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53화 (353/442)

353화 연회가 시작되다

“응. 영감이 한평생 의술에 매진한 결과물이지. 약선골 사람들이 이걸 찾아내려고 온갖 애를 썼었는데. 알고 봤더니 비밀 창고에 숨겨 둔 거였어.”

집중해서 의서를 보다 보니 어느새 한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

선령은 다 만든 환약을 챙기며 여전히 책에 몰두해 있는 목운요를 불렀다.

“거기서 보지 말고, 방에 가져가서 봐도 돼. 네 의술이라면 며칠 만에 바로 습득할 수 있을 거야.”

목운요는 그제야 시간이 꽤 많이 흐른 것을 눈치챘다.

“나도 모르게 정신이 팔렸네.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그 실력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을 텐데.”

“칭찬에 약한 우리 아버지가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 좋아서 춤을 췄을 거다.”

선령이 약병 하나를 목운요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폐하께서 많이 편찮다고 했지? 이 약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야. 폐하와 장공주 두 분께 드리고, 나머지는 뒀다가 필요할 때 써.”

얻기 힘든 귀한 약재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죽은 사람을 살려 내진 못하더라도 죽기 직전의 목숨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워.”

“고맙긴.”

선령이 멋쩍은 듯 대답했다.

“그나저나 아까 들어올 때 표정이 좋지 않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혹시 이씨 가문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릉왕의 외가인 이씨 가문?”

선령이 한참 생각하더니 답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건 많이 없지. 다만 전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승상 이경주한테 아들이 넷이나 있는데, 손주가 한 명도 없다더군. 예전에 이씨 가문이 그 때문에 약선골에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어.”

목운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손주가 두 명이나 있지 않아?”

“그 손주들 모두 입양한 아이들인데 몰랐어?”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 한데 이경주의 아들들이 전부 대를 잇지 못하다니, 뭔가 이상하군.”

“이씨 가문은 왜? 처리하려고?”

선령의 두 눈이 반짝였다.

“내가 도와줄까? 안 그래도 요즘 새로운 독약을 꽤 많이 연구해 냈거든. 완벽한 무색무취는 아니지만, 일반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야.”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목운요가 다급히 거절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씨 가문이 심상치가 않거든. 그래도 절대 함부로 그들을 건드리지 마. 알겠지?”

“알았다고. 잔소리쟁이 아줌마 같네.”

선령이 작게 투덜댔다.

“그럼 잔소리 조금만 더 할게. 전에 달고 다니던 향냥은 어디 갔어? 누가 준 거야? 솔직히 말해 봐.”

그에 선령은 목운요를 강제로 밖으로 밀어냈다.

“어린 것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난 아직 연구를 더 해야 하니까 다른 데 가서 놀아.”

“네가 약재 쪽에서 발이 넓으니 이씨 가문에 대해 조사 좀 해 봐. 이경주의 아들들이 왜 친자식이 없는지.”

“알겠다고, 잔소리쟁이야!”

* * *

한껏 들뜬 표정으로 서재를 오가는 릉왕의 두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외할아버지, 지금 하신 말씀이 사실인가요?”

백발의 이경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낙부에서 도망쳐 겨우 살아남은 노비를 찾아낸 데다 진비로부터 얻은 증거까지 있으니, 월왕은 이제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릉왕의 표정이 점점 더 밝아졌다.

“외할아버지, 그럼 더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바로 진행하시지요. 강남에서 월왕 때문에 큰코다쳤는데,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왔네요!”

이경주도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고희를 코앞에 두고 있지만 그에게선 여전히 품위가 넘쳐 흘렸다.

“전하,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월왕과 유왕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경주의 말에 릉왕은 더욱 흥분해 걸음걸이까지 꼬이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요?”

이경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진비가 진왕의 복수를 위해 저희 손을 빌려 월왕과 유왕을 없애려고 하지요. 그렇다면 그걸 역이용해 유왕과 월왕을 없애고, 그녀를 처리하는 것이지요.”

“외할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월왕의 뒤에 장공주가 있는데, 괜찮을까요?”

“장공주? 황제의 비호가 없다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한낱 여인이 뭐가 두렵습니까? 릉왕 전하, 전하께서는 앞으로 한 나라의 왕이 되어 대력조를 이끌어 갈 분입니다. 나이 든 장공주 따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공주가 자신을 대할 때의 냉담한 태도를 떠올리자, 릉왕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맞아요. 그깟 장공주 따위가 걸림돌이 될 수는 없죠.”

이경주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반쯤 감은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빛이 반짝였다.

“진비가 모든 준비를 해 뒀으니 저희는 칼을 들고 끝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월왕과 유왕이 나타나는 순간 한 번에 잘라 버리는 거지요. 그 두 사람만 사라지면 전하께서 태자가 되시는 겁니다.”

“태자?”

릉왕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두 눈에는 욕망이 이글거렸다.

“태자보다 황제가 저한테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현명하십니다, 전하.”

* * *

구월이 어느덧 가까워졌다. 원래대로라면 가을 사냥을 시작할 때지만, 황제의 건강 문제로 이는 궁중 연회로 대체되었다.

금란과 금교는 연회에서 입을 의상과 그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골랐다.

“소저, 구름무늬 비단옷에 진주 비녀를 하면 어떨까요?”

“응?”

멍하니 있던 목운요는 금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으시네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목운요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영 불안하네요.”

오늘 연회는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인지라, 소란 피우기에 딱 좋았다. 진비와 이씨 가문이 이 틈을 타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금란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소저께 도움이 못 되는 소인을 용서하세요.”

목운요가 멈칫하더니 곧바로 환하게 웃었다.

“날 위해 의상을 준비해 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걸요. 혹시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다들 옥화궁에 꼼짝 말고 있어요. 여긴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라 사람들이 함부로 들이닥치지 않을 거예요.”

“……네, 소저.”

목운요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군주 봉호를 받은 뒤로 처음 입어보는 궁장(宫装)이었다.

장공주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목운요를 보자마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우리 요아, 너무 이쁘구나. 어디 한번 자세히 보자꾸나.”

목운요가 장공주의 앞에 서서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정교한 구름무늬의 치맛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니 마치 피어나는 꽃송이와도 같았다. 머리에 꽂은 진주 비녀는 은은하게 빛나면서 목운요의 얼굴에 한층 생기를 더해 줬다.

“천추에 절색이 없지만, 눈앞에 가인이구나.”

“외할머니 눈에는 제가 뭘 해도 이쁘겠지요.”

그때, 허연한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우리 요아는 배 속에서부터 예뻤어요.”

“맞는 말이구나.”

활짝 웃은 목운요는 장공주를 유심히 살폈다. 겉으로 봤을 땐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가끔 흔들리는 눈빛 사이로 근심이 느껴졌다.

“외할머니, 연회에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아 약선을 만들어 왔어요. 두 분께서 미리 맛보세요.”

“그래.”

약선을 맛본 장공주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요아, 며칠 전에 준 몸보신에 좋은 약 있지?”

“네.”

“이따 연회장에 갈 때 한 병 챙기거라.”

“외할머니…….”

“아무래도 오늘 큰 소동이 일어날 것 같구나.”

목운요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씨 가문과 진비가 오늘 일을 벌이기로 작정한 거라면 십중팔구 월왕의 출신이 도마 위에 오를 것이고, 외할머니마저 연루될 수 있었다.

월왕이 과연 잘 견뎌 낼 수 있을까? 폐하마저 의심하게 된다면 외할머니는 어떻게 되는 걸까?

* * *

태화전에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모였다.

목운요는 사람들이 인사 올리는 틈을 타, 황자석에 앉아 있는 월왕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잠시 뒤, 음악 소리와 함께 용포를 입은 황제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정전에 나타났다.

모든 사람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자, 옥좌에 앉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예를 거두시오.”

“예.”

“누님. 짐이 옥화궁에 들렀거늘, 왜 혼자 오셨습니까?”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 보니 미리 와서 가무를 감상했지요.”

장공주가 황제의 앞에 놓인 술잔을 보고 서립에게 말했다.

“아직 음주는 안 되니 다른 걸로 바꿔 오너라.”

“네, 전하.”

서립이 냉큼 술을 물로 바꿨다.

황제의 눈빛이 한없이 따뜻해졌다. 그는 장공주와 몇 마디 더 나눈 뒤에야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시작하거라.”

가을 사냥 대신 진행하는 연회다 보니, 격앙된 음악이 울려 퍼졌고, 무대에도 무희가 아닌 시위들이 올라와서 공연을 선보였다.

그러나 관원들은 공연에 큰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수시로 유왕과 월왕 등의 눈치만 살폈다.

유왕이 현재 력양궁에 머물고 있고, 요즘 제 귀비까지 유왕비에게 후궁 관리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하니, 더욱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월왕은 한 나라의 황자가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자살 소동까지 벌이고, 심지어 상대는 혈연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황위에 오를 기회를 놓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꽤 많은 노신들의 옹호를 받던 인물이었는데 스스로 이 지경까지 오다니, 보는 이들은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 북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더니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 시위들이 들고 있는 장창 끝을 밟고 하늘로 높이 뛰어올랐다. 여인이 바닥에 닿으려고 하면 시위들은 다시 장창으로 힘껏 그녀를 띄워 올렸다.

그 광경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창끝에서의 아찔한 춤사위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한데 여인이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그 순간, 갑자기 그녀가 방향을 바꾸더니 비수를 들고 황제가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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