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소씨 가문의 종말
육냥이 나가자 금란이 음식을 가져왔다.
“소저, 제가 만든 간식인데 드셔 보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목운요가 탁자에 내려놓으라며 눈짓했다.
“금란, 육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육냥이요? 소저한테 충성심을 다하고 믿음직하지요. 왜 갑자기 그걸 물으십니까?”
“……별일 아니에요. 혹시 내가 없는 동안 하운방과 불선루에 무슨 일 없었나요?”
“두 곳 모두 문제없었어요. 외려 하운방과 불선루가 강남 이재민들을 도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찾아오는 서릉 인사들이 더 늘어났지요. 장부도 빠짐없이 소저의 서재에 갖다 두었습니다.”
“알겠어요.”
“소저, 며칠 휴식을 취하신 다음 다시 일을 하시지요. 조만간 황상께서 소저께 상을 내리실 텐데, 그때가 되면 또 바삐 돌아야 할 거예요.”
“그래요.”
* * *
하루 쉬고 난 뒤, 목운요는 불선루에서 상급 찻잎을 가져와 덖기 시작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목운요를 보며, 장공주는 못내 가슴이 아파 왔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며칠 더 쉬지 그러니?”
“오는 길에 보살핌을 많이 받아 그리 힘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폐하께서 차가 다 떨어졌다고 하셔서요. 요즘처럼 날씨 좋을 때 덖어 놔야 마음이 놓여요.”
“다음에 황상께 한 소리 해야겠구나. 우리 운요 쉬지도 못하게.”
“그냥 제가 미리 하려는 것뿐이에요. 한 소리 하실 거면 저한테 하세요. 가만히 듣고만 있을게요.”
목운요가 재빨리 애교를 부렸다.
“너도 참.”
헛웃음을 지은 장공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들어 보니 허기도 강남에 갔다 하더구나.”
“네. 저도 놀랐어요. 오는 길이 험난했을 텐데 말이죠.”
“허기가 월왕한테 마음이 있긴 하지만, 워낙 선을 잘 지키는 아이라 나도 두고 보기만 했다. 하나 사람은 알게 모르게 변하는 법이지. 혹시라도 허기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한다면 절대로 고민하지 말고 네 방식대로 처리하거라.”
남녀 사이는 억지로 끼워 맞춘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허기가 알아서 물러난다면 장공주도 절대로 푸대접당하게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운요와 월왕 두 사람 사이가 단단하다는 걸 알면서도 끼어든다면, 그 후 일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목운요는 잠깐 멍해졌다가 곧바로 마음속에 따뜻함이 벅차올랐다.
“잘 알겠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외할머니.”
“그래.”
목운요의 손을 잡은 장공주는 거칠어진 그녀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하던 일 마저 하거라. 새로 만든 차 기대하마.”
“네.”
* * *
장공주가 곡 마마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가는데, 시녀가 다가와 알렸다.
“전하, 허 소저께서 방금 강남에서 돌아와 문안 인사드리러 오셨습니다.”
장공주의 눈빛이 잠깐 굳었다.
“곡 마마. 장신구를 골라 허기에게 하사하고,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얼른 가서 쉬라고 전하게.”
“네, 장공주 전하.”
장공주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나 다 사심이 있듯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손녀가 허기로 인해 난처해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 * *
한껏 집중한 표정으로 찻잎을 말리고 있는 목운요에게 금란이 다가와 알렸다.
“소저, 허기 소저께서 인사드리러 오셨는데, 장공주 전하께서 하사품만 내려 주고 돌려보내셨대요.”
“외할머니를 못 뵙고 갔다고요?”
“네.”
순간 외할머니에 대한 감동이 밀려왔다.
한편 독 낭자에 대한 걱정도 들었다. 허기가 돌아왔다면 독 낭자도 도착했어야 함이 맞았다.
한데 새로 만든 차를 여러 곳으로 나눠 보낼 때까지 그녀에 대한 소식은 전혀 없었다.
목운요는 육냥을 시켜 찾아보라고 하려다가, 괜한 참견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사람을 시켜 산파의 아들 장력을 순천부로 보내게 했다.
* * *
사건 조사를 마친 심병괴가 장공주부로 찾아왔다.
그동안 목운요는 강남에서 장력을 만난 사실을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자신을 통해 듣는 것보다, 사건이 명백히 밝혀진 뒤 들으시길 바랐기 때문이다.
심병괴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들은 장공주는 곧장 황제를 찾아가 진실을 폭로했다.
장력이라는 증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 산파가 남긴 친필 서신, 그리고 허연한 양부모의 증언까지 더해졌으니 소씨 가문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사실을 안 황제는 진노했다.
목운요의 영리한 행동과 판단력이 아니었다면, 장공주는 아마 평생 친딸을 찾지 못했을 거고, 그 죄악의 근원인 소씨 가문은 지금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사건이 형부로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게 낱낱이 밝혀졌다.
소문원은 참수형을 앞두게 되었고, 노부인 손 씨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사약을 전하게 된 서립의 제자 이덕은 소씨 가문으로 가기 전에 미리 목운요에게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에 목운요는 곧장 옷을 갈아입고 소부로 향했다.
이득과 시위들은 영화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목운요를 보자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온한 군주를 뵙습니다.”
“이 공공, 예를 거두세요. 소식을 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손 씨와 따로 몇 마디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소인,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군주께서 편한 대로 하십시오.”
목운요가 영화원 안에 들어서자, 온 마마와 임 의녀가 황급히 바닥에 꿇어앉았다.
“일어나세요. 온 마마는 앞으로 이부인에게 가서 소우를 돌봐 주고, 임 의녀는 새로 호적을 만들어 뒀으니 이제 평범한 신분으로 살아가면 될 겁니다.
“군주께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뜻밖의 소식에 몹시 기뻐했다. 자신들의 처지를 굽어살피는 이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목운요는 달랐다.
“군주 전하, 조심하십시오. 노부인께서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하십니다.”
“알겠어요.”
방에 도착하자, 임 의녀가 은침으로 손 씨의 몸을 몇 번 찌르고 약을 먹인 뒤 물러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손 씨는 목운요를 보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목운요, 이 미천한 년!”
목소리가 나오니 그녀는 곧장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누구 없느냐! 소씨 가문을 망친 목운요가 나까지 죽이려 한다!”
“노부인, 그만 힘 아끼시죠. 당신을 보러 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
손 씨가 두 눈을 부릅떴다. 예전의 온화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깡마른 얼굴이 마치 가죽만 남은 해골 같았다.
“목운요, 이 독한 년!”
“소씨 가문이 저지른 죄는 당신이 제일 잘 알 테고, 폐하께서 사약을 내리신 것도 그나마 당신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서지요. 그에 비하면 소문원의 처지는 비참하긴 하죠. 가을이 지나고 참수형을 받을 텐데, 소청오마저 유배당하다 보니 시신을 거둘 이가 없겠군요. 그나마 나머지 소씨 가문 사람들은 무사하니 노부인께서도 위로 삼으시죠.”
손 씨는 당장이라도 호흡이 멈출 것만 같았다.
“목운요, 널 저주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나요? 지금 내 심기를 건드렸다간 정말 소씨 가문의 싹을 모조리 잘라 버릴지도 몰라요.”
손 씨의 두 눈에 원한의 빛이 가득 찼다.
“너랑 허연한을 하언촌에서 죽였어야 했는데……!”
목운요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모든 일은 후회해도 소용없죠.”
그에 손 씨가 목운요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갑작스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목운요, 네가 월왕을 흠모한다며? 심지어 그자를 찾으러 강남까지 갔다지?”
“오락가락한다더니. 보아하니 아주 정신이 맑기만 하군.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바깥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나 보네.”
손 씨의 웃음이 점점 더 일그러져 갔다.
“내가 월왕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하나 알고 있는데, 알고 싶으냐?”
“월왕 전하의 출생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목운요는 애써 태연한 모습을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소부에 다신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손 씨에 대한 원한이 깊다 보니 만나 봤자 기분만 나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왕이 관성에서 낙곤을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손 씨를 만나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한 단서를 알아내고 싶었다.
“하하하.”
손 씨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방자하게 웃기 시작했다.
“목운요, 그자 곁에 있으면 언젠가 황후라도 될 줄 알았나?”
“글쎄. 바깥의 일을 훤히 꿰고 있는 걸 보아하니, 릉왕과 진왕이 강남에서 벌인 일도 익히 알고 있겠군. 그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봤을 때, 폐하께선 절대로 황위를 그자들에게 물려주지 않겠지. 그럼 성년이 된 황자들 중에 유왕과 월왕 전하만 남을 테고, 유왕 전하는 조정에 뜻이 없으니 결국 남는 사람은 월왕 전하뿐이야.”
“꿈 깨거라!”
손 씨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잘 듣거라. 그 누구든 황위에 오를 수 있지만, 월왕만은 절대 못 오른다! 그 이유를 알고 싶으냐?”
“곧 죽을 사람의 말을 내가 왜 믿어야 하지?”
“하하, 두렵구나!”
목운요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손 씨는 속이 후련했다.
“듣기 싫다고 하니 더 알려 주고 싶구나. 그 이유는 월왕이 황제의 적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월왕이 황제의 자식이 아닌 거지!”
청천벽력 같은 말에 목운요는 혼란스러움이 몰려왔다. 주먹을 꽉 쥐며 겨우 정신 줄을 잡고 있었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
“내 말엔 단 한 글자도 거짓이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황제가 왜 황후를 냉궁으로 보냈겠느냐. 황후가 정녕 황자들을 독살하려 했다 한들, 배 속에 들어 있는 자식을 보아서라도 아이 낳을 때까진 보살폈겠지. 그런데 현실은 황후를 냉궁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 월왕도 데려오지 않았지. 친아들이라면 그렇게 했을까?”
순간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제와 외할머니가 자신과 월왕의 사이를 말리지 않았던 게 혹시 그 때문이었을까? 월왕이 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자신과도 혈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걸까?
목운요의 계획에 금이 갔다고 생각하자 손 씨는 통쾌하여 더 크게 웃었다.
“월왕이 누구 자식인지 알고 싶으냐?”
그에 목운요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가 손 씨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사약 먹이기 전에 혀부터 잘라야겠어!”
“어차피 곧 죽을 몸인데 뭐가 두렵겠냐? 똑똑히 들어라. 월왕은 낙곤의 자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