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51화 (351/442)

351화 연극

* * *

진비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지만, 한동안 후궁은 전례 없이 조용했다. 이 귀비가 수시로 말썽을 피우는 것 외엔 아무 탈 없이 지나갔다.

오히려 조정이 더 시끌벅적했다. 관원들의 상주가 빈번해졌고, 날마다 관원들이 무릎 꿇고 목운요와 월왕의 사랑이 예법에 어긋난다며 호소했다.

“소저, 월왕 전하께서 지금 폐하께 소저와 전하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청을 드리고 있다 합니다. 밖에서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있던 관원들도 덩달아 흥분한 상태라고 해요.”

“금란, 외할머니께선 지금 어디 계시죠?”

“이번에 새로 들여온 국화를 구경하고 계십니다.”

“어디 구경하러 가 봅시다.”

“네.”

목운요의 담담한 태도에 금란도 그제야 안정을 찾았다. 황제와 장공주가 응원하는 이상, 두 사람의 혼사도 아무 탈 없이 진행될 것이리라.

화원으로 나가자, 장공주는 한창 손가락에 물을 묻혀 국화에 뿌려 주고 있었다. 목운요가 다가오는 걸 보고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요아, 어서 오너라. 새로 들인 꽃이 어떤지 봐 주렴.”

목운요가 한참 자세히 살피더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말 아름답게 폈네요. 보통 색이 진한 국화를 묵국이라 칭하는데, 이 꽃은 꽃잎 색이 진한 데다 제대로 된 묵색이니 귀한 꽃인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든다면 네 방으로 옮겨다 주마.”

“작년에 제가 소부에서 지낼 때, 셋째 황자께서 국화 화분 두 개를 보내 주신 적이 있어요. 하나는 살면미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구축파였지요. 정성을 다해 온실에 두고 키웠지만 결국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어 버렸어요.”

장공주가 다시 손가락에 물을 묻혀 꽃잎에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살면미인에 백구축파라, 흥미롭군. 셋째 황자는 지금 감금 중이라 면회가 금지되어 있을 테니, 이 묵국을 진비한테 가져다주자꾸나.”

“네.”

곡 마마가 시녀를 시켜 꽃을 들어 옮겼다.

“장공주 전하, 꽃에 이름이라도 지어 주시지요.”

장공주가 목운요를 보며 물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느냐?”

“봄빛도 화려함도 다투지 아니하고, 가을바람에 흔들리다 겨울 서리에 맞서노라. 진한 묵색 꽃잎도 흔치 않은데 꽃술마저 묵색이니, 묵심(墨心)으로 부르는 게 어떨까요?”

묵심, 검붉은 마음.

진비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곡 마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 지금 바로 진비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곡 마마가 떠나자 장공주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 놀리는 데 재미 들렸구나.”

“외할머니께서 경고를 보내고자 하니 저도 힘을 보태야죠. 이제 가만히 지켜볼 일만 남았네요.”

보름이나 지났지만 진비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한편 황제는 이미 이씨 가문을 겨냥할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혹시라도 중간에 진비 때문에 수가 틀리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그녀를 움직이게 해야 했다.

진비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묵국을 받았다. 하지만 곡 마마가 자리를 뜨자마자 곧바로 안색이 흐려졌다.

“묵심이라…….”

시녀가 냉큼 다가와 입을 열었다.

“마마, 이 꽃이 눈에 거슬린다면 당장 다른 방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그보다 좀 더 기다려 볼 생각이었는데, 장공주께서 친히 경고를 주셨으니, 더 이상 미룰 의미가 없겠군.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하거라.”

“예.”

* * *

황제는 단호하게 월왕의 혼인 요구를 거절하며 실망스럽다는 태도를 내비쳤다.

꼬투리 잡고 늘어졌던 관원들은 황제의 태도를 보고 그제야 잠잠해졌다.

거절당한 월왕은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하고 절절한 진정서까지 써서 올렸다. 자신이 목운요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소씨 가문의 아가씨였을 뿐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목운요에게 이미 빼앗겨 버린 마음은 다시 거둘 수가 없고, 그녀가 아니면 평생 혼인하지 않을 것이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생을 마감하는 것이 낫다며 호소했다.

진정서를 본 황제는 오히려 더 크게 노해, 당장 조정에 나와 이부 정사를 처리하라고 명을 내렸다.

월왕이 다시 조정에 나갔을 때, 관원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던 월왕이 고작 며칠 사이에 홀쭉해져,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관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단식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단지 흉내만 내는 것뿐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화가 난 황제는 조회하는 내내 월왕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조회를 마치고 얼마 뒤, 이부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다름이 아니라 월왕이 일을 보는 도중에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상태를 살핀 태의는 월왕의 건강 상태가 매우 허하며 마음의 근심이 깊어, 제대로 요양하지 않을 경우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걱정스레 말했다.

소식을 들은 유왕은 곧바로 황제를 찾아가 월왕과 목운요의 혼사를 허락해 달라며 청을 올렸다. 두 사람을 하루빨리 허락하지 않으면 월왕이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며 눈물까지 보인 것이다.

이에 월왕이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금 청을 올리러 가자, 그동안 옥화궁에서 조용히 지내던 목운요도 밖으로 나왔다.

보름 가까이 못 본 사이에 월왕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안색은 백지처럼 하얬고, 특히 입술이 말라 터져 피까지 나고 있었다.

목운요의 눈에 애처로움이 가득 찼다. 월왕의 곁에 선 그녀는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사야. 이번 생에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한다면, 저승에서라도 저와 함께하시겠어요?”

“요아…….”

목운요가 환약 두 알을 꺼내 들더니, 그중 하나를 입에 넣고 삼켰다.

“하늘이 야속해 저희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저도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어요. 저승에서 우리 꼭 함께해요.”

힘없이 쓰러진 목운요의 숨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월왕은 슬피 통곡하다가, 곧바로 나머지 약을 집어삼켜 버렸다.

때마침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더니 뒤이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왕은 하늘마저도 두 사람을 가엽게 여겨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했다.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황제는 두 사람을 무조건 살려 내라며 태의를 재촉하는 한편, 두 사람의 혼인을 허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어명이 내려지자마자 방금 전까지 퍼붓던 비가 멈추고 우중충했던 하늘도 갑자기 맑아졌다.

더불어 태의들의 노력 끝에 독약을 먹은 월왕과 목운요도 목숨을 건졌다.

이에 서릉의 민심이 완전히 바뀌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두 사람의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서 미담으로 바뀐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릉왕은 화를 못 이겨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동댕이쳤다. 사람을 시켜 소문을 다시 바꾸려고 했으나, 백성들 사이에선 이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 * *

가까스로 정신이 든 목운요는 침상 옆에 누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라고 생각한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한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뒤집히더니, 엉덩이를 세 대나 크게 맞았다.

목운요는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몸 상태가 허약하지만 않았더라면 아파서 팔짝 뛰었을 것이다.

곧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살 시도? 바보야? 머리 나빠? 그 정도 양이면 황궁 전체를 독살하고도 남을 양이라고! 못난 놈! 나한테서 독술을 배웠다더니, 제대로 배운 게 하나도 없네. 차라리 나처럼 잔인하게 끝장 보는 거나 배울 것이지!”

선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약선골에서 볼일을 마친 그녀는 곧바로 서릉으로 향했다. 그러다 목운요와 월왕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다행히 살려 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독 가루를 들고 궁으로 쳐들어갈 뻔했다.

선령 자신도 목운요를 왜 이렇게까지 아끼는지 알지 못했다. 목운요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이 감정은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한바탕 쏟아부은 선령은 그제야 화가 좀 풀리는 듯했다.

한데 그녀의 말이 끝나고도 목운요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선령이 침대에 누운 채 꼼짝 않는 목운요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물었다.

“뭐야,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거야?”

목운요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선령은 되레 당황했다.

“혹시 내가 너무 심하게 때렸니? 어디 한번 봐 봐.”

억지로 몸이 돌려진 목운요는 미간을 힘껏 찌푸리며 소리쳤다. 사실 아픈 것보단 선령의 걱정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컸다.

“아파, 아프다고! 어쩜 그리도 세게 때릴 수가 있어?”

목운요의 목소리에 힘이 넘치는 걸 듣고, 선령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내가 정말 세게 때렸다면 넌 아마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을 거야. 그보다 어서 사실대로 말하기나 해. 도대체 왜 그런 건데?”

목운요에게 큰일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걱정이 앞서는 바람에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목운요와 월왕의 사이는 황제에게 이미 허락받은 걸로 아는데, 짧은 시간 안에 갑자기 황제의 마음이 바뀔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틀림없었다.

목운요가 선령한테 맞은 부위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폐하께서 우리 두 사람을 인정해 주시긴 했지만, 갑작스럽게 어명을 내렸다간 황실의 체면에 먹칠을 하게 될 수도 있어서 상의 끝에 이런 고육책을 생각해 낸 거야. 역시 우리 예상대로 백성들은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해 주고 있지.”

“그런 줄도 모르고 바로 궁으로 쳐들어갈 뻔했지 뭐야. 다행히 마지막 정신 줄을 잡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 벌써 황제한테 쫓기고 있었을 거야.”

목운요는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려 노력했다.

“……그래서 때리는 대로 맞은 거잖아. 이제 화가 좀 풀려? 약선골에는 잘 다녀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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