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허락을 받다
침전에서 나온 장공주는 아무 말 없는 목운요를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요아, 무슨 일 있는 게냐? 혹시 오늘 일로 놀란 거니?”
목운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외할머니, 저와 사야도 최선을 다해 유왕 전하를 도울 겁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폐하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남해로 가서 여유를 즐길 거예요.”
장공주가 목운요의 손을 꼭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착한 우리 요아.”
옥화궁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장공주를 위해 심신 안정에 좋은 차를 내려 주고 방으로 돌아갔다.
금란이 따뜻한 물을 가져와 목운요의 세수를 도왔다.
“소저, 오늘 너무 힘드셨지요. 어서 쉬세요.”
“금란도 어서 쉬어요.”
침대에 누운 그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회귀하고 난 뒤 가장 우선시했던 것이 어머니와의 삶이었는데, 월왕을 만나고 어느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점점 더 다채로워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일 뿐, 다른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나랏일이든, 백성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재민들을 돕는 것도 실은 좋은 평판을 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오늘, 황위 계승 때문에 온갖 고민을 쏟는 황제를 보고 목운요는 자신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늦게 기상한 목운요는 얼른 씻고 정전으로 나갔다.
“외할머니, 편히 주무셨어요?”
“네가 많이 피곤할 것 같아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잘 잤느냐?”
“네. 그보다 폐하께…….”
“급할 거 없다. 곧 조회이니, 이따 천천히 가자꾸나.”
목운요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외할머니. 폐하께선 지금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이 상태로 조회에 나가시는 건 무리예요.”
“어쩔 수 없다. 어제 유왕의 혼례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조정의 모든 이들이 황상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단다. 그들을 안심시키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몸소 보여 줄 수밖에.”
목운요는 다시 한번 황제에 대한 경의가 생겨났다.
“그럼 전 약재 정리하러 다녀올게요. 전에 의술을 연구하다가 몸보신에 좋은 처방전을 찾아냈는데, 폐하께 지어 드리려고요.”
“그래, 가 보거라.”
* * *
대전에 도착한 목운요는 인사 올리자마자 들려오는 황제의 기침 소리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쿨럭쿨럭…… 일어나거라…….”
“폐하, 오늘은 좀 어떠십니까?”
“어제보다 훨씬 낫다. 그나저나 너야말로 안색이 좋지 않구나.”
황제가 붓을 내리며 무거운 어깨를 펴 보았다.
목운요는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제 피를 봐서 그런지 잠자리가 뒤숭숭했네요.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다. 나중에 많은 것을 겪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외할머니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시더라고요. 폐하, 일단 맥을 짚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맥을 짚어 본 목운요는 한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맥은 안정적이네요. 하지만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당분간 평온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문득 물음을 던졌다.
“운요, 군월과는 앞으로 어쩔 계획이냐?”
목운요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은 월왕 전하와 작년 가을 사냥에 나갔을 때 일 년 기약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 일 년 뒤에도 여전히 한결같으면 시집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 말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작년 가을 사냥이라면 구월이군. 두 사람이 벌써 평생을 약속한 사이인지 몰랐구나. 누님께서 아시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외외종조부께서 비밀을 지켜 주시면 되지요.”
“그래, 지켜 주마. 그나저나 구월이 코앞인데 혼인할 건가?”
목운요는 얼굴이 더 빨개졌다.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두 사람이 한 일 년 기약이 다가오고 있고 또 그때 마음 그대로이니 당연히 맺어 줘야지. 성격이 차가운 군월이 너를 만나 의지하는 모습을 보니 짐도 무척이나 기쁘다. 며칠 뒤 바로 어명을 내릴 테니, 흠천감(钦天监, 천문 등을 맡아 보던 관아)을 통해 좋은 날짜를 고른 다음 빠른 시일 내에 혼례를 치르려무나.”
* * *
대전에서 나온 목운요는 근처 정자에 잠깐 머물렀다. 말할 때 기력이 부족한 황제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침 황제에게 인사 올리고 나오던 월왕이 걱정스레 다가왔다.
“운요, 무슨 일이 있느냐?”
“사야, 오늘 폐하께서 저희에 대해 여쭈시길래 일 년 기약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빠른 시일 내에 혼례를 치르라고 하시더군요.”
월왕은 깜짝 놀라 하며 기뻐하다가 머지않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목운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야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신 거죠?”
황제가 급히 두 사람의 혼사를 치르려는 건, 자신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 하루라도 빨리 두 사람이 결실을 맺는 걸 보고 싶어서였다.
월왕이 슬픈 마음을 다잡으며 주먹을 쥐었다.
“요아, 난 너를 믿는다. 부황의 옥체가 회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거라.”
“네.”
목운요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오늘 전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린 월왕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제 일로 릉왕은 곧장 이씨 가문을 찾아갔다. 그리고 오늘, 유왕과 유왕비의 혼례 날에 황자 한 명이 죽고 월빈이 중상을 입었다며 불길한 혼사라는 유언비어가 순식간에 서릉에 퍼졌다는구나.”
월빈이 가짜 임신을 했다는 건 왕실의 체면과 연관되다 보니, 알려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진실을 모르는 백성들은 추측이 난무한 유언비어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씨 가문은 무슨 일이든 신속하며 결단력이 대단하죠. 유왕 전하께서 아무래도 큰 어려움을 겪겠네요.”
목운요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야, 제명은 이씨 가문에서 아직 믿음을 얻지 못하고 있어요. 이씨 가문의 사업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아무래도 저희가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일단 강남에 있는 이씨 가문의 양곡 산업을 가로막으라고 하마. 조정 분위기는 둘째 형님께서 충분히 장악하실 수 있을 것이다. 너도 고모님과 궁에서 지내는 동안, 이 귀비를 조심해야 해. 후궁에 오랫동안 있었던 자이니,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누구도 모른다.”
“네, 명심할게요.”
* * *
이틀 뒤, 금교가 다급히 와서 알렸다.
“소저, 방금 소우의의 봉호를 박탈하고 냉화궁에 연금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습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됐나요?”
“유왕 전하와 유왕비께서는 두둑한 상을 받으시고, 여전히 력양궁에서 머무르고 계십니다. 력양궁이 역대 태자들이 머물던 곳이니만큼 여러 곳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답니다. 한편 후궁을 새로이 맡게 된 제 귀비가 내무사 장부 조사를 시작하자, 당황한 이 귀비가 이씨 가문 사람을 궁으로 불러들였답니다.”
“내무사 장부?”
목운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 귀비도 궁에 오래 있은 만큼 절대 확신이 없는 일을 벌이진 않을 텐데……. 이 귀비가 이번에 제대로 당하겠군. 진비는요? 한동안 조용하군요.”
“진왕이 감금된 후부터 두문불출하며 매일 염불한다고 합니다. 어제 궁에 그리 큰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답니다.”
“진비답지 않은 행동이군요. 내버려 두죠. 그보다 폐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궁에서 좀 더 지내야 할 것 같아요. 육냥한테 소식 좀 전해 줘요. 하운방과 불선루를 잘 지켜보고 수상한 움직임이 있을 시 바로 궁으로 소식 보내라고요. 그리고 곧 옷 한 벌 지을 예정이니 미리 준비하라고 하운방에 말해 둬요.”
금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저, 또 무슨 옷을 만드시려는 건가요?”
목운요가 발그레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시집갈 때 입을 옷이요.”
금란이 잠깐 멍하니 있다가 크게 기뻐했다.
“소저, 드디어 월왕 전하와 혼인하시나요?!”
목운요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두 눈은 별이 쏟아지는 듯 반짝였다.
“네,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하께서 어명을 내리실 거예요.”
“너무 잘됐네요! 하운방에다가 가장 좋은 원단과 자수 실을 골라 두라고 당부해 둘게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혼례복을 만들 수 있도록 말이에요.”
“안 그래도 유왕비 혼례복을 만들면서 미리 생각해 둔 양식이 있어서, 다음에 도안을 그려 보려고요.”
“소인, 지금 바로 하운방에 가서 소식을 전할게요. 다들 엄청 기뻐할 거예요.”
“조심히 다녀와요.”
* * *
며칠간의 요양 덕분에, 황제도 점점 건강을 되찾아 갔다. 가슴을 졸이던 장공주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혼례복 도안을 완성한 목운요가 궁 밖에 다녀오려는데, 금교가 다급히 달려와 알렸다.
“소저, 관원들이 소저와 월왕 전하 두 분을 탄핵하는 글을 상주했다고 합니다…….”
목운요의 눈에 어두운 기색이 드리워졌다.
“이럴 날이 올 줄 알았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네요. 그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소저와 월왕 전하는 명백한 조카와 외당숙 사이라 윤리에 어긋난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요?”
“폐하께서 거들떠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원들이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아직도 폐하의 서재 앞에 남아 무릎 꿇고 있다네요.”
목운요가 약상자를 정리한 뒤 금교에게 건네며 말했다.
“폐하를 진맥하러 가죠.”
“소저, 이대로 가셨다가 그들과 맞닥뜨릴 수도 있어요. 소저께 모진 말을 퍼부을지도 모릅니다.”
목운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월왕 전하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이런 상황이 닥칠 걸 준비하고 있었어요. 관원들뿐만이 아닌 만천하의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한들, 뭐가 두렵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