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20화 (320/442)

320화 함정을 파다

* * *

궁에서 돌아온 목운요는 바로 육냥을 불렀다.

“육냥, 강남에서 황자들은 뭘 하고 있느냐?”

“릉왕은 특별할 것 없으나 진왕은 상처 입은 팔로 순찰을 나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공사비를 횡령한 인부 두목을 처벌하고 사비로 이재민들에게 보상하기까지 했습니다. 정직한 제 대인께서 진왕의 이러한 모습을 상주서에 그대로 적어 서릉으로 보냈다고 하니, 아마 곧 폐하께 도착할 겁니다.”

목운요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역시 평판을 쌓기 위해 별의별 수를 다 쓰는 진왕 전하군. 그렇다면 명성이 더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진왕을 도와주실 생각이신가요?”

“물론.”

목운요의 눈빛에 원한이 이글거렸다.

“그자가 위로 더 올라가고 싶어 하니까, 밑에서 사다리를 꽉 잡아 줘야지. 가장 높이 올라가야 떨어졌을 때 뼈도 못 추리지 않겠어?”

“주인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육냥에게 목운요의 원수는 자신의 원수와 같았다. 진왕이 무슨 일을 저질렀든 간에 그녀를 화나게 한 사람은 기필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에 준비하라고 시킨 은표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거라. 며칠 뒤면 외할머니 생신이라 그날 폐하와 외할머니께서 거리로 나가실 것이니, 아무 문제 없이 미리 준비해 놔야 한다.”

“네, 맡겨 주십시오.”

“그래. 제명한테도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하거라. 진왕이 권세를 잃게 되면 릉왕이 기필코 기회를 틈타 그를 완전히 꺾으려고 들 것이다. 우리가 미리 계획한 공로를 제명한테 돌려 꼭 릉왕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알려라. 그래야 이씨 가문의 계획에 미리 대비할 수 있다.”

“이씨 가문은 세력이 방대한데, 건드려도 괜찮을까요?”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씨 가문에 맞설 생각은 없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월왕을 선택한 이상 우리의 앞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해.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지.”

게다가 월왕의 출신까지…….

소문에 의하면 임신한 비빈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황후 마마께서 그들을 해하려 했다가 실패했다고 하나,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냥이 고개 숙인 채 대답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거라.”

육냥이 나간 뒤, 목운요는 눈빛이 차갑게 식어 갔다. 이번 일이 지나고 나면 진왕은 더 이상 재기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 * *

제운의 상주서가 서릉에 도착했다. 황제의 한껏 찌푸려졌던 미간도 내용을 보고 서서히 풀렸다.

백성들을 위해 이렇게 나서는 걸 보아하니 진왕이 구제 불능의 지경까지 이른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릉왕도 폐를 끼치진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덕분에 장공주의 생일날까지 황제의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다. 조회를 마친 그가 옷을 갈아입고 나서 서립 등과 함께 장공주부로 찾아갔다.

목운요와 허연한도 아침 일찍 일어났다. 허연한은 아침 준비를 하고, 목운요는 장공주를 깨우러 갔다.

물 대야를 들고 들어오는 목운요를 보고, 장공주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가, 얼른 내려놓거라. 이 무거운 들다니, 그러다 다친다.”

“대야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 지금부터 제가 외할머니를 도와 단장하고 환복할게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목운요를 보자, 장공주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래, 네 뜻에 따르마.”

목운요는 장공주의 세안을 도운 뒤 자신이 직접 지은 옷까지 입혔다. 그러곤 장공주를 화장대 앞에 앉혀 빗을 들었다.

“전엔 스스로 머리 정리도 못 하지 않았더냐?”

곡 마마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말도 마십시오. 소저께서 요즘 시간 날 때마다 머리 빗는 연습을 하셔서 시중들던 시녀들이 겁먹었지 뭐예요.”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곡 마마,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그동안 연습 많이 해서 외할머니 머리를 잘 빗겨 드릴 거예요.”

장공주가 흐뭇해하며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잘해 보거라.”

목운요가 조심조심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여러 번 연습했던 터라 조심스레 빗은 다음 비녀를 꽂으니 완벽에 가까웠다.

장공주도 살며시 비녀를 만져 보더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제법 잘하는구나.”

장공주의 진심 어린 칭찬에 목운요는 소리 내어 웃으며 뒤에서 장공주의 어깨에 기댔다.

“감사해요, 외할머니.”

곡 마마도 곁에서 웃음을 지었다. 부인과 소저가 함께하게 된 뒤로 장공주부가 활기차져서, 하루하루 사는 맛이 났다.

그때, 허연한이 아침을 들고 왔다.

“어머니, 요아. 아침 드세요.”

“하인들한테 시키면 될 것을. 어서 앉아 쉬거라.”

곡 마마가 상 차리는 걸 도우며 말했다.

“보아하니 부인께서 직접 만드신 음식들이네요. 냄새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허연한이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주방에 많이 남겨 뒀어요. 곡 마마께서도 얼른 가서 식사하시지요.”

“네, 그럼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마침 안에 들어선 황제는 눈앞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고 못내 부러움이 새어 나왔다.

“누님, 짐도 급히 나오느라 식사를 못 했습니다.”

목운요는 바로 일어나서 인사를 올린 뒤, 수저와 밥그릇을 황제 앞으로 대령했다.

“외외종조부, 오늘은 수발드는 하인이 없으니 직접 드셔야 합니다.”

일반인처럼 지내기로 하다 보니 목운요의 호칭도 바뀌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설마 짐이 스스로 젓가락질도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궁녀들이 직접 먹여 주는 게 아니었나요?”

“하하, 짐이 누님과 식사할 때 궁녀가 먹여 주더냐?”

“그건 부끄러우셔서 일부러 혼자 하시는 건 줄 알았는데, 제 생각이 틀렸네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외외종조부께서 물을 질 때 쓰는 멜대마저도 금이라고 했거든요.”

황제가 크게 웃었다.

“누님, 다음에 운요를 궁으로 보내 며칠 지내게 하시지요. 이 아이 덕분에 웃을 일이 끊이질 않을 것 같군요.”

장공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지요. 운요는 내 재롱둥이라 하루도 곁을 떠나서는 안 되거든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짐이 틈만 나면 누님한테 와서 식사 대접을 받아야겠네요.”

“그러시죠.”

화기애애한 가운데 식사를 마친 뒤, 일행이 마차를 타고 거리로 나섰다.

황제는 서릉 거리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운요가 역병 치료에 쓰일 처방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서릉은 아마 민심이 흉흉했을 테지…….”

“외외종조부, 오늘만큼은 일반인으로 살기로 약조하셨잖아요.”

“그래그래, 그만하마.”

황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황위에 있는 동안 수도 없이 민정을 살피러 나왔지만, 거리는 늘 미리 청소가 끝난 상태였고, 볼 수 있는 것들도 한정적이었다.

한데 오늘은 백성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다니자 나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때, 한 거지가 다가와 구걸했다.

“나리, 먹을 것 좀 주십시오.”

목운요가 얼른 다가가 황제의 옷깃을 잡았다.

“외외종조부, 어서 가시지요.”

“딱해 보이니 은자를 좀 주자꾸나.”

구걸에 나선 거지의 남루한 의복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진 황제는 서립을 시켜 은자를 건네주었다. 목운요가 말릴 새도 없이 이미 은자를 줘 버린 것이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지 무리가 모여들어, 황제와 일행을 에워싸고 구걸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눈앞의 상황에 크게 놀랐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목운요는 다급히 장공주의 앞을 막아섰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데, 갑자기 멀리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순찰 관리들이 나타났다!”

구걸하던 거지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를 본 한 백성이 다가와 조언했다.

“나리. 이 사람들은 모두 남쪽에서 온 이재민들인데, 일부러 돈을 꾀어내려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지요.”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건가?”

“하운방과 불선루에서 죽을 나눠 주고 있긴 한데, 거리에 나와 구걸하는 게 벌이가 꽤 쏠쏠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는 아예 생계로 삼고 있지요. 나리와 같이 착한 분들을 만나면 일부러 한꺼번에 몰려들어, 은자를 던져 줘야 흩어지곤 합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자가 통치하고 있는 서릉에서 겁 없이 악랄한 수단으로 구걸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황제는 나서서 말리던 목운요가 생각났다.

“운요, 혹시 알고 있었느냐?”

목운요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릉에 돌아오고 나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개중 진짜 힘든 이들도 섞여 있어 난처한 상황입니다.”

“이런 일이 있는데도 순천부는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냐?”

“심 대인께서도 아마 여력이 안 될 겁니다. 폐하께서 이재민의 입성을 막아선 안 된다고 어명을 내리신 터라,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니 이재민들도 이렇게 제멋대로인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짐의 잘못도 있다는 거군.”

황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에 목운요가 웃으며 답했다.

“폐하께서 관원들에게 엄하시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히 살아가는 거지요. 그리고 저 이재민들이 부적절한 방법을 쓰고 있긴 하지만, 강남의 성들이 다시 일어서게 되면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의 불쾌함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장공주와 함께 여기저기 구경에 나섰다.

점심이 다 될 무렵, 목운요가 입을 열었다.

“외할머니, 외외종조부. 오전 내내 걷느라 힘드셨을 텐데 성원루에서 잠시 쉬다 가시지요. 여기 생선 요리가 일품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그러자꾸나.”

가게 안에 들어서자, 주인이 눈치껏 일행을 이 층 별실로 모셨다.

그때, 밖에서 징과 북 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황제가 한껏 궁금해하며 물었다.

“오늘이 명절도 아닌데 뭐가 이리 떠들썩한 게냐?”

“신부를 맞이하는 대열인가 봐요.”

황제가 창가로 다가가 아래쪽을 살펴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거지 무리가 신부 맞이 대열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타일렀지만, 거지들은 바닥에 절만 할 뿐 전혀 비켜 줄 기미가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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