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독 낭자의 승낙
독 낭자는 목운요를 뒤로 잡아당기며 황제한테 보고했다.
“폐하, 진왕 전하께서 해독되신 듯합니다. 한동안 태의들께서 몸조리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온한 군주께선 침을 놓느라 많이 피곤하신 상태이니,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계속 붙잡혀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황제가 얼굴이 창백해진 목운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서립을 시켜 몸보신에 좋은 약재를 옥화궁으로 보낼 테니, 며칠간 푹 쉬거라. 진왕은 태의들에게 맡기면 된다.”
“네, 폐하.”
독 낭자가 목운요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서며, 황궁의 경치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밖에 있을 땐 황궁을 엄청 동경했는데, 실제로 들어와 보니 별반 좋을 게 없구먼.”
목운요도 발걸음을 늦추어 그녀와 함께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사람 구경 외엔 바깥보다 좋을 게 없어.”
독 낭자가 피식 웃었다.
“표현이 아주 맘에 드는군. 그나저나 진왕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백박산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약은 아닐 텐데?”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누군가가 몰래 진왕을 해치려는 건가 보지.”
“소문을 듣기론 진왕이 실명에다 반신불수까지 됐다며? 그 지경이 됐는데도 죽이려 한단 말이야?”
“확실히 없애고 싶었나 보지.”
목운요와 독 낭자가 정자에 잠깐 머물렀다. 금란과 금교가 멀리서 지키고 있었다.
“그때 왜 진왕 곁에 있었던 거야?”
“응? 아, 그때는 누구의 부탁 때문이었지.”
“부탁?”
“응. 김현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마침 오늘 외할머니한테서 그 사람에 대해 들었어. 구맥금침술에 아주 능통하신 분으로, 태의원 원정으로 계시다가 진비의 모해로 양손을 잃으셨다지.”
“그분이 서릉을 떠난 뒤 약선골로 오셨거든. 나의 금침술 스승이기도 하지. 그분께선 틈만 나면 진비가 얼마나 악독하고 여우 같은 여자인지에 대해 한바탕 저주를 퍼부었어. 강남 강둑이 폭파됐다는 소식을 듣고 왠지 진비와 그의 아들이 연관되었을 것 같아 찾아갔었지.”
독 낭자가 한껏 신이 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결국 진왕보다 네가 좀 더 구미가 당겨서 너로 갈아탄 거고.”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내 편에 선 이유가 재밌는 구경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당연히 그것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독 낭자가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운요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탁 내리쳤다.
“너……! 또 간지럼 당하고 싶어?”
목운요가 다급히 그녀의 손을 저지했다.
“한 번만 더 간지럽히면 답설이에게 사흘간 네 뒤를 따라다니라고 할 거야!”
독 낭자가 순간 경직되더니, 머쓱하게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쳇, 내가 마음이 넓으니 한 번쯤은 봐주마.”
“퍽이나 고맙네.”
* * *
옥화궁에 도착한 목운요가 독 낭자를 장공주에게 인사시켰다.
일찍이 독 낭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장공주는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독 낭자를 맞이했다.
“며칠 더 머물다 가거라. 마침 운요가 친구 없이 외로워했는데, 둘이 함께 있으면 나도 마음이 놓이겠구나.”
장공주를 넋 놓고 바라보던 독 낭자는 목운요가 툭툭 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네, 장공주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독 낭자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목운요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독 낭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까 외할머니를 빤히 쳐다보던데, 혹시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장공주 전하가 대력조에서 가장 전설적인 여인이라 들었거든. 오늘 드디어 실물을 영접해 너무 감격스러웠을 뿐이야. 장공주 전하의 용모가 너보다 훨씬 뛰어나더라. 혹시 지금이라도 장공주 전하께 내 마음을 전한다면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까?”
목운요는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어디 한번 해 봐. 기분 좋으셔서 네 청을 들어주실지도 모르지.”
독 낭자는 온통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네가 전에 한씨 가문에 저지른 내 죄를 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었지? 혹시 성공했어?”
“폐하께서 자초지종을 들으시더니 네 죄를 사해 주기로 하셨어. 유왕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공로에 따라 상을 내릴 터이니, 그때 너도 정식으로 사면받을 거야.”
“그럼 며칠 더 기다려야겠군. 장공주 전하 곁에 머무르려면 적어도 죄 없는 깨끗한 출신이어야 하니까.”
“출신 말고도 주의해야 할 부분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응?”
독 낭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뭘 더 주의해야 하는데?”
“지금의 네 모습을 봐. 그 모습으로 밤에 외할머니 앞에 나타나면 크게 놀라실지도 몰라.”
독 낭자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런가. 한동안 여기 머무를 테니 네가 좀 도와줄래?”
독 낭자의 뜻밖의 결단에 목운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승낙한 거야?”
“그래.”
독 낭자가 곧장 화장대 앞으로 가서 앉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떼어 내자 흉터가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어둠이 내려앉을 것 같은 하늘처럼, 그녀의 두 눈이 위태로워졌다.
그에 목운요는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밖에서 술 단지 하나를 가져왔다.
낑낑거리는 목운요의 모습을 보고 독 낭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술 단지 하나도 제대로 못 옮길 만큼 힘이 없어서야, 쯧쯧. 내가 몸보신에 좋은 약을 처방해 줄까? 나중에 월왕한테 시집가면 아이도 낳고 해야 할 텐데, 지금 이 몸으론 턱도 없지.”
목운요는 술 단지를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목소리마저 잃고 싶지 않으면 말을 가려서 하지?”
“하하. 뭐야, 설마 월왕한테 시집갈 마음이 없는 거야?”
독 낭자의 놀림을 무시한 채 목운요가 술 단지를 열어 냄새를 맡았다.
“내가 직접 담근 술이야. 맛을 봐.”
“계화주?”
술을 본 독 낭자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독 낭자는 곧장 목운요의 손에서 술 단지를 빼앗더니, 금란에게 사발을 가져오라 소리쳤다.
목운요가 금란이 가져다준 큰 사발에다 술을 가득 채웠다.
“원하는 만큼 마셔. 난 주량이 약해서 조금만 마실 거야.”
“주량은 느는 법이지.”
독 낭자가 사발을 들어 술을 단숨에 들이마시고 나서 외쳤다.
“술맛 좋구나!”
목운요는 그런 독 낭자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지만, 사실 엄청 힘들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남은 흉터는 그녀의 잊을 수 없는 과거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스스로를 비난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 둔 증거일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쉽게 믿지 않았더라면 약선골도 지금의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테니.
목운요는 쉴 새 없이 잔을 비우는 독 낭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얼굴의 흉터를 지우기로 약속한 거야. 술 깨고 나서 번복하기만 해 봐.”
볼이 발그레해진 독 낭자가 술 한 사발을 들이켠 다음 탁자에 크게 내리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밝게 살아가길 네가 그토록 진심으로 원하니, 내 기꺼이 이 귀신 같은 얼굴을 바꿔서 네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할 거다!”
목운요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난 또 네가 정말로 외할머니 곁에 남고 싶어 그런 건 줄 알았지.”
독 낭자가 목운요를 흘끗 쳐다보더니 술을 슥 닦으며 말했다.
“당연히 장공주 전하 곁에 남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지. 혹시라도 이 일로 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흥, 의술이든 독술이든 내가 너보다 한 수 위거든?”
“과연 그럴까? 내가 약선골 출신이라는 걸 잊었나 본데, 약선골은 여태껏 수없이 많은 사람을 살려 냈고, 그 인맥을 전부 이어 가고 있거든? 지금도 내가 팔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응답할걸? 아무리 유왕의 외가댁이 약재 상로를 장악하고 있다 해도, 약선골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지.”
“너 설마…….”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신분도 같이 돌아가야겠지. 약선골은 아버지께서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일군 곳이야. 당연히 내가 이어받아야지. 그리고 약선골이 몰래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하운방과 불선루가 강남에서 그리 쉽게 그 많은 약재를 확보할 수 있었겠어?”
취기가 올라온 독 낭자가 말을 느릿느릿 내뱉었다.
“그런 거라면 엄청나게 고맙네.”
“고마울 건 없어. 네가 하도 이뻐서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술이 비자 독 낭자는 목운요에게 잔을 채우라고 재촉했다.
“적당히 마시지? 내일 아침에 머리가 엄청 아플 거야.”
“오늘 술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마셔!”
그때, 금란과 금교가 안주 몇 가지를 올려왔다.
“소저, 공복에 술 드시면 몸 상합니다.”
독 낭자는 금란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아 들고 사발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운요, 내가 곡조 한 자락 불러 줄까?”
목운요가 금란과 금교에게 이만 나가 보라고 눈짓했다.
“님께 술 한 잔 권하며 근심을 마시고, 님을 향해 웃으며 비수를 꽂아, 눈물로 얼룩진 부용 같은 얼굴로, 밤중에 님을 황천길로 배웅하노라. 황천에서 억울하다 하지 마오, 그 뒤에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오래전 원한을 하룻밤에 다 갚아, 한밤중에 눈물짓는 원혼을 위로하네…….”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독 낭자의 취기 어린 눈에 잔혹한 빛이 가득했다. 그러다 점점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후회로 변했다.
“밤중에 님을 황천길로 배웅하노라…….”
점점 울먹이는 듯한 그 목소리에, 목운요가 눈을 아래로 드리우며 말했다.
“많이 취했어.”
탁자 위에 엎드린 독 낭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소매를 적셨다.
“응. 취한 거 같아.”
“방으로 데려다줄게.”
목운요가 부축해 일어나려는 그때, 독 낭자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혈 자리 한두 개만 잘못 건드렸어도 진왕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내버려 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