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36화 (336/442)

336화 질투

곧 월왕이 들어와 공손히 인사 올렸다.

“부황. 셋째 형님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소자, 마침 한동안 시간이 비었으니 운요와 함께 형님을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귀비와 진비는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월왕과 목운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폐하 앞에서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친밀함을 드러내다니. 실로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목운요를 보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떻느냐?”

“운요, 폐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짐이 사건 조사를 마치기 전까지 두 사람이 군진을 돌보도록 하여라.”

“예.”

이 귀비와 진비는 내심 놀랐다. 폐하께서 순순히 승낙해 주시다니. 설마…… 이미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었던 걸까?

* * *

모두가 돌아가자 중화궁이 다시 조용해졌다.

목운요는 한쪽에 서 있는 궁녀들한테 나가라고 손짓했다.

두 궁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군주,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저희가 대신 하겠습니다.”

목운요가 의자에 앉으며 냉소를 지었다.

“두 사람 모두 진비 마마께서 보내셨지? 진비 마마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감히 내 말을 거역하다니.”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두 사람 다 진비 마마께 돌려보내기 전에 얼른 물러가거라.”

“예.”

두 궁녀가 머뭇거리다 결국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월왕은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는 진왕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진왕이 얼굴을 월왕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넷째 아우냐?”

“감이 좋으시군요.”

“운요의 발걸음 소리를 알고 있거든. 전에는 몰랐는데, 앞이 안 보이니 마음이 유난히 맑아진 듯하구나. 왜 여태껏 자네를 소홀히 대했는지 후회가 돼.”

월왕이 냉랭하게 답했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해, 그게 거짓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요.”

“자네 말이 맞아.”

진왕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궁녀들을 전부 내보낸 걸 보니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진왕 전하, 사실 눈 쪽에 고여 있던 독이 제대로 해독되지 않아, 아무래도 시력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을 듯합니다.”

진왕은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참 후에야 그의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그래, 아쉽구나. 황위 쟁탈에서 실패해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말은 예상해 보았지만, 이렇게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거든.”

“인과응보의 참뜻을 몸소 겪으신 거지요.”

진왕이 목운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요. 이렇게 된 마당에 대체 왜 나를 그토록 미워하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물론 내가 소씨 가문의 말에 혹해 그들 편을 들어 준 적이 있었지. 하지만 나중에 네 신분을 알고 난 후에는 맹세코 너에게 불리한 짓을 한 적이 없다.”

목운요는 시종일관 눈을 아래로 뜨고 있었다. 깃털 같은 속눈썹에 눈빛이 가려져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글쎄요. 그나저나 제가 전하께 악감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를 곁에 두시다니, 참으로 놀랍군요. 혹시 폐하 때문에 제가 아무 짓도 못 할 거라 생각하신 건가요?”

“네가 무슨 일을 벌이면 분명 부황께서 바로 알아차리실 거야. 게다가 넌 내가 좀 더 고통 속에서 살아가길 원할 테니 날 없애려고 하지 않겠지.”

목운요가 입가에 비소를 걸었다.

“역시 총명하시네요.”

* * *

방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진왕의 진영이 불과 며칠 사이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월왕은 진왕의 인맥 정리에 나섰고, 릉왕도 진왕의 편에 섰던 관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 자신의 의술에 한계를 느낀 목운요는 맘 편히 의술 연구에 몰두했다. 의술에 대해 알아 갈수록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월왕도 이 상황을 즐겼다. 곁에서 목운요를 하루 종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가끔 그녀를 도와 먹을 갈고 책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목운요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알면 전하께서 여인 뒤꽁무니나 쫓아다닌다며 비웃을 거예요.”

하지만 월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외려 그는 탁자 하나를 들여온 다음, 그림 그리는 것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다. 목운요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림이 완성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수려함이 물씬 풍겼고 인물이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우리가 부러워서 그러는 게지.”

목운요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입꼬리가 올라가게 했다.

한편, 침대에 기대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왕의 두 눈은 막연함으로 가득 찼다.

월왕과 목운요가 곁에서 간호한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도 처음의 분노로부터 마음이 많이 평온해졌고, 심지어 지금은 두 사람이 부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월왕 대신 자신을 대입해 보기도 했다.

목운요가 즐거이 이야기할 때마다,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진왕의 온통 어둠뿐인 세상에 금빛을 뿌려 안정을 가져다준 것이다.

* * *

강남 강둑 공사가 끝난 후, 유왕과 제운이 함께 귀경했다.

유왕은 황제와 제 귀비에게 인사드린 다음, 곧장 중화궁으로 찾아왔다.

차를 마시고 있던 월왕과 목운요가 유왕의 방문을 반겼다.

“둘째 형님, 강남의 일은 잘 처리되었나요?”

무사히 돌아온 유왕을 보자 월왕의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목운요는 방금 우린 차를 유왕 앞으로 건넸다.

“차 한잔하세요.”

“그래.”

유왕이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아 있는 진왕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를 눈치챈 진왕은 손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형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시니 저도 참 기쁩니다.”

유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한동안 못 봤더니, 셋째 아우가 참 많이 달라졌군.”

유왕은 사람의 속내를 잘 꿰뚫었다. 예전의 진왕에겐 온화한 웃음 뒤에 짜증과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전과 달리 평온함이 느껴져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많은 일을 겪다 보면 변하기 마련이지요. 게다가 계속 살아가려면 생각을 바꿀 필요도 있고요.”

유왕이 그런 진왕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잃고 나서 큰 깨달음을 얻은 거라면 형님으로서 축하해 주고 싶군. 한평생을 살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진왕이 찻잔을 들더니 목운요를 향해 말했다.

“운요, 찻잔이 식었구나. 새 걸로 바꿔 주겠느냐?”

“잠시만 기다리세요.”

목운요가 진왕의 손에서 찻잔을 건네받은 다음 새 걸로 바꿔 주었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찻잔을 받던 진왕의 손이 목운요의 손가락을 살짝 스쳤다. 순간 따뜻함이 온몸에 퍼지면서 아쉬움이 마음 가득 남았다.

진왕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에선 항상 목운요를 경계하라고 다그치지만, 마음은 저도 모르게 목운요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었다.

어쩌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온통 어두운 세상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게 목운요의 목소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력을 잃은 뒤 청력으로 사람을 구분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더없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반면 아무리 시끌벅적한 상황에서도 목운요만 나타나면 그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운요가 찻잔을 건넨 다음 뒤로 물러섰다.

월왕이 목운요의 손을 잡아당기며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었다.

“운요, 나도 다예가 배우고 싶어졌구나. 시간 날 때 가르쳐 주면 나중에 내가 차를 내려 주마.”

“좋아요.”

유왕이 찻잔을 비우며 말했다.

“부황께서 두 사람을 인정하셨다니 나도 참으로 기쁘구나. 두 사람이 혼례 올릴 때 아주 후한 선물을 주마.”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목운요와 달리, 월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나저나 늘 우는 소리만 늘어놓던 형님께서 웬일로 이리 대범해지신 거죠?”

유왕이 두 손을 맞대고 비비더니 멋쩍은 듯 목운요를 향해 웃었다.

“실은 운요한테 부탁할 일이 좀 있거든.”

“유왕 전하, 편히 말씀하십시오.”

“사실 방화와의 혼인이 코앞이라 부황께 혼례를 크게 치르고 싶다고 청했지. 그런데 내무사에서 준비한 혼례복을 봤더니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구나. 그래서 그런데, 방화의 혼례복을 네가 맡아 줄 수 있겠느냐?”

목운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운방에서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다만 혼례복은 원래 신부가 직접 수를 놓아 만드는 터라, 민 소저와 제대로 상의해 보셔야 합니다.”

“방화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는 반면 자수에는 유독 소질이 없단다. 혼례복도 마지막에 몇 침만 수놓아서 만들려던 참이었는데, 하운방에서 만들어 주기로 했다고 하면 당연히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할 것이다.”

“그럼 민 소저께 날 잡아서 하운방에 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아무래도 혼례복이니만큼 제가 직접 치수를 재서 만드는 게 마음이 놓이거든요. 전하 생각은 어떠세요?”

“그래야지. 안 그래도 방화가 너를 만나 보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었다.”

유왕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가 월왕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넷째 아우, 이번에 운요 신세를 좀 지겠네. 이 은혜를 깊이 새길 테니, 나중에 나와 방화의 도움이 필요할 때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지.”

사실 장공주의 손녀 신분을 얻은 후부터 목운요는 하운방에 지시만 했지, 직접 나서서 옷을 만드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번에 혼례복을 만들어 주기로 한 것도 유왕을 봐서 승낙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월왕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나중에 형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주저 없이 얘기할 테니,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

“당연하지. 나는 지금 바로 방화한테 이 좋은 소식을 알리러 가마.”

“예. 다녀오세요.”

유왕이 떠나자, 진왕은 뜨거운 찻잔을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부황께 벌써 승낙을 받은 모양이군. 축하하네, 아우.”

“감사합니다.”

힘을 주어 새하얘진 진왕의 손을 본 월왕의 눈빛에서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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