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35화 (335/442)

335화 선의의 거짓말

“내가 마음을 비웠으니까.”

목운요가 상대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이유는 한씨 가문 일가를 모조리 죽였으나, 네 마음속에 한씨 가문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야. 내가 진왕을 죽도록 미워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을 걸기엔 너무 아깝거든.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독 낭자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네가 이런 진지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얼마나 얄미운지 몰라. 내가 장공주 전하의 곁에 남게 되거든 절대 날 잡지 마.”

“안 잡을 테니 걱정 마.”

“내가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전혀 붙잡을 마음도 없다니.”

“그럼 붙잡는 말 몇 마디라도 해 줄까?”

“흥, 역시 날 못 보낼 줄 알았어. 하지만 난 이미 장공주 전하의 곁에 남기로 결정했으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목운요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붙잡지 않는 게 좋겠군.”

“양심 없는 년…….”

금란과 금교의 도움을 받아 독 낭자를 방에 눕힌 뒤, 목운요가 촛불을 바라보았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잘 지켜요.”

독 낭자는 지하 감옥에서 오랜 시간 갇혀 있던 탓에, 어둠을 극도로 싫어했다. 심지어 밤에도 꼭 촛불을 켜 둬야만 잠들 수 있었다.

목운요가 나가자 독 낭자가 눈을 번쩍 뜨더니 활활 타오르는 촛불을 보며 중얼거렸다.

“양심 없는 년…….”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독 낭자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손으로 연신 두드렸다.

그러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쳐다봤다가 숨이 넘어갈 뻔했다.

다름 아닌 눈여우가 독 낭자의 가슴팍에 엎드린 채 꼬리 끝을 살랑살랑 흔들며 독 낭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몸이 굳어 버린 독 낭자는 애써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그때, 구세주처럼 목운요가 나타났다.

“답설이 너랑 친해지고 싶나 봐.”

목운요가 웃음을 참으며 눈여우를 들어 올려 귀를 만지작거렸다.

독 낭자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금란과 금교가 약재를 한가득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자, 독 낭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전부 네가 준비한 것들이야?”

“물론이지. 왜?”

독 낭자가 침상에서 일어서며 약재들을 살폈다.

“흔치 않은 약재들이군. 모으느라 꽤 시간 걸렸겠네?”

“널 만나고 나서 바로 사람을 시켜 준비했지. 다행히 하운방과 불선루 점포가 여러 군데에 분포되어 있어, 생각보다 쉽게 구했어.”

독 낭자가 한참을 침묵하더니 불안한 눈빛으로 목운요를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전생에서도 용모를 회복했니?”

많은 일을 겪다 보니, 그녀도 어느샌가 목운요가 말하는 전생을 믿기 시작했다.

목운요가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독 낭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웃어 보였다.

“그래. 한씨 가문을 저세상으로 보내 버렸으니, 더 이상 마음에 둘 필요가 없지. 용모가 회복되면 바로 약선골에 다녀올 거야. 참, 혹시 내가 이전에도 약선골로 돌아갔어?”

“약선골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까지 만났어. 두 사람이 몇 년 동안 지지고 볶고 하다가, 나중엔 아들딸을 각각 한 명씩 입양했지. 애들이 얼마나 귀엽고 똑똑하던지. 내가 대모가 되어 주었지.”

목운요가 그리움에 젖은 듯 웃으며 회상했다.

독 낭자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얘기를 목운요한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입양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독 낭자는 그녀의 말을 완벽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목운요가 약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 좀 먹은 다음 이 약재들을 처리해야겠어. 의술은 네가 뛰어나니 난 옆에서 심부름이나 할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준비해 줄게.”

“……그래.”

목운요가 웃으면서 독 낭자의 방을 나왔다.

사실 회귀 전엔 잔혹하게 죽는 바람에 독 낭자가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독 낭자가 드디어 제 말을 믿기 시작했으니, 이때다 싶어 희망의 씨앗을 품게 하였다. 어찌 됐든 과거에 머무른 채 갇혀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가끔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길 바랄 때가 있다. 독 낭자를 진흙탕에서 빼내 줄 기회가 생긴 이상, 거짓말을 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방에 돌아오자 궁녀가 와서 알렸다.

“군주. 누군가가 진왕께 일부러 독을 먹였다며 진비 마마께서 중화궁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 이 귀비 등께서도 그리로 가고 있다 합니다. 폐하께서 군주도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가마.”

* * *

중화궁 내, 진비가 바닥에 꿇어앉은 채 눈물 흘리면서 하소연했다.

“폐하. 군진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대가를 치른 셈인데, 대체 누가 앙심을 품고 그 아이를 죽이려 한단 말입니까?”

한쪽에 서 있던 이 귀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동생. 진왕이 이런 일을 당해 본 궁도 마음이 아프다만, 그렇다고 함부로 말하는 건 아닌 듯해. 진왕 곁에는 늘 태의가 지키고 있었는데, 과연 누가 독을 쓸 만큼 대담하단 말인가.”

그에 진비가 고개를 들더니 이 귀비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럼 진왕이 스스로 음독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이 귀비의 말씀이 썩 듣기 좋진 않네요.”

황제가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다들 그만하거라. 해독할 때 들었다시피 백박산이라는 흔치 않은 독약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런 독약이 어찌 황궁에 나타난 것이냐?”

“폐하. 군진이 사고당하기 전 릉왕 전하께서 보러 온 적이 있습니다…….”

“진비, 말조심하게!”

이 귀비가 버럭 화를 냈다.

“릉왕은 아우의 안위가 걱정돼 병문안 온 것일 뿐인데, 지금 릉왕한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건가?”

“어려서부터 릉왕이 군진을 업신여기고 골탕 먹인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요. 심지어 한겨울에 연못으로 밀기까지 했으니, 군진이 운이 좋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커서도 릉왕은 어김없이 군진을 이기려고 애썼지요. 제가 봤을 땐 병문안이 아니라 분명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예요!”

이 귀비가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슬 퍼렇게 말했다.

“당장 증거를 내놓게. 증거가 없으면 오늘 자네를 모함죄로 벌할 것이야!”

이에 진비가 슬피 울기 시작했다.

“폐하. 군진을 위해 시비를 가려 주십시오.”

마침 안으로 들어온 목운요는 상황이 심각해 보이자 조용히 구석에 가서 섰다.

진비의 눈물에 황제는 미간을 힘껏 찌푸렸다.

“다들 입 다물라! 짐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이만 가거라.”

“폐하. 저는 남아서 군진을 보살필 것입니다. 또 누가 몰래 해칠지 모르잖습니까?”

진비가 말하면서 이 귀비를 쳐다보았다.

이 귀비는 거만한 표정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진왕을 훑어보았다.

불구가 된 진왕을 과연 누가 거들떠보기라도 할까?

분위기가 싸해진 그때, 진왕이 시녀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 앉았다.

“운요가 왔구나.”

목운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면서 인사도 올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지?

진비도 놀라서 소리 질렀다.

“군진, 눈이 보이는 거니?”

진왕이 고개를 저었다. 해독한 지 얼마 안 돼서인지 안색이 전보다 훨씬 창백했다. 며칠 사이 눈에 띄게 몸이 삐쩍 말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했다.

“아니요. 은방울 소리를 들어서요.”

진비가 입을 틀어막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진왕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황, 귀비 마마. 모비께서 너무 상심한 나머지 근거 없는 말씀을 하셨네요. 형님께서 그날 제 병문안을 온 건 맞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부황과 귀비 마마께서 모비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제야 황제의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군진, 맘 편히 몸을 추스르거라. 짐이 사실을 제대로 조사할 것이다. 앞으로 태의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옆을 지키고 있을 테니 다신 그런 일 없을 것이다.”

“네.”

월왕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진비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저는 태의들의 의술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군진을 봐서라도 온한 군주가 도움을 주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목운요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 귀비가 먼저 비웃듯이 말했다.

“진비,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온한 군주는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인 데다, 장공주 전하의 외손녀이네. 외당숙인 진왕을 보살핀다고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그대가 책임질 건가? 참 이기적이군.”

진비가 괘씸한 듯 이 귀비를 노려보았다.

“자고로 의원에게 있어 환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뿐이지요. 운요가 여인의 몸이긴 하나, 환자인 진왕을 돌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들만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겠지요.”

그때, 진왕이 몸을 일으키려고 아등바등했다. 하나 결국 실패하자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부황, 이제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 그만 진왕부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군진, 지금 제정신인 게냐? 황궁 안에서도 누군가가 너를 독해하려 했는데, 진왕부로 돌아가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모비는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두 분께 걱정만 끼쳐 드리는 이 못난 아들은 죽어도 그만이지요.”

“어찌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그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는 목운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운요, 궁에 머물 때까지만 진왕을 보살펴 주는 게 어떻겠느냐? 짐이 이번 사건을 제대로 조사한 다음-”

그 순간, 내시가 들어와 알렸다.

“폐하, 월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월왕이?”

목운요를 쳐다보던 황제는 문득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렸다. 확실히, 나중에 월왕과 혼인하게 되면 제수씨가 아주버님을 보살피는 격이라, 썩 보기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안으로 들이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