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허탈한 죽음
“이야기를 제법 그럴듯하게 지어냈군. 폐하와 장공주 전하의 사이가 얼마나 끈끈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황후의 아이가 황실 핏줄이 아님을 알면서도 장공주 전하께서 과연 폐하께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장공주는 말하지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황제를 원망했으니까! 정다운 오누이처럼 보이는 것도 전부 장공주가 일부러 만들어 낸 허상이지. 장공주는 자신의 남편을 죽게 만들고 딸을 잃게 한 황제를 증오했거든. 그리고 겉으론 황권에 욕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줄곧 조정을 자신의 손바닥에 넣으려고 애썼지. 월서로 간 월왕에게도 황제에 대한 미움과 불만을 키우게 했지. 그러면 다시 조정에 돌아왔을 때 황제를 무너뜨리고 황위에 오르려고 할 테니까!”
“상상력이 대단하구나.”
“전부 다 사실이야!”
소우의의 눈빛이 돌변했다.
“장공주가 폐하도 속이고 사람들도 다 속인 거야. 속이 가장 음흉한 사람이 천하의 존경과 옹호를 얻다니,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어딨을까?”
“그 입 다물어.”
목운요의 목소리가 극도로 차가웠다.
“감히 장공주 전하를 모함하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느냐?”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이 가장 진실인 법이지. 너야말로 깨닫지 못하고 고집부린다면 언젠가는 장공주의 야심에 이용당하고 말 거야.”
소우의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웃었지만, 알게 모르게 사람을 미혹시키려는 냄새가 풍겼다.
목운요는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은 다 끝난 건가?”
“내 말 안 믿어?”
“다른 사람이라면 죽기 전에 진실을 말할지 몰라도, 너는 죽기 직전까지 독극물을 내뿜을 인간이지. 소우의, 대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게냐? 천하의 여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졌으면 소씨 가문의 뒷받침이 없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넌 스스로 흙길을 선택했지. 그리고 결국 그 속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된 거고. 참으로 불쌍하단 말밖에.”
목운요가 동정의 눈빛으로 소우의를 흘끗 쳐다본 뒤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
“목운요, 너도 내 말에 흔들린 거잖아. 그토록 총명한 네가 장공주의 야망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 거짓에 동참해 황제를 속이고 월왕을 황위에 올린 다음 황후가 되려는 거잖아, 그렇지?”
목운요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표정이 좋지 않은 목운요를 보자, 금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저, 무슨 일인가요?”
“일단 옥화궁으로 돌아가요.”
목운요가 멀어진 걸 확인한 소우의가 고개를 돌려 침상 맞은편 벽을 바라보았다.
“시킨 대로 했어요. 약속한 일은 언제 해 주실 건가요?”
그에 벽에 세워져 있던 수납장이 살짝 움직이더니, 그 뒤에서 밀실 하나가 나타났다. 거기서 천천히 걸어 나온 진비가 몰골이 말이 아닌 소우의를 혐오의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걱정 마라.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소우의의 두 눈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언제 저를 궁 밖으로 내보내 줄 건가요?”
“내일 바로 보내 주마.”
진비가 대답하며 뒤따르던 궁녀 두 명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궁녀 두 명이 다가와 한 사람은 소우의의 다리를 힘껏 누르고, 한 사람은 소매에서 흰 천을 꺼내 소우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소우의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소우의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진비를 바라보았다.
분명 목운요한테 시킨 대로 말하고 진술서를 써 주기만 하면 궁 밖으로 보내 줄 거라 약속했는데, 왜 갑자기 말을 바꾼 거지?
진비는 그런 소우의를 향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 너를 궁 밖으로 보내 준다고 했으니 꼭 그렇게 하마. 다만 살아서가 아닐 뿐이지.”
소우의의 눈이 더욱 커졌다. 한때 부러움을 한 몸에 샀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섬뜩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결국 숨이 멎어 버렸다.
궁녀들은 재빨리 그녀의 옷가지를 정리한 뒤 대들보에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 * *
옥화궁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장공주를 찾아갔다.
허연한과 함께 있던 장공주는 표정이 심상치 않은 목운요를 보고 궁녀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요아, 안색이 영 안 좋구나. 혹시 냉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외할머니. 실은 소우의한테서 이상한 말을 들어 마음이 불안해서 찾아왔어요.”
“너를 불안하게 만들 정도라면 심상치 않은 말을 했나 보구나. 어디 외할머니한테 말해 보거라.”
목운요가 한참 고민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소우의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장공주는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장공주의 이토록 심각한 표정을 처음 본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장공주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전부 처리한 줄 알았는데, 결국 빠져나간 자가 있었다니……. 소씨 가문 노부인이 오랫동안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던 걸 보면, 아주 큰 걸 노렸던 게 분명하구나. 네가 소씨 가문을 궁지에 몰지 않았더라면, 그자가 이 비밀을 빌미로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을 게야.”
목운요는 생각보다 놀란 기색이 덜한 허연한을 향해 물었다.
“어머니께서도 월왕 전하의 출신에 대해 알고 계셨나요?”
허연한이 장공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외할머니께 들었었다. 너와 월왕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다고. 다만 월왕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목운요가 장공주의 손을 꼭 잡으며 낮은 소리를 냈다.
“외할머니. 소우의가 한 말이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의문이 가득합니다. 월왕 전하가…… 정말 폐하의 자식이 아닌가요?”
“그래.”
장공주는 진중한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황상께서는 군월을 친자식처럼 생각했고, 애초에 그 아이를 냉궁에 두거나 월서로 보낸 것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였지, 절대로 일부러 박대한 게 아니란다. 정으로 봤을 때 그 둘은 친부자지간이나 다름없다.”
“폐하께서도 월왕 전하의 출신에 대해 알고 계신 거군요.”
장공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무렴. 황후 위유와의 정이 그토록 깊은데 몰랐을 리가 없지.”
목운요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보다 소우의 머리로는 절대 방금 네가 한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거다.”
“그럼 누군가가 소우의한테 그 말을 하게끔 지시했다는 말씀인가요?”
“맞는지 아닌지는 소우의의 생사를 확인해 보면 알겠지.”
냉화궁에 확인하러 간 곡 마마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 아뢨다.
“장공주 전하. 소우의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합니다. 경부에 두 갈래 상흔이 있는 걸로 봐선,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한 후 매달린 것으로 보입니다.”
장공주가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내 예상이 맞았구나. 누군가가 손을 써서 너를 불러들인 다음 죽인 게 분명하다.”
“한데 왜 굳이 저를 불러다가 그런 말을 했을까요? 혹 경고를 주려는 걸까요?”
목운요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하지 말거라. 당분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내는 게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이다. 저들이 먼저 움직이도록 기다려 보자꾸나.”
장공주도 상대방의 의도가 잘 파악되지 않았다.
“내 평생 많은 사람들한테 빚을 지긴 했어도, 황상께만큼은 떳떳하단다. 황상도 쉽게 소인배의 말에 넘어가진 않을 거라 믿는다.”
목운요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외할머니. 한데 월왕 전하께 미리 말씀드려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가 소우의를 통해 저에게 알린 것을 보면, 필히 일을 더 크게 벌이려는 속셈입니다. 사야께서 갑작스레 진실을 알게 된다면 버텨 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공주는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요아, 외할머니가 아직은 너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 줄 수가 없구나. 다만 이 일은 황상께서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먼저 월왕 앞에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그러겠다고 약속하거라.”
“……네, 알겠어요.”
방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정신이 온통 딴 데 팔려 있었다.
그에 금란이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며 말을 건넸다.
“소저, 일찍 씻고 쉬세요.”
“고마워요. 두고 나가 봐요.”
“네.”
방에 혼자 남은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낮은 소리로 불렀다.
“유구, 거기 있느냐?”
잠시 후, 유구가 방에 나타났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오늘 냉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느냐?”
“소인은 늘 주인님 곁을 따라다녔습니다. 후궁은 다른 이의 감시하에 있으니 주인님께서 궁금하시다면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한번 알아보거라.”
외할머니의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보아,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소우의의 말에는 모든 죄를 외할머니한테 덮어씌우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배후에 얼마나 큰 음모가 있을지 모르니, 미리 알아보고 방비하는 게 좋을 것이리라.
초조한 마음으로 유구가 돌아오길 기다리는데, 머지않아 그가 나타나 아뢰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소우의를 시켜 주인님을 불러들이고 그런 말을 하게 한 배후는 셋째 황자의 생모인 진비였습니다.”
목운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눈에는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진비?”
셋째 황자가 이미 폐인이 된 마당에, 혼자 죽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려는 것인가?
“예. 그리고 제 귀비도 소우의의 죽음에 수상함을 느꼈지만 소문내지 않고 궁 밖에다 매장하라고 시켰답니다.”
목운요는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비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피고, 무슨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알리도록 하거라.”
지금이라도 수상함을 눈치채고 사람을 시켜 예의주시하면, 적어도 앞으로의 상황에 미리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짧게 답한 유구가 곧바로 방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