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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23화 (323/442)

323화 독약을 챙겨라

“누님, 짐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셋째가…… 감히…….”

장공주를 보자마자 애써 유지하고 있던 황제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탁자를 잡고 서 있는 안색은 창백했다.

장공주는 황급히 다가가 황제를 부축했다.

“황상. 자식이 마음 같지 않으면 처벌하고 훈육하면 될 것을, 왜 옥체를 돌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오늘 제가 입궁하지 않았더라면 혼자 끙끙 앓을 생각이었나요? 저희에겐 폐하가 필요합니다.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지요.”

황제가 눈을 감으며 손으로 가슴을 연신 쳤다.

“누님, 짐의 한평생이 왜 이리 보잘것없을까요?”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애당초 황권이 쇠퇴할 때, 육대세가를 제거하고 황권을 견고히 다져 지금의 태평성세를 이룬 이가 다름 아닌 황상입니다. 백성들도 입을 모아 성군이라 칭찬하는데, 어찌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황자들을 잘 가르치려고 천하의 훌륭한 스승들을 모셨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첫째 군릉은 이씨 가문에 의지하여 눈에 뵈는 것이 없어, 그 아이가 황위에 오르게 되면 또다시 세가의 난이 펼쳐질지도 모르지요. 진왕은 천성이 잔인하여 이번 강남의 일도 모두 그의 짓이에요. 백성은 안중에 없고 자신밖에 모르다니……. 게다가 거지들한테 세금을 숨겨 서릉으로 운송하는 짓까지 저지르고…… 쿨룩…….”

“물 좀 마시고 고정하십시오, 폐하.”

장공주가 따뜻한 물을 건네며 황제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누님, 짐의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군릉과 군진이 못났다지만, 군유와 군월이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군유는 솔직하고 용맹하나, 지략이 부족하지요. 군대를 이끌 수는 있어도 나라를 책임질 정도는 아닙니다. 군월은…… 내가 망쳤습니다. 그 아이를 냉궁에서 혼자 지내게 하고 또 월서에 파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성격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누님……. 지금 와서 보니 이들 중에 큰일을 해낼 만한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황제가 이를 악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황상,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 마십시오. 군릉의 행실이 다소 편파적이긴 하나, 잘 가르치면 그래도 쓸 만할 겁니다. 군유는 지략이 부족하나, 인재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임용할 줄 알며 맡은 바 일도 잘 해내지요. 군진도 마찬가지로 성격을 잘 다스리면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닙니다. 군월 같은 경우 성격이 냉철하긴 하나 속으로는 가족을 끔찍이 여기는 착한 아이지요. 그들이 아직 중임을 맡기에 능력이 안 된다면 황상께서 더욱이 건강을 잘 챙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든 황자들을 잘 가르쳐 그중에서 적절한 사람을 골라야지요.”

낙담한 얼굴이었던 황제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님, 군진의 성격은 아무래도 돌이킬 수 없을 듯합니다. 황실의 체면을 생각해 임강 범람의 진실을 천하에 알리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 아이를 감싸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가 돌아오는 대로 공부에 감금시킬 겁니다. 릉왕은-”

“황상.”

장공주가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조정 대사는 황상께서 잘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보다 운요가 의술에 능통하니, 옥체 회복에 좋은 약을 지어 드리라 하겠습니다.”

그녀가 일부러 말을 돌리자 황제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누님께서 자꾸 이러시니 그 누구를 의심한들 누님은 절대 의심하지 않는 겁니다.”

“황상의 마음은 알겠으나 지킬 건 지켜야지요. 후궁도 정사에 참여하면 안 되는 마당에, 장공주인 저도 당연히 피해야 합니다.”

속에 있던 울분을 털어놓고 나니 황제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누님께서 궁중 생활을 싫어하시는 걸 알지만, 짐의 건강 상태도 예전 같지 않으니 누님께서 연한과 운요를 데리고 옥화궁에서 머무는 게 어떠신지요? 그럼 운요도 편히 짐을 도와 요양할 수 있고, 짐도 언제든지 누님을 찾아가 이야기 나눌 수 있겠지요.”

“알겠습니다.”

장공주가 잠시 고민하다 짧게 승낙의 말을 건넸다.

황제는 그런 장공주의 손에 용패를 쥐여 주며 말했다.

“누님, 짐이 오랜만에 그림자 호위를 소환했습니다.”

장공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황상께 계획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소환했을 때가 육대세가를 모두 죽여 유아의 복수를 할 때였지요. 이번에는 아들을 조사하기 위해서란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누님.”

장공주가 황제의 손을 꼭 잡으며 위로의 눈빛을 보냈다.

“황상.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저희에겐 아직 황상이 필요하다는 것만 기억해 주십시오.”

황제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짐의 힘으로는 황자들의 싸움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누님께서 만드신 그림자 호위를 써야만 조정을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짐의 권세 욕심으로 이 패를 쉽게 쓸까 걱정이 되오니, 이 용패는 누님께서 다시 가져가 주십시오.”

“그건 아니 되옵니다.”

“누님, 짐을 한 번만 도와주시지요.”

황제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누님께서 짐의 손을 잡으며 천하를 가질 생각이 있냐고 물었을 때, 짐은 그렇다고 대답했었지요. 그러자 누님께선 모든 힘을 동원해 짐을 황위에 앉힐 거라 약조했습니다. 결국 누님은 약속을 지켰고,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걸 짐에게 넘겨주고 물러나셨어요. 누님의 무한한 은정은 늘 짐의 가슴속에 깊이 묻어 두고 있습니다…….”

장공주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래전 이야기를 새삼스레 다시 꺼낼 필요가 있나요?”

“누님,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짐은 죽기 전에 반드시 제대로 된 후계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공들여 키워 온 대력조가 다음 세대에 의해 망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그녀가 용패를 건네받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제는 기뻐하며 답했다.

“고맙습니다, 누님.”

* * *

입궁 소식을 들은 목운요는 곧장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한데 눈여우가 달려오더니 목운요의 치맛자락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목운요가 허리를 숙여 눈여우를 안아 들었다.

“왜 그래? 어머니랑 궁에 갔다 올 거니까 여기서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마침 금교를 따라 들어오던 독 낭자는 목운요의 품에 안긴 눈여우를 보고 식겁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목운요는 정말 여우 신선이라도 되는 걸까?

“무슨 일로 여기까지?”

독 낭자가 목운요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거리가 가까운 것 같아 의자를 뒤로 빼기까지 했다.

“하도 소식 없길래 찾아왔지. 설마 날 잊고 있었던 거 아니지?”

“필요할 때 연락하라며? 요즘 특별한 일이 없어 연락 안 했지. 그리고 연락 안 해도 이렇게 잘 찾아오잖아?”

뾰로통해진 독 낭자는 당장이라도 가까이 가서 따지고 싶었으나, 목운요의 품에 안겨 있는 눈여우를 보고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흥, 입궁 준비하는 거야?”

“소식이 빠르네?”

“태의들 중에 약선골 출신이 있어서 소식 하나는 빠르거든. 듣자 하니 황제의 건강이 안 좋다더군. 갈 때 환약을 많이 챙겨 가. 없으면 나눠 줄까?”

“미리 준비했지.”

“저 작은 약상자로 되겠어? 독약도 챙겨야 할 텐데? 후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모르지? 거기 비빈들은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몰래 약을 타거든. 그러니까 독약을 챙겨 가서 혹시라도 적의가 느껴진다면 먼저 손쓰는 게 중요해.”

“환약을 챙겨 갈 수 있는 것도 군주 신분 덕에 가능한 거야. 독약은 준비해 봤자 궁에 못 가지고 들어간다고.”

독 낭자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렇게 고지식해서야. 손톱, 비녀, 옷 소매, 치맛자락, 신발, 향낭……. 숨길 데가 수두룩한데 뭐가 문제야? 하긴, 평생 정직하게만 살아와서 이런 걸 모를 수도 있지. 입궁하면 내가 사람을 시켜 독약을 보내 줄게. 혹은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을 소개시켜 줄 테니까 누굴 독살할지 시키기만 해.”

목운요가 눈여우를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전장에 싸우러 나가는 줄 알겠네. 궁 안의 사람들 모두 외할머니를 경외해서 날 일부러 적대시하진 않을 거야.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넣어 둬.”

“그래도 경각심은 항상 지녀야 해. 아, 소우의 그자가 임신한 사실은 알고 있어?”

“임신?”

목운요는 의아했다. 전에 황제의 맥을 짚은 적이 있는데, 그 몸 상태로는 임신이 어려워 보였다.

독 낭자가 웃으며 말했다.

“후궁 마마들의 수단이 장난 아니더라고. 진비는 덕비에게 아부하려 하고, 이 귀비는 그걸 막으려고 몰래 소우의한테 가임초를 먹여 그녀가 임신한 걸로 위장시킨 거지. 그렇게 되면 덕비는 소우의의 자식을 가로채고 싶은 마음에 진비 편에 서지 않을 테니. 참 재밌기도 하지?”

목운요도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임초라……. 소우의가 정말 임신했더라도 아이가 클 때까지 폐하께서 버티시지 못할 텐데, 덕비는 무슨 생각인 거지?”

“그러니까 웃긴 거지.”

독 낭자가 수다에 정신 팔린 사이, 눈여우가 조용히 몸을 낮춰 기어가더니 독 낭자를 덮쳐 그녀의 몸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순간 독 낭자의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새하얗게 질린 채로 그녀가 식은땀을 흘렸다.

“여…… 여…… 여우!”

반면 목운요는 강 건너 불구경 중이었다.

“조심해야 해. 동생이 아직 어려 야생성이 남아 있는 데다, 원한을 새기는 성격이거든. 혹시라도 화나게 하면 매일 따라다닐지도 몰라.”

“동생?”

독 낭자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럼…… 정말…….”

“하하.”

목운요가 배를 잡고 웃었다.

독 낭자는 조심스레 눈여우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눈여우는 독 낭자의 옷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한참 구경하고 나서야 목운요가 다가가 눈여우를 떼어 냈다.

눈여우가 떨어지자마자 독 낭자는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나 이만 가 볼게!”

옆에서 찻잔을 내려놓던 금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독 낭자가 왜 이리 여우를 무서워하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누구나 자신만의 약점이 있는 법이죠. 그나저나 답설을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리니 궁으로 데려가도 나쁘지 않겠네요. 안 그래도 심심한 궁에서 같이 놀 수 있으니까.”

“네. 지금 바로 답설의 짐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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