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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29화 (329/442)

329화 마지막 기회

황제가 먼저 찻잔을 들었다. 찻물이 움직이면서 빨간 꽃잎도 따라서 빙그르르 돌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눈이 즐겁구나.”

그가 조심스레 향기를 음미했다. 매화의 향긋함과 과일의 달콤함이 어우러진 향이었다. 한 모금 마셔 보니 기분이 상쾌해지면서도 끝맛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아주 좋구나.”

황제는 연못 끝에 있는 오솔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가에 대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폭포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시원하게 떨어졌다. 햇빛 아래에서 흩어지는 물안개가 무지개색을 띠며 반짝였다.

“여기 있으니 서릉이 아닌 것만 같구나. 불선루 장사가 왜 이리 잘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외외종조부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거리가 멀지 않으니 시간 나시면 언제든지 와서 차도 마시고 경치도 구경하세요.”

“그래.”

* * *

황궁 내.

먼 길을 달려온 진왕이 정전 앞에 서자, 내시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진왕 전하. 폐하께선 장공주 전하와 함께 궁 밖에 나가셨습니다. 우선 진비 마마께 인사드리는 게 어떠신지요?”

진왕이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지.”

진왕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진비는 재빨리 맞이했다.

“군진, 드디어 돌아왔구나. 어서 이리 앉거라.”

진왕이 진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소자, 모비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진왕이 없는 사이, 진비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줄 알았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 그녀는 군주를 모시는 것이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제대로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네 외삼촌 얘기는 들었느냐?”

진왕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 가문의 짓이더군요.”

“궁내에선 이 귀비가 날 노리고 있고, 궁 밖에선 이씨 가문이 네 외삼촌들을 건드리는 걸 보아하니, 릉왕이 드디어 움직이려나 보구나. 우선 외삼촌을 구한 다음 반격해야 한다.”

그동안 겪은 수모를 생각하니 진비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에 진왕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일단 기다려 보시지요. 생각보다 단순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외삼촌들은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칠 만한 그릇이 못 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씨 가문이 일부러 모함하는 게 틀림없어. 그 증거를 찾아 폐하께 알리면 될 것이다. 한데 안색이 영 안 좋구나. 강남행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게냐?”

진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신중한 고민 끝에 두 외삼촌에게 소금 상인으로부터 받은 은표를 넘겨주었건만, 자신이 강남으로 떠나고 얼마 안 돼서 바로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지금 두 사람한테 씌워진 죄명은 타인 농지 점령, 민가 여인 강탈, 그리고 살인뿐. 은표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찾아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씨 가문이 자신의 주머니에 챙겼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진왕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 왔다. 강남에서 열심히 좋은 평판을 쌓아 뒀으니, 두 외삼촌의 일이 자신에게까지 미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모비, 아무래도 한동안은 잠잠히 있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럼 네 외삼촌들은 어떡할 거니?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좀 더 고민해 볼 테니 걱정 마십시오.”

진왕의 말투에는 저도 모르게 짜증이 섞여 있었다.

진비도 이를 눈치채고 조심스레 답했다.

“그래.”

진비의 궁에서 나온 진왕은 다시 정전으로 향했다.

오지 않는 황제를 한 시진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릉왕과 맞닥뜨렸다.

사실 릉왕은 진왕이 정전 앞에서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달려온 참이었다.

“아이고, 셋째 아우. 옷차림이 영 말이 아니군. 부황께 인사드리러 왔다면서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서야 되겠나?”

“큰형님을 뵙습니다. 부황께서 몸이 편찮으시다 들어 걱정되는 마음에 환복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형님께서도 부황께 안부 인사드리러 오신 건가요?”

릉왕이 입꼬리를 올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긴, 황급히 올 만도 하군. 오늘부로 궁 출입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테니까.”

순간 진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서릉에 오고 나서 최근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알아보지 않은 게냐?”

릉왕이 손으로 제 이마를 치며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부황의 건강이 걱정되어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랬지? 그럼 부황께서 서릉 거지들의 은자 은닉 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라 명하신 사실도 모르겠군.”

진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거지들의 은자 은닉 사건이요?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모르겠군요.”

“셋째 아우의 모르쇠 연기는 참말로 대단해. 하마터면 자네가 억울하다고 믿을 뻔했네.”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죠?”

“그래, 어차피 부황께서도 다 아셨으니 설명 못 할 것도 없지. 강남의 소금 상인과 결탁해 소금세를 횡령하여 서릉으로 몰래 빼돌리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지? 부황께서 거지들의 수상함을 알아채고 조사하지 않으셨더라면 그야말로 자네가 원하는 대로 그 돈을 몽땅 가로챌 수도 있었겠지.”

진왕의 눈에서 서슬 퍼런 빛이 번쩍였다.

“형님께서 증거도 없이 저를 모함하시니 이따 부황께 제대로 따져야겠군요. 그리고 제 외삼촌들이 사람 목숨을 해칠 리가 없습니다. 형님께서 이씨 가문의 손을 빌려 그 둘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절 모함까지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네요. 그리고 소금세의 행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형님이지 않습니까?”

이전까지 긴가민가했던 것이, 지금 눈앞에서 위풍당당해하는 릉왕을 보자 확실해졌다. 외삼촌들한테 맡긴 은표는 이씨 가문이 가져간 게 확실했다.

“내가 잘 알다니? 생사람 잡지 말거라. 나야말로 부황 앞에서 결백을 주장해야 할 판이군.”

릉왕이 속으로 코웃음을 지었다. 독 안에 든 쥐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침착한 듯 가식 떠는 진왕의 모습이 역겨웠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정말 그가 억울한 줄 알 것이다.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던 그때, 시위의 인사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와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두 사람도 다급히 인사를 올렸다.

목운요가 장공주를 부축한 채 황제와 웃으며 대화 중이었다.

즐겁게 듣고 있던 황제는 말을 이어 가려다가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릉왕과 진왕을 발견했다.

장공주도 그들을 보곤 발길을 멈추었다.

“황상, 황자 두 분이 인사드리러 오셨네요.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누님. 살펴 가십시오. 운요가 잘 모시고 가거라.”

“네.”

장공주와 목운요가 떠나자, 릉왕과 진왕을 훑어보던 황제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짐이 분명 두 사람에게 함께 귀경하라 어명을 내렸거늘, 그걸 어기더니 부르지도 않았는데 되레 함께 나타났구나.”

두 사람이 황제의 뒤를 따라 정전에 들어섰다.

“부황, 불선루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만든 화과차를 출시했다길래, 소자가 특별히 사람을 시켜 구해 왔습니다.”

황제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릉왕을 쳐다봤다.

“거참, 공교롭군. 짐이 지금 막 불선루에서 화과차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인데. 맛이 평범해서 마음에 들지 않더군.”

릉왕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화과차가 다른 진귀한 차보다 맛이 떨어질지 몰라도, 원기 회복에 좋아 자주 마시면 건강에 좋다고 하더군요.”

황제가 고개를 돌려 서립에게 눈짓했다. 이에 서립이 릉왕의 손에서 상자를 건네받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릉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왕을 쳐다보았다.

“셋째 아우는 왜 아무 말이 없는 건가?”

황제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진왕이 무릎을 꿇으며 정중히 말했다.

“부황의 어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때 귀경하지 않은 죄를 벌하여 주십시오.”

진왕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한참 뒤에야 황제가 입을 열었다.

“릉왕, 먼저 가 보거라.”

진왕의 우스운 꼴을 구경하려던 릉왕은 아쉬운 얼굴로 천천히 물러갔다.

릉왕이 떠나자, 황제가 계단에서 내려와 진왕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갑자기 발을 들어 진왕을 힘껏 걷어찼다.

“못난 놈, 네가 지은 죄를 알긴 하느냐?”

황제의 뜻밖의 행동에 진왕은 바짝 엎드렸다.

“부황께서 어떠한 연유로 이토록 진노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황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진왕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기회를 준다. 모든 사실을 자백하면 관대하게 처벌할 것이나, 여전히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부자의 정 따위 헤아리지 않아도 짐을 원망하지 말거라!”

진왕이 슬픔 가득한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부황. 소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부황께서 가장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그동안 형님과의 암투로 속 썩인 건 인정합니다만, 소자는 늘 부황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았습니다. 형제끼리 다투기는 했어도 절대로 부황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한 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백성을 궁지에 몰아넣고도 당당히 이런 말을 하다니. 황제의 반쯤 감은 눈에서 짙은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군진, 참으로 짐을 실망케 하는구나. 네가 적어도 군자의 도리는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거늘, 이제 보니 영락없는 소인배였어!”

“부황, 지금 이러시는 건 소자를 죽음으로 모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왕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자는 부황을 본받아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날마다 제 자신을 일깨웠습니다. 하지만 부황께서 그런 저를 소인배로 단언하시니, 앞으로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가란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눈을 감으며 진왕의 표정을 외면했다.

“네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짐이 직접 물으마. 강남 소금 상인과 임강성 관원들이 네게 총 삼백만 냥의 은표를 바쳤다고 자백했는데, 그게 사실이냐?”

“아닙니다. 허무맹랑한 일입니다.”

“또 임강 강둑이 무너진 건 네가 소금세 장부와 세금 위조 증거를 없애기 위해 한 짓이라고 자백했는데, 그것도 사실이냐?”

“아닙니다. 소자는 전혀 모르는 얘기입니다.”

“두 사실 모두 인정하지 않으니, 서릉 거지들의 은자 은닉 사건도 당연히 모른다고 하겠지.”

황제가 옥좌로 돌아가 앉으며 냉랭한 눈빛으로 진왕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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