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민 소저와의 만남
진왕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다가 찻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쨍그랑하고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목운요는 황급히 궁녀를 불러 진왕의 젖은 옷을 갈아입히게 했다.
그사이 목운요와 월왕이 밖으로 나가자, 진왕은 젖은 옷을 닦아 주던 궁녀를 밀치며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나가!”
궁녀가 겁에 질려 무릎을 꿇었다.
“고정하십시오, 전하.”
“나가, 전부 다 나가!”
진왕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화를 쏟아 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진왕이 분노를 터트리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마침 산산조각 난 찻잔 위에 넘어지는 바람에 깨진 조각이 손바닥을 찔러 순식간에 피가 쏟아져 나왔다.
궁녀가 하얗게 질린 채 외쳤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여봐라, 온한 군주와 태의를 부르거라!”
소식을 들은 목운요가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진왕은 고개를 떨군 채 침상에 기대앉아 있었고, 손에서는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상처를 동여매게 약상자를 가져오너라.”
그에 진왕이 입을 열었다.
“운요, 날 그냥 내버려 두거라. 불구가 된 마당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다.”
목운요가 무표정으로 답했다.
“폐하의 어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겁니다. 전하가 죽든 살든 전 관심 없습니다.”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이토록 독한 마음을 가졌는지 처음 알았구나.”
목운요가 고개를 들어 진왕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제일 잘 아실 텐데요? 독한 마음 없인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요. 다른 사람보다 잘 살려면 마음도 더 독하게 먹어야 하고요.”
이 도리는 회귀 전 진왕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피 흘리던 진왕의 손에 순식간에 붕대가 감겼다.
“당분간 물에 닿지 않게 주의하면 금방 나을 겁니다.”
월왕이 목운요에게서 약상자를 건네받으며 차가운 눈으로 진왕을 쏘아보았다.
“형님, 앞으로 무슨 일이든 궁녀한테 시키십시오.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진왕이 붕대를 감은 손을 소매 안으로 숨기며 힘껏 주먹을 쥐었다. 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자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모든 걸 잃은 지금, 겨우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았으니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의 곁에 두고 말 것이다…….
* * *
다음 날, 유왕이 소식을 전해 왔다. 이튿날 민 소저와 함께 하운방에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황제로부터 승낙까지 받고 나서야 목운요는 간단하게 짐을 싼 뒤, 금란과 금교를 데리고 궁을 나섰다.
월왕과 함께 마차에 탄 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계속 감상했다. 월왕이 이를 보더니 제안 하나를 건넸다.
“요아, 내려서 걸을까?”
“좋아요.”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해 질 무렵이라 서쪽이 노을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목운요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궁에서 한동안 지내다 보니 궁이 얼마나 좁고 답답한 곳인지 알 것 같네요. 한평생을 그 속에서 지내신 폐하가 안쓰럽게 느껴져요.”
월왕이 목운요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요아, 둘째 형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줄까 해.”
목운요는 예상이라도 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야께서 황위에 마음이 없으시니, 유왕 전하가 가장 적합한 후보인 셈이지요.”
“형님께서 등극하시면 우린 금수원에 가서 살자꾸나. 고모님과 부인을 모시고 같이 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 좋습니다.”
* * *
이튿날, 목운요는 드디어 민 소저를 만나게 되었다.
우아하고 품위 넘치는 자태에, 은쟁반 같은 얼굴을 한 그녀는 시종일관 옅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눈에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민방화는 목운요를 보자마자 더 환하게 웃으며 무릎을 꿇어 인사 올렸다.
“민씨 방화, 온한 군주를 뵙습니다.”
유왕과 약혼한 사이지만 아직 혼례를 치르기 전이라, 목운요에게 먼저 인사하는 게 당연했다.
목운요는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방화 언니, 예를 거두세요.”
언니라는 호칭에 민방화는 내심 기뻐했다.
“군주에 대해 익히 들었지만 부모님이 엄격하신 탓에 단둘이 만나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렇게라도 만나 뵈니 너무 기쁘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유왕 전하로부터 혼례복을 부탁받아 최고급 원단과 실을 준비해 뒀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걸 골라 주시면 혼사 당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민방화는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실은 제가 유독 바느질에 약해요. 한데 군주께선 자수법을 널리 알렸을 뿐 아니라 하운방까지 훌륭하게 운영하시고 계셔서 진심으로 부러웠답니다.”
“과찬이십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각양각색의 원단이 놓여 있었다.
민방화는 놀란 표정으로 원단과 비단실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제 눈에는 다 똑같이 예뻐서 도저히 고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군주께서 제게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주시지요.”
목운요는 속으로 감탄했다. 유왕이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남달랐다.
“그렇다면 제 의견을 말씀드릴게요. 두 분의 혼례는 두 달 뒤로 그땐 아직 날씨가 더울 때지요. 게다가 언니께서 왕비 신분이다 보니 여러 벌 겹쳐 입으면 무게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얇고 가벼운 주단 원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민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군주 의견대로 합시다. 솔직히 직접 바느질하지 않고 혼례복이 준비되는 것만으로도 너무 만족스러워요.”
작게 웃은 목운요는 직접 민방화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치수를 모두 잰 후엔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에 몇 차례 하운방에 와서 옷을 확인해 보시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 수정해야 할 거예요.”
“그래요.”
민방화의 시원시원한 웃음이 그녀를 더욱 온순하고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오늘 군주와의 첫 만남이지만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아 너무 기쁘네요. 유왕 전하께 전해 듣길 군주께선 요즘 의술 연구에 몰두 중이시라더군요. 마침 민부에 꽤 많은 의서를 소장 중이니, 유왕 전하에게 군주께 가져다드리라 할게요.”
“감사합니다. 민 각로께서 글을 좋아하셔서 민부에는 진귀한 서적이 많다 들었습니다. 서적 한 권을 얻기 위해 큰돈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하니, 빌려서 읽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아니에요. 조부께서 평소에는 엄청 무서운 분이시지만 유독 손녀인 저한테는 꼼짝 못 하시거든요. 보고 싶은 책이 있거든 말만 하면 다 찾아 줄 수 있어요.”
목운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목록을 써서 드릴 테니 언니께서 시간 되시면 찾아봐 주세요.”
“걱정 말아요.”
서로에 대한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만나서 그런지, 첫 만남부터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웃음꽃을 피웠다.
이에 함께 온 유왕과 월왕은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되었다.
유왕이 텅 빈 찻주전자를 흔들더니 한쪽에 서 있던 채의한테 분부했다.
“차를 더 내오거라.”
한데 그때, 월왕이 유왕을 막아섰다.
“하운방 찻잎은 엄청 고가입니다.”
이렇게 냉수 마시듯 마시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고작 찻잎을 이리도 아까워하다니, 설마 이 형님이 찻잎보다도 못한 것이냐?”
유왕은 순간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오랜만에 민방화와 함께 밖에 나왔건만, 그녀는 자신이 아닌 목운요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고, 아우란 놈은 찻값이나 따지다니.
하지만 월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채의를 향해 말했다.
“차 말고 따뜻한 물을 내오거라.”
“넷째 아우, 아주 나쁜 것만 배웠구만.”
유왕이 헛웃음을 터트리다 두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민방화의 털털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속 얘기까지 다 털어놓을 만한 사람은 더욱이 없었다.
한데 목운요와 민방화가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주제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가자 괜스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시녀의 귀띔 끝에 민방화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운요, 나중에 궁에서 나오게 되면 꼭 알려 줘요. 장공주부로 놀러 갈게요.”
그에 유왕이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운요는 앞으로 한동안 궁에서 지낼 예정입니다. 궁에서 나올 때쯤이면 우리가 혼례를 마친 뒤일 테니, 그때 같이 고모님을 뵈러 가시죠.”
유왕의 다정한 말에, 민방화의 표정에서 쑥스러움이 묻어났다.
“좋아요.”
그런 그녀를 보자 오후 내내 불평했던 유왕의 마음도 금세 밝아졌다.
그렇게 유왕은 민방화와 함께 하운방을 떠났다.
월왕이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민 소저와 말이 잘 통하나 본데?”
“네.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평생을 함께 지낸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사이가 있는 반면,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십여 년을 알고 지낸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민방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독 낭자에게도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왠지 두 사람이 아주 잘 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