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실명하다
침상 옆에서 부채질하고 있던 궁녀는 진왕이 눈을 뜨자 기뻐하며 목운요에게 달려가 알렸다.
“군주, 진왕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마침 진왕과 눈이 마주쳤다. 텅 빈 듯 공허해 보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진왕 전하, 괜찮으십니까?”
진왕이 손을 들어 눈앞을 휘젓더니 잠긴 목소리로 첫마디를 내뱉었다.
“지금 밤이냐? 왜 불을 켜지 않은 게냐?”
목운요가 손을 들어 진왕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다. 진왕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궁녀한테 말했다.
“진왕 전하께서 깨어나셨다고 폐하께 전하고, 태의들을 전부 부르거라.”
“네.”
궁녀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진왕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눈앞에 갖다 대더니, 한참을 말이 없다가 창백한 웃음을 지었다.
“혹, 내가 실명한 것이냐?”
목운요가 옆에 서서 진왕을 살폈다. 준수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태의들이 확진해 봐야 압니다. 다만 지금이 낮인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니, 아무래도 실명인 듯합니다.”
목운요의 대답에 진왕이 손을 천천히 내렸다.
“운요는 참 솔직하구나.”
진왕의 다정한 호칭에 목운요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짙은 혐오감이 들었다.
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진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부황께서 모함으로 인해 나를 감금하려 했다……. 그동안의 부자의 정이 무색할 만큼 믿음이 전혀 없으면서 왜 날 살려 둔 걸까.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둘 것이지.”
그에 목운요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요. 전하께서 목숨을 쉽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폐하께 있어서 불효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앞을 볼 수 없는 진왕은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눈이 안 보이니 청각이 유난히 예민해져 있었다.
“운요, 대체 왜 나를 이토록 미워하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다. 제가 왜 전하를 미워하겠습니까. 충언은 원래 귀에 거슬리기 마련입니다.”
그때, 황제와 태의가 도착했다.
앞으로 나서서 진왕의 상태를 본 태의원 원정 한평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께 아룁니다. 진왕 전하께서 머릿속 어혈로 인해 잠시 시력을 잃으신 걸로 보입니다. 앞으로 계속 약을 복용하여 어혈이 전부 사라진다면 다시 시력이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태의의 말에 황제가 진왕을 바라봤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왕은 전혀 당황하거나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거라.”
“네.”
진왕이 일어나 앉으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부황께 심려를 끼쳐 드리다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니다. 태의들이 잘 돌봐 줄 테니 몸조리 잘하거라. 짐이 또 보러 오마.”
“부황.”
진왕이 창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깨어나서부터 몸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혹시 두 다리도 잃은 건가요?”
황제가 발걸음을 멈춰 태의를 다시 불렀다.
“진왕의 다리는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러나 태의들이 한참을 검사해 봤지만 아무런 이상도 찾아내지 못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소인들의 의술이 박약하여 도저히 그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몸을 세워 앉은 진왕이 손을 뻗어 아무 느낌이 없는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부황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로 하늘이 저에게 주는 벌인가 봅니다. 부황, 태의들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게다가 어차피 저는 앞으로 진왕부에 감금되어 있을 텐데, 두 다리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진왕의 말은 황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짐을 원망하는 게냐?”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진왕이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지 부황께서 더 이상 소자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고 걷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소자를 외면하지만 말아 주십시오. 생사 관문을 오갔더니 많은 일을 깨달았습니다. 부황께서 소자가 죄인이라면 죄인이 맞습니다. 부황께서 노여움을 거두시고 옥체를 보중하신다면 아들로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겁니다.”
시종일관 미소 띤 채 말을 이어 가는 진왕을 보자, 황제는 마음이 아파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이내 그가 몸을 돌렸다.
“몸조리 잘하거라.”
황제가 떠나자, 태의들도 우르르 따라 나갔다.
한편 진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속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부황은 여전히 자신에 대한 처벌을 면제한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운요도 약상자 정리를 마치고 떠나려는데, 진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운요, 혹시 몸에 은방울을 지니고 있느냐?”
목운요가 제 향냥에 달린 은방울을 흘끔 보면서 대답했다.
“청력이 많이 예민해지셨군요. 이토록 많은 인기척 속에서도 은방울 소리를 듣다니.”
“혹 남아서 내 말동무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
“진왕 전하와 딱히 할 얘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목운요는 약상자를 들고 곧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때, 뒤에서 쾅 소리가 크게 났다. 놀라서 돌아보자 진왕이 침상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있었다. 궁녀들이 다급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 궁녀는 목운요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군주께 간청드립니다. 부디 남아서 진왕 전하와 이야기를 나눠 주십시오. 앞을 보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진왕 전하의 심정이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전하의 마음을 달래고 싶으면 당장 진비 마마를 모시고 와야지. 난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한다.”
그녀가 냉랭하게 궁녀를 지나쳐 떠나자, 궁녀는 괘씸하다는 듯 목운요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전하, 지금 바로 진비 마마를 모셔 오겠습니다.”
“됐다. 지금 이 꼴을 모비께 보여 드리고 싶지 않다. 혼자 있고 싶으니 다들 나가거라.”
“하지만 전하…….”
“나가!”
진왕의 화난 모습에 궁녀들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방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손으로 이불을 꽉 쥐어 잡은 진왕의 얼굴에는 짙은 증오만이 남아 있었다.
실명이라니…….
급한 마음에 고육지책을 썼을 뿐인데, 시력을 잃고 두 다리까지 잃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왕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며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본능적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앞은 온통 암흑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진왕을 본 진비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군진, 어떡하면 좋니……. 불쌍한 내 아들.”
“모비?”
“네 사고 소식을 듣고 밤새 절을 올렸거늘, 하늘이 무심하기도 하구나.”
진왕은 마음속에 억눌렀던 것들을 전부 쏟아 내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제가 며칠 동안 정신을 잃었나요?”
“오늘이 나흘째란다.”
“나흘 동안 목운요가 제 곁에 있었나요?”
“그래. 태의들이 속수무책이다 보니 폐하께서 목운요를 불러 너를 진단하게 했다. 결국 태의들과 함께 상의하여 내린 처방으로 널 살린 거지.”
진왕의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진비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혹시 처방에 문제라도 있는 게냐?”
“확실하진 않습니다. 다만 머리를 다쳤는데, 다리마저 잃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진왕은 아무 느낌이 안 나는 두 다리를 세게 꼬집어 보았다. 마음속에는 분노와 후회가 용솟음쳤다.
진비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었다.
“군진, 목운요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게 확실하느냐?”
“태의들 중에 이 귀비와 큰형님의 사람도 있어, 누구의 짓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이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황궁 내의 일은 늘 그렇듯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귀비, 릉왕과 목운요 외에 다른 누군가의 짓일 수도 있었다.
진비는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군진…… 앞으로 어떡할지 생각해 보았느냐?”
시력과 두 다리를 잃었으니, 진왕의 남은 생은 희망이 없을 듯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진왕은 미친 듯이 다리를 내리쳤다. 사고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만큼 후회와 절망이 밀려왔다.
진비는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군진, 진정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한참 뒤, 진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반쯤 얼이 나간 표정이 점점 사라지고 다시금 그가 안정을 찾았다.
“모비, 두 외삼촌의 죄가 이미 정해져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후궁에 저희 모자밖에 안 남았으니 저를 도울 이는 모비뿐입니다.”
진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무슨 일이든 말만 하거라. 이 어미가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독약을 좀 구해 주십시오.”
“독약은…… 어디에 쓰려고?”
“제가 먹을 겁니다.”
진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하자, 진비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모비, 저는 지금 궁지에 몰려 살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험을 하지 않으면 정말 이대로 끝장날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부황께서 제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어, 누군가가 저를 해치려는 걸 안다면 분명 크게 노하실 겁니다.”
진비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당장 독약을 구해 오마.”
“그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됩니다. 독약의 양 조절도 중요하고요. 증상이 명확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모비, 제 목숨이 달려 있으니 부디 신중히 준비해 주십시오.”
“그래. 하나 아무리 치명적인 양이 아니더라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몸에 해롭기 마련이다. 그다음 계획은 있느냐?”
“걱정 마세요. 목운요를 찾을 겁니다.”
“목운요를?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느냐?”
“태의들보다 의술이 뛰어난 데다, 목운요는 부황 때문에라도 최선을 다해 제 안전을 지킬 겁니다.”
하지만 진비의 생각은 달랐다. 목운요의 배후에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장공주가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어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금 바로 준비하마. 군진, 우선 건강 회복에 신경 쓰거라.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모르잖니.”
진왕의 마음속에 짙은 어둠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