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육낭의 상처
* * *
목운요가 깨어났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달콤한 휴식을 취한 느낌이었다.
“깼느냐?”
월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야?”
목운요는 순간 잠이 확 깨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가 잠들어 버렸네요.”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일찍 보냈어야 했는데.”
목운요는 월왕의 한쪽 어깨가 엄청 저릴 거란 생각에 살며시 그의 팔을 주물러 주었다.
“사야, 절 깨우시지 그랬어요.”
월왕은 가만히 목운요의 손길을 느끼며 눈웃음을 지었다.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생겼는데, 쉽게 놓칠 순 없지.”
목운요는 그의 대답에 마음이 달콤해졌다. 분위기도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
한편, 멀리 서 있던 우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우의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왜 그래?”
“그냥 주인님과 목 소저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니 괜히 내가 불쌍하단 생각이 들어서.”
“네가 그렇게 살아온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우항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우의가 그런 우항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니면 강남에 가서 진 총관님을 도울래? 나 혼자 여기 남을게.”
“됐거든.”
우항이 바로 거절하면서 물었다.
“그보다 성 공공을 도와 식사 준비하러 가야지?”
“성 공공은 내가 도움이 안 된다고 싫어해.”
우의가 신세 한탄하자 우항이 놀리듯 답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닐 텐데, 아직도 적응 못 한 거야?”
“꺼져!”
월왕을 뒤따라 앞마당으로 가던 목운요는 우항과 우의가 다투는 모습을 보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저 두 사람도 나이가 어리진 않죠?”
“그건 왜?”
“금란과 금교도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어서, 혹시 생각이 있다면 만남을 주선해 줄까 해서요.”
월왕이 의아해했다.
“갑자기?”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에요. 근래 꽤 많은 사람이 하운방과 불선루를 상대로 꿍꿍이를 벌이는 듯하더라고요. 특히 제가 직접 가르친 이들을 꾀어내려고 일부러 남정네들을 접근시킨다는데, 채의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저도 몰랐을 거예요.”
“그렇다면야 우항과 우의는 감지덕지지. 이 소식을 전해 주면 아주 좋아 죽을 것이다.”
“네. 하지만 저희는 주선만 할 뿐, 인연이 닿을지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거라 강요하면 안 돼요.”
금란과 금교는 자신의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해 왔기에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들의 의향과 상관없이 혼사를 정해 주는 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 * *
식사까지 마치고 장공주부로 돌아왔을 때 날이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금란이 알렸다.
“소저, 육냥이 왔습니다.”
“안으로 들여요.”
한데 방 안에 들어선 육냥의 팔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목운요는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주인님께 다가가려다가 누가 막아서는 바람에 살짝 베었습니다.”
육냥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표정이 평온했다.
목운요는 문득 그림자 호위가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유구.”
현재 다른 이들은 황제와 장공주, 그리고 허연한을 지키고 있어, 목운요의 곁을 지키는 자는 유구였다.
성격이 활달하여 목운요가 직접 지목한 것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그림자 하나가 순식간에 나타나 공손히 인사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육냥은 내 부하다. 앞으로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예.”
목운요는 자신의 사명을 지킨 것일 뿐인 유구에게 따로 처벌을 내릴 수가 없었다.
유구를 보낸 뒤, 그녀는 육냥을 한쪽 의자에 앉힌 다음 약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신이 없다 보니 유구한테 미리 말해 두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미안한 얼굴로 상처를 치료해 주는 목운요에 육냥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소인, 어찌 감히 주인님께 이런 누를…….”
그에 목운요가 잠시 손을 멈추더니 천천히 눈을 들어 육냥을 바라보았다.
호수처럼 맑은 두 눈을 본 육냥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등 뒤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목운요가 동작을 멈추고 금란을 불렀다.
“금란, 육냥의 상처를 치료해 줘요.”
“네, 소저.”
뜨거운 용암이 솟구치는 것만 같았던 육냥의 마음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식어 버렸다.
금란이 상처에 붕대를 감아 주고 나가자, 육냥이 바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일어나거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처벌이라니?”
목운요가 타일렀다.
“의사 노릇을 오래 했더니 남녀의 규율을 크게 신경 안 쓰게 됐구나. 나는 괜찮지만 네가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 못 했다.”
육냥은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는 바람에 입만 뻥긋하고 말았다. 가까이하고 싶으나 자신의 찬 바람에 눈앞의 따스함이 꺼져 버릴까 봐 두려운 심정이었다…….
“육냥?”
목운요가 부르는 소리에도 육냥은 멍하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왜 그러느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육냥이 연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너…….”
워낙 과묵한 육냥이다 보니 목운요는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그보다 이리 급히 찾아온 이유가 뭐지?”
“제명이 이씨 가문과 접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만 아직 깊이 들어가진 못했고 승상 이경주도 그를 완전히 신임하지 않을뿐더러 몰래 제명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목운요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미리 꾸며 두긴 했지만 가짜는 언젠간 드러나는 법이라 걱정되는군.”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요?”
“지금 진왕이 몰락했으니 이씨 가문에서 작정하고 조사한다면 분명 뭔가 알아낼 텐데. 이씨 가문의 사업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느냐?”
“대외적으로 알려진 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몇몇 농가와 가게가 있고, 강남에서 곡식 장사를 하는 것 외에는 딱히 없었습니다.”
“강남에서?”
“네. 가게를 운영하는 건 아니고, 주로 흑룡성과 천수성 일대를 오가며 행상을 하는데 규모가 꽤 큰가 봅니다. 임강성 수재 당시 자발적으로 곡식 운송까지 해 평판이 꽤 좋습니다.”
목운요가 생각에 잠겼다.
“강남에 있으면서 흑룡성과 천수성을 오가다니……. 아무래도 뭔가 수상한 것 같으니 사람을 시켜 알아보거라. 그리고 제명에게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라 전하고. 이씨 가문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도록 내가 손을 쓸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목운요가 육냥의 팔을 보며 말했다.
“다쳤으니 한동안은 푹 쉬거라.”
“괜찮습니다.”
짧게 답한 육냥이 곧장 방에서 나갔다.
머지않아 금란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소저, 육냥이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아요. 토라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요. 약을 가져다주면서 며칠 동안 푹 쉬라고 전해 줘요. 급한 일은 유구한테 맡기면 되니까.”
“네.”
제명에게 소식을 전하고 돌아온 육냥은 탁자 위에 놓인 약을 보고 표정이 밝아졌다.
그때,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유구가 창턱에 걸터앉았다.
“육냥. 네 무술 실력이 그리 나쁘진 않지만 너무 틀에 박혀 있어, 자객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혹시 그림자 호위에 가입할 생각이 없느냐?”
육냥이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인님이 보내신 거냐?”
“아니. 훈련받으면 꽤 쓸모 있을 것 같아서 제안하는 거야. 주인님 곁에 오래도록 있고 싶지 않느냐?”
육냥은 약을 챙기며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오거라.”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육냥을 보더니 휙 하고 사라졌다.
약병을 꽉 잡은 육냥의 눈빛이 점점 아득해져 갔다. 주인님의 곁에 그림자 호위까지 있으니 자신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 * *
유왕과 민방화의 혼삿날이 점점 다가오자, 황제는 장공주를 궁으로 불렀다.
“황상을 뵙습니다.”
“누님, 예를 거두십시오.”
상주서를 검토 중이던 그는 장공주를 보자 붓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유왕의 혼사를 궁에서 치를까 합니다.”
황제와 마주 앉은 장공주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의 이 결정이 유왕에게 얼마나 큰 골칫거리를 가져다줄지 알고 계시는지요.”
“잘 압니다. 하지만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이번에 군진을 가두면서 비로소 이씨 가문의 세력이 이토록 강대해졌음을 알아차렸지요. 조정의 반 이상이 이씨 가문의 편에 서 있더군요……. 군월한테 빚을 많이 져서 그를 방패막이로 쓸 수는 없으니, 군유를 내세울 수밖에.”
“위국후께선 평생 황실에 충성을 다하셨습니다. 황상께서도 부디 대국을 고려해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짐이 위국후를 불러 미리 잘 말해 두겠습니다. 그분께서도 짐의 어려움을 이해해 줄 거라 믿습니다.”
황제가 무거운 마음으로 말하자, 생각에 잠겨 있던 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폐하. 군월과 운요, 두 아이 모두 총명하고 예리하여 군유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누님의 뜻인즉 월왕을 군유의 무기로 쓰라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성격이 냉철하고 과감한 군월이 무기로 제격이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군유와 군월 두 사람이 어려서부터 사이가 돈독하니 대력조를 오래도록 이끌어 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황제는 걱정이 앞섰다.
“황위란 쉽게 사람을 바꿔 놓는 법이지요. 군유가 이 자리에 올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되면, 두 사람 모두 다칠 수도 있습니다.”
“폐하, 자식들을 믿어야 합니다. 둘 다 본성이 착한 아이들이라 매사에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황제가 한참 침묵하고 나서야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