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이씨 가문의 음모
선령이 한결 차분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다들 뿔뿔이 흩어졌더라. 그래도 아버지의 약재 창고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몰래 좋은 것들만 골라 가져왔지. 조만간 목록을 정리해서 보여 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그래, 절대 사양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목운요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선령은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다친 걸 알고 놀라서 달려와 준 선령만큼이나, 자신도 얼마든지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선령이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직 여독이 덜 풀린 것 같아서 난 이만 가서 쉴게. 혹시 내가 도울 일 있어?”
“음, 월왕 전하한테 혹시라도 수상한 점이 없는지 봐줘. 혹시라도 진왕처럼 갑자기 당할 빈틈을 보여선 안 되니까.”
선령은 다시 입을 삐죽거렸다.
“알겠어. 지금 바로 가 볼 테니 편히 자.”
“그래.”
선령이 뒤돌아 걸어 나가는데, 그녀의 몸에서 달랑거리는 물건이 목운요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잠깐, 언제부터 향낭을 달고 다녔어?”
“향낭? 무슨 향낭?”
선령은 평소 독술 연구를 위해 향이 나는 물건은 일절 가까이하지 않았다.
목운요가 손가락으로 허리춤을 가리키자, 선령도 그제야 자신에게 매달린 작은 향낭을 발견했다.
“그놈이네.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혼내 줘야지!”
목운요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놈이 누군데?”
“몸조리나 잘해. 쓸데없는 데에 관심 끄고. 이만 가 볼게.”
선령이 떠난 뒤, 목운요는 침대에 기대어 웃음을 터뜨렸다. 선령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 * *
장공주와 허연한의 감시 아래 며칠 동안 몸조리한 끝에, 목운요는 드디어 방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월왕과 마주쳤다. 다행히 그의 안색도 훨씬 좋아 보였다.
“요아, 방금 고모님을 만나 뵙고 나오는 길이다. 오늘 궁 밖에 가서 네 혼례복 준비가 잘되고 있는지 보고 오자꾸나.”
목운요의 눈에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좋아요. 그럼 어서 가요.”
하운방 앞, 채의는 목운요를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히며 걱정스레 안부를 물었다.
“소저, 별일 없으신 거죠?”
“난 괜찮으니 걱정 말아요.”
경릉성 하운방에 비해 서릉 하운방에는 심혈을 많이 기울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채의는 목운요를 많이 따랐다.
그 마음이 느껴져, 목운요는 서릉 하운방에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원단과 자수 실은 모두 준비해 두었으니 소저께서 한번 보십시오.”
줄곧 목운요의 보살핌을 받아 온 하운방 사람들은 드디어 목운요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들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혼례복 제작에 참여하기 위해, 저마다 자수 실력을 연마하려고 애썼다.
목운요와 월왕은 눈앞에 놓인 아름다운 비단을 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사야의 길복도 함께 만들려고 하니 이참에 마음에 드는 원단을 골라 보시지요.”
“그래.”
한 시진에 걸려 각종 원단과 자수 실을 모두 고른 두 사람이 하운방을 나서려는 그때, 우의가 찾아왔다.
“주인님과 목 소저를 뵙습니다.”
목운요는 채의 등을 내보낸 뒤, 우의한테 차를 건넸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니 강남에서 밤새 달려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단숨에 차를 들이켠 우의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주인님의 분부대로 이씨 가문의 양곡 장사를 억압해 보았지만, 큰 효과를 보진 못했습니다. 이후 행상대들 틈에서 몰래 소식을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씨 가문의 행상대가 하는 일이 양곡 장사가 아닌 철기 밀매라고 합니다.”
순간 월왕의 눈빛이 차갑게 바뀌었다.
“소금과 철기는 자고로 나라에서 운영하지. 특히 철기는 관리가 더욱 엄격할 텐데, 이씨 가문이 감히 철기에 수작을 부리고 있었단 말이냐?”
“흑룡성 지역은 땅이 넓고 인구가 적어 관리가 엉성한 편이지요. 이씨 가문이 그곳에서 몰래 철광 광맥을 찾은 다음, 병기를 만들어 대력조 이외의 곳으로 보낸다 합니다.”
목운요도 적잖게 놀랐다.
“대력조 이외의 곳이라면, 설마 운노나 북강으로 철기 밀매를 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운노는 초원이 광활하고 유목을 위주로 하는 곳이지요. 변경 지역에서 작은 소란을 피우긴 하나, 큰 문제가 될 곳은 아닙니다. 반면 북강은 야심이 커 그동안 대력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죠. 최근엔 이씨 가문으로부터 꽤 많은 철기를 사 갔다고 합니다.”
월왕의 눈에 짙은 화가 어른거렸다.
“백성들의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강둑을 폭파한 진왕이 가장 어리석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씨 가문이 그보다도 한 수 위였군. 스스로 재앙을 초래하는 이런 짓을 하다니!”
“이씨 가문의 행상대가 워낙 치밀하게 움직이는데, 이번에 소식을 캐내다가 그만 들키는 바람에 지금은 다들 자취를 감춘 상황입니다. 저희가 심어 놓은 사람들도 전부 살해당했습니다.”
월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찾아낸 증거는 있느냐?”
“행상대 내부에 잠입한 자가 보내온 서신 외에는 아무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진 총관님께서 추가로 사람을 보냈으니,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증거를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월왕은 깊은 사색에 빠졌다.
“철기 밀매는 목숨이 달린 중죄이니 이씨 가문도 그만큼 신중을 기울이겠지. 이번 일로 이씨 가문에서도 경계를 한층 더 높였을 테니, 다른 증거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다. 혹시 밀매한 철기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했느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행상대가 생겨난 지 꽤 오래된 걸로 압니다.”
“알겠다. 가서 쉬거라.”
“네, 주인님.”
우의가 떠나자, 목운요가 월왕의 손을 꽉 잡았다.
“사야…….”
월왕도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했다.
“월서에 있을 당시 북강인들과 여러 번 맞붙은 적이 있다. 북강인들은 성정이 사나워서, 그들에게 잡혀간 이들은 손발이 잘린 채로 말에 매달려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지. 그래서 북강 군대가 지나간 곳은 늘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이씨 가문이 아무리 권세에 목이 말랐다 해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킬 줄 알았는데, 감히 철기를 밀매하다니. 이건 호랑이에게 고기를 먹여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 일이다!”
“내막을 알았으니 하루빨리 이씨 가문을 잘라 내면 되지요.”
월왕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씨 가문은 조정에서 워낙 세력이 단단한 데다, 그 세력이 인친(姻親,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뿌리 뽑기가 쉽지 않을 거다.”
“이씨 가문이 이토록 속셈이 깊은지 몰랐네요.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릉왕은 그들에게 있어서 단지 방패일 뿐이다. 사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목적뿐이지. 요아, 이 일을 부황께 알려야 할까?”
목운요가 신중하게 고민하더니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예전이라면 무조건 말씀드리라고 했을 테지만……. 사야께서도 아시다시피 폐하의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아요. 혹시라도 사실을 알게 되면 못 버텨 내실지도 몰라요. 혹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대력조는 결국 엉망진창이 되겠죠.”
“나도 그게 가장 걱정되는구나.”
그동안 진왕의 세력에 가려져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 이씨 가문이건만, 배후에서 그토록 끔찍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은 그 누구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
“우선 유왕 전하께 알리는 게 어떨까요?”
“그래. 내일 일찍 둘째 형님을 찾아가 봐야겠구나.”
“사야께서 서신을 써 주시면 제가 전달할게요. 이씨 가문 쪽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어 지금 사야께서 입궁하시면 아무래도 눈에 띌 수 있어요.”
“그게 좋겠다.”
월왕이 서신을 쓰자마자 목운요는 곧장 궁으로 돌아와 서신을 몰래 력양궁으로 보냈다.
* * *
이튿날, 민방화가 장공주를 찾아와 목운요도 자리를 함께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두 사람은 어화원 연못 옆의 정자에 앉았다.
“운요, 사실 유왕 전하의 부탁을 받고 왔단다. 방법을 찾아볼 테니, 만사에 조심하라고 전해 달라 하시더구나.”
“고맙습니다. 월왕 전하께도 전하도록 하지요.”
민방화가 걱정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하께서 그토록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유왕 전하께선 왕비 마마를 생각하는 마음에 말씀드리지 않으셨을 거예요…….”
“마음은 잘 알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구나. 그나저나 두 사람의 혼인 날짜는 정해졌느냐? 미리 알아야 선물을 준비해 둘 텐데.”
“아무래도 조만간 치르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 둬야겠네.”
두 사람은 한참을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옥화궁에 돌아온 목운요는 바로 선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진한 약 냄새가 코를 덮쳤다.
“뭘 만들고 있는 거야?”
선령이 도자기 병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
“방금 만든 건데 한번 봐 봐.”
목운요가 병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보더니 두 눈을 크게 떴다.
“양신환(养神丸)이네? 처방전이 실전되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만든 거야?”
“아버지 창고에서 찾아냈지. 의서들을 꽤 찾았는데, 저기 구석에 있으니까 필요하면 가져가서 봐.”
목운요는 곧장 한 권을 집어 들어 훑어보기 시작했다. 의서 내용이 굉장히 복잡한 데다 정리가 안 되어 있어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목운요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혹시 이거…… 너희 아버지가 쓰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