는 거야. 정말 흥미롭지? 장공주, 이래도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건가?”
줄곧 침묵하던 장공주가 황제를 보며 말했다.
“황상, 옥체가 우선입니다. 고정하십시오.”
황제는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자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네가 말한 증인은 어딨느냐? 그자의 말을 어떻게 믿지?”
자객은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
“증인은 궁 밖의 북서쪽에서 날 기다린다고 했으니,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내면 찾을지도 몰라.”
황제가 손짓하자 근위병 여럿이 곧장 정전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포승으로 결박한 노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노인을 훑어보던 황제의 두 눈에서 짙은 살의가 번졌다.
“낙붕?”
노인이 고개를 들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폐하, 소인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자네는 낙곤의 의제 아니던가?”
“그때는 간신히 화를 면했지만, 오늘은 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 같군요. 그래도 죽기 전에 폐하를 만난 것만으로도 소인 만족합니다.”
“짐의 질문에 대답하거라. 황후와 낙곤이…….”
황제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느냐?”
“아무 사이 아닙니다.”
자객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전에 분명…….”
“무슨 소리냐? 난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다.”
낙붕이 여자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흐뭇한 눈빛으로 월왕을 몇 초간 쳐다보았다.
그에 자객이 무언가를 눈치챈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목운요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낙붕이란 자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더 믿음이 가게 했다. 월왕이 정말 낙씨 가문의 후손이라면 그는 어떻게든 월왕을 보호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 황제가 어떤 질문을 하든, 낙붕은 입을 딱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객도 전과 달리 말을 아꼈다.
크게 화가 난 황제가 두 사람을 죽이라고 명을 내리려던 순간, 궁녀 한 명이 달려오더니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폐하께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러더니 옷깃에서 혈서 하나를 꺼냈다.
“서립, 가져오너라.”
“예.”
서립이 혈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물러났다.
혈서를 빠르게 읽은 황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궁녀가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폐하, 이 혈서는 월빈 마마께서 자살하기 전에 남기신 유서입니다. 덕비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과, 제 귀비가 다른 비빈들과의 사이를 이간질한 것, 그리고 월왕 전하의 신분에 대해 낱낱이 밝혔습니다. 황후와 낙 씨의 간통 사실은 월빈 마마께서 소부 노부인한테서 직접 들은 사실입니다. 소부 노부인께서 증거로 친필 편지를 남겼는데, 소부 마당에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소인, 월빈 마마의 죽음이 헛되이 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마께서 유왕비를 협박했던 건, 제 귀비한테 가임초로 속았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부디 진실을 알아내, 마마의 결백을 밝혀 주시길 바랍니다. 제 귀비, 당신이 한 짓에 대해 벌을 받게 될 거야!”
마지막 말을 한 뒤, 궁녀는 곧장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침묵이 흐르더니, 관원들이 나서서 말했다.
“폐하, 중요한 사안입니다.”
“맞습니다, 폐하. 황실의 혈통과 위엄에 연관된 일입니다.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당장 어명을 내려 조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