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연극
결국 누군가가 거지들의 손에 은자를 각각 쥐여 주고 나서야 겨우 길을 비켜 주었다.
황제는 화가 잔뜩 났다.
“아주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이구나.”
목운요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내렸다.
장공주도 찻잔을 들어 한 입 마시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내지 마시고 어서 와서 앉으십시오. 다음에 심병괴에게 저자들을 톡톡히 혼내라고 하면 되지요.”
그에 어쩔 수 없이 창가에서 돌아서려는 순간, 아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순찰하던 관리가 거지 한 명을 잡았는데, 도망치려 아등바등하던 거지의 옷 안에서 은자가 와르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광경을 본 황제의 눈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은자는 족히 오십 냥은 되어 보였다.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다니는 이재민이 오십 냥이나 되는 은자를 지니고 있다니?
“황상, 무슨 일인가요?”
“누님, 어떤 이재민이 몸에 은자 오십 냥을 숨겨 둔 걸 보았습니다.”
장공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잘못 보신 거 아닌가요?”
“확실합니다. 방금 순찰 관리한테 잡혀갔습니다.”
생각할수록 수상하다 느낀 황제가 서립에게 지시를 내렸다.
“상황을 알아보거라.”
은자를 떨어트린 거지가 잡히자, 나머지 거지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가슴팍을 움켜잡고 사방으로 도망갔다. 마치 전부 몸에 은자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자리로 돌아와 한참을 생각하던 황제가 장공주를 보며 미안함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같이 거리를 구경하기로 해 놓고 이런 일 때문에 흥이 깨지고 말았네요.”
“아닙니다. 백성들이 우선이지요. 제 생일 때문에 해야 할 일을 그르친다면 저야말로 마음이 불편할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알아보러 갔던 시위가 돌아왔다.
“아뢰옵니다. 이재민을 수상하게 여긴 심 대인께서 사람을 시켜 알아봤더니, 성서에 있는 폐가에서 거지 일행과 몇천 냥의 은자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황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거지들이 그 많은 은자를……. 자세히 심문해서 낱낱이 밝혀내거라.”
장공주가 일어서며 말했다.
“황상, 먼저 일어나시지요. 연한과 운요가 있으니 저는 염려 마시고요.”
“누님, 심병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짐이 가 봤자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장공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식사하는 동안 황제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장공주도 이를 눈치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심병괴가 찾아왔다.
“소신, 폐하와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조사가 끝난 게냐?”
심병괴가 소매에서 은 두 덩어리를 꺼냈다.
“폐하, 이걸 봐 주십시오.”
“이게 왜?”
“바닥에 자른 흔적이 있습니다. 소신이 추측한 바에 의하면 이것들은 관은으로 보입니다.”
“뭐라고?”
관은이라는 말에 황제의 주변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확실한가?”
정직하기로 소문난 심병괴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맺혔다.
“폐가에서 은자 구천여 냥을 발견하여 이재민들을 심문했으나, 그들은 시종일관 침착하였습니다. 일반 백성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 위장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문득 황제의 머릿속에 강남에서 사라진 세금이 떠올랐다.
유왕이 올린 문서에 따르면 삼백만 냥의 가짜 관은만 발견되고, 진짜 세금은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관은으로 의심되는 물건이 서릉에 나타났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심히 의심스러웠다.
장공주가 손으로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반나절을 돌아다녔더니 피곤하군요. 전 이만 돌아갈 테니 황상께서도 일찍이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중요한 사건이라면 하루빨리 진상을 알아내야 할 터. 장공주의 배려에 황제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누님, 그럼 다음번에 다시 찾아뵙지요.”
황제가 일행들과 급히 떠나자, 장공주도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돌아가자꾸나.”
“네, 외할머니.”
그들은 곧장 장공주부로 돌아왔다.
허연한이 저녁을 준비하러 떠난 사이, 목운요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장공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외할머니, 오늘 일은 사실 제가 미리 계획한 거예요. 가짜 세금 사건을 폐하께 알리기 위해 외할머니 생신을 이용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장공주는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뭐, 대단한 일도 아닌걸. 가족끼리 그러지 않아도 된다.”
목운요는 그럼에도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라면 아무 고민 없이 이용했을 테지만, 외할머니는 제 가족이라서 오히려 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에 장공주가 목운요를 직접 일으켜 세웠다.
“전혀 신경 안 써도 된다. 내 생일을 이용했을 뿐, 나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준 건 아니잖니? 그보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거라.”
“사실 처음엔 진왕이 가진 재물의 출처가 수상하다 느껴 월왕 전하와 함께 조사하다가, 소씨 가문 소근의 남편인 양렴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래서 양렴을 뇌물 수수죄로 감옥으로 보냈지요. 심문 도중에 그자와 강남 소금 상인이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걸 알게 됐고, 그 뒤에 진왕 전하가 있단 걸 알았어요.”
“릉왕한테는 일부러 소식을 흘린 거구나?”
“네. 월왕 전하의 세력이 부족해 진왕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릉왕한테 소식을 알려 이씨 가문까지 가담해 일을 크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의도치 않게 폐하께서 월왕 전하에게 강남 소금세 사건 조사를 맡기셨고, 또 릉왕과 진왕의 세력 싸움이 강둑 폭파로까지 번져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어요.”
“소금세는?”
“소금 상인들이 애초에 세금을 내지 않고, 내야 할 세금을 은표로 바꿔 서릉에 있는 진왕한테 보냈더라고요. 양주성 소금세 사건 때와 같이 가짜 소금세를 실은 배를 임강에 가라앉게 하여, 증거를 전부 없앨 생각이었던 거죠. 하지만 월왕 전하께서 조사를 시작하자 진왕과 소금 상인들이 당황했고, 릉왕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보니 결국 강둑을 폭파시킨 거예요.”
“진왕이 무서운 짓을 저질렀구나.”
장공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람 마음일지도 몰랐다.
“다행히 월왕 전하께서 진비의 형제로부터 대량의 은표를 찾아내어 숨겨 두었지요”
“소금 상인들이 서릉으로 보낸 은표는 월왕이 몰래 숨겨 뒀으니, 오늘 본 그 은자들은 두 사람이 일부러 준비한 거로구나.”
“맞아요, 외할머니. 진왕이 쉽게 죄명을 벗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몰래 준비한 뒤 릉왕에게 가짜 소식을 전하였어요. 오늘 폐가를 찾아낸 관리도 릉왕이 보낸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되면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저와 월왕 전하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지요.”
목운요는 자신이 이토록 솔직하게 모든 일을 외할머니에게 털어놓게 될 줄은 몰랐다.
“너희들의 일이니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 믿는다. 다만 어떤 계획을 세우든 꼭 서로에게 솔직해야 한다. 절대 후회할 일을 해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외할머니.”
장공주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목운요를 쳐다보았다.
“항상 신중히 행동하거라. 넌 분명 이 할미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네가 월왕을 선택했으니 난 아낌없이 너희들을 도울 거란다.”
장공주는 진심으로 월왕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 믿는 듯했다.
설마 외할머니께선 월왕이 황제의 친자가 아님을 모르시는 걸까? 혹은 손 씨의 말이 다 거짓이었을까?
“운요야, 무슨 일 있는 게냐?”
목운요가 얼른 정신을 차리며 답했다.
“아니에요.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넌 내 하나뿐인 외손녀다. 내가 널 돕지 않으면 누굴 돕겠니?”
그사이 저녁 식사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청화 백자 그릇에 장수 국수가 담긴 모습이 보기만 해도 식욕이 돋았다.
장공주는 맛을 보려고 젓가락으로 떠 보다가, 면이 한 가닥으로 이루어진 걸 알아챘다.
허연한과 목운요가 절을 하며 축하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외할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오냐. 일어나거라.”
장공주의 얼굴엔 어느새 웃음꽃이 활짝 펴 있었다.
목운요는 자신이 직접 수놓아 만든 불경을 건넸다.
“옷을 만들어 줬으면 됐지, 언제 또 이런 것까지 준비했니. 강남에서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않고 바삐 돌았는데, 이 할미 마음이 아프구나.”
목운요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외할머니께 드릴 선물이라 생각하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어쩜 말도 이리 예쁘게 하는지. 새로 장신구를 구해 놨는데, 이따가 곡 마마를 따라가서 맘에 드는 걸 골라 보거라.”
“마음의 준비를 잘해야겠네요. 외할머니 물건들은 다 너무 예뻐서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게 쉽지 않거든요.”
장공주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우리 요아의 말재간을 당해 낼 수가 없구나. 고르기 힘들면 다 줄 테니 돌아가면서 실컷 하거라.”
“역시 외할머니밖에 없어요.”
“이상하구나? 네 어미가 지은 약밥을 먹을 때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건 그때고요. 오늘은 누가 뭐래도 외할머니가 가장 좋아요.”
“이런 귀여운 것.”
식사하는 내내 장공주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마침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시녀가 와서 알렸다.
“장공주 전하께 아룁니다. 월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여보내거라.”
“네.”
대청에 들어선 월왕은 단번에 목운요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노을 무늬 상의에 연두색 치마를 입은 그녀는 청순 그 자체였다. 황량한 사막을 온통 초록으로 뒤덮을 것만 같았다.
이를 눈치챈 장공주가 기침 소리를 내며 놀리듯이 물었다.
“내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 것 아니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