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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49화 (349/442)

349화 소우의와의 재회

“군월, 네가 그렇게 말하니 부담감이 더 커지는구나.”

“형님. 제가 한 말은 모두 진심입니다.”

유왕이 한참 침묵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우의 이 마음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마. 황후 마마의 사인 규명에는 나도 힘을 보탤 테니, 혹여나 누군가에 의해 누명이 씌워진 거라면 반드시 황후 마마의 명예를 다시 회복시켜 드리마.”

월왕이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럼 진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얼른 형수님을 재촉해 주십시오. 운요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통 놓아주질 않으시네요.”

궁 안에서 운요와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하다 보니, 마음속에 그리움이 사무치고 있었다.

유왕이 야유의 눈빛으로 월왕을 보다가 어깨를 힘껏 쳤다.

“아무리 그래도 황자인데, 남자다운 모습 좀 보여 주거라. 하루 종일 목운요 뒤만 졸졸 따라다니지 말고.”

“그러는 형님은요? 황자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으신가요?”

유왕이 냉큼 등허리를 꼿꼿이 피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때, 시녀가 다가와 아뢰었다.

“유왕 전하, 왕비님과 온한 군주께서 오십니다.”

유왕은 곧장 몸이 경직된 채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상처가 회복되기 전엔 움직이지 말랬더니, 통 말을 안 듣는군.”

민방화가 안으로 들어오자 유왕이 쏜살같이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방화, 몸은 좀 괜찮아졌느냐?”

“왕야께 걱정 끼쳐 드렸네요. 가벼운 찰과상이라 괜찮습니다.”

유왕의 성화에 못 이겨 벌써 며칠 동안 침상에 누워만 있었던 민방화는 목운요 덕분에 겨우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어김없이 잔소리하는 유왕에 민방화가 슬쩍 눈치를 주자, 그가 곧바로 조용해졌다.

“월왕 전하도 계셨군요.”

“둘째 형수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올린 월왕은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유왕을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소위 황자의 위엄이군.

유왕은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어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아우와 운요도 남아서 식사하고 가거라.”

민방화가 몰래 유왕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운요가 뒤뜰에 새로 심은 모란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거동이 불편하니 넷째 아우께서 운요와 함께 가 주시지요.”

그제야 유왕도 맞장구를 쳤다.

“네 형수 말이 맞다. 어서 가 보거라.”

월왕이 얼굴이 빨개진 목운요를 장난스레 바라보았다.

“그러죠. 마침 저도 꽃 구경이 하고 싶네요.”

“그래. 어서 가거라.”

목운요가 월왕을 따라 방을 나섰다. 몇 걸음 떼자마자 월왕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왔다.

“사야!”

목운요보다 한 걸음 앞에 있던 월왕이 고개를 돌리더니 잡은 손을 흔들거리며 물었다.

“요아, 무슨 일 있느냐?”

목운요가 그와 맞잡은 손을 가리켰다.

“예의를 지키셔야죠.”

월왕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을 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무 가냘프구나. 나한테 시집오면 통통하게 살이 오르게 해야겠군.”

그에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말솜씨가 점점 느시는군요. 혹시 저 몰래 다른 아가씨들한테도 그러시는 거 아니죠?”

월왕이 돌아서서 그녀의 코끝을 검지로 쓸어내리며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내가 다른 여인한테도 이러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아나요? 하루 종일 사야 뒤를 따라다니는 것도 아닌데 알 길이 없죠.”

“내 마음속에서 항상 날 따라다니잖느냐.”

순간 목운요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는 월왕의 마음속에 달달함이 벅차올랐다.

“나에게 꼬마 아가씨는 너 하나로 충분하다.”

그녀는 작년에 계례를 치뤘지만, 자신은 벌써 스물두 살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목운요는 영락없는 꼬마 아가씨였다.

이번에는 목운요가 서로 맞잡은 손을 흔들며 물었다.

“사야,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요아, 내가 너보다 나이가 한참 많구나.”

월왕은 속으로 탄식을 금치 못했다. 평생 혼자 살아가려고 마음먹었던 그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인에게 마음을 완전히 뺏길 줄이야.

“사야, 걱정 마세요. 그렇다고 싫어하진 않을 테니까요.”

목운요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화단에 도착하자 만개한 모란꽃이 두 사람을 반겼다.

“요황(姚黄) 모란이었네요!”

목운요가 모란꽃을 보고 기뻐하자, 월왕이 바로 한 송이를 꺾어다 그녀의 귀에 꽂아 주었다.

“사야, 이 꽃은 함부로 꺾으면 안 되는 귀한 거예요.”

이에 월왕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금빛 꽃가루와 매혹적인 향기, 미인의 머리에 꽂으니 온 세상이 열광하네……. 실로 귀한 꽃이로구나.”

월왕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목운요는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티 내고 싶진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린 목운요의 고운 목선이 활짝 핀 모란꽃과 어우러졌다.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 아름다움이었다.

“저 꽃이 사야를 열광하게 했나요?”

월왕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지금 이 순간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두 눈에는 목운요 외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요아…….”

월왕이 허리 숙여 천천히 그녀의 입술로 다가갔다. 입술이 맞닿은 순간, 머릿속에서 불꽃이 끊임없이 터지는 듯했다.

눈을 살며시 감은 목운요의 두 손은 월왕의 옷자락을 힘껏 잡고 있었다. 두 볼은 노을빛에 물든 듯 발그레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월왕은 욕심을 억누르며 잠깐의 입맞춤 뒤에 목운요를 와락 품에 안았다.

“요아, 이번 기회에 우리 혼사를 정했으면 한다.”

목운요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빨리 사야께 시집가고 싶어요.”

여인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삶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함께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인연이 닿은 이상 모든 걸 바쳐서라도 지켜 내고 싶었다.

* * *

그날 내내, 목운요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창밖 경치들도 여느 때와 달리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데 그때였다.

“소저, 냉화궁 궁녀가 왔는데 소우의가 소저를 뵙길 원한다고 합니다.”

목운요의 입가에 웃음기가 점차 사라졌다.

“소우의?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전해요.”

“네.”

한참 뒤, 금교가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소저, 궁녀가 말하길 소우의가 중요히 할 얘기가 있는데 월왕 전하와 연관된 일이라고 합니다.”

월왕?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문득 노부인 손 씨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소우의도 월왕의 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옷을 준비해 줘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죠.”

“냉화궁 호위들을 물리라 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일단 제 귀비께 소우의가 저를 만나려 한다고 전해 줘요. 아무래도 후궁을 관리하고 계시니, 미리 말해 두는 게 좋겠죠. 외할머니께는 내가 말씀드릴게요. 혹시라도 소우의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네.”

냉화궁은 황궁 서북쪽의 가장 구석진 데에 있었다. 오랫동안 빈터로 있다 보니 주변의 조경도 굉장히 투박했다.

문지기들이 목운요를 보자마자 곧바로 무릎 꿇고 인사 올렸다.

“온한 군주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소우의를 만나러 왔다.”

“제 귀비 마마께 들었습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방 안은 온통 어두컴컴했다.

소우의는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소우의, 왜 보자고 한 거지?”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보는 소우의의 혼탁한 두 눈이 순간 반짝였다.

“역시 왔구나. 월왕과 연관된 일이라고 하면 무조건 올 거라 예상했어.”

“말해. 대체 월왕 전하에 대해 뭘 알고 있다는 거지?”

“하하.”

소우의가 섬뜩하게 웃으며 물었다.

“대체 왜 월왕 전하를 이토록 신경 쓰는 거야? 그 당시 월왕은 가난한 황자에 불과했는데도, 넌 오라버니 대신 그자를 선택했어. 그땐 소씨 가문에 대한 원한도 없었을 텐데, 왜 앞날이 창창한 오라버니를 선택하지 않은 거지?”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 갔던 소청오란 이름에 목운요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

“난 처음부터 소씨 가문과 소청오를 증오했어.”

소우의가 피식 비웃더니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난 너무 후회가 돼. 어머니께서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나아가라고 했건만, 결국 그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은 바람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지.”

“네 하소연 들으러 온 게 아니다. 할 얘기 없으면 그만 갈게.”

“목운요, 그래도 한때 원수였던 내가 이토록 초라해졌으니 너도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빨리 가려고 안달 난 거야?”

“뭔가 오해했나 본데, 네 처지가 어떻든 난 전혀 관심이 없어. 지금 이 꼴은 더군다나 보고 싶지 않아.”

“하하하, 입이 참 독하구나.”

목운요를 흘겨보던 소우의의 입가에 수상한 미소가 걸렸다.

“조모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너와 만났으니, 뭔가 알아냈을 거라 믿어. 예를 들면 월왕과 황제 사이의 일이라거나.”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당황했구나?”

“처음부터 할 얘기가 없었군.”

목운요가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소우의가 다급히 말을 뱉었다.

“월왕은 황제의 친자식이 아니야!”

목운요가 발걸음을 멈춘 뒤 돌아섰다.

“헛소리하지 마.”

“연기 그만하지? 이곳엔 우리 둘밖에 없는데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야?”

소우의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와 낙곤이 사통할 때 장공주가 나서서 사실을 덮어 줬지. 황후는 피할 길이 없자 황자 열 명을 독살하고 그 죄명으로 냉궁에 보내진 거야. 마지막 살길을 위해 배 속 아이의 신분을 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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