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허락을 받다
마당에 들어선 목운요는 버선발로 마중 나온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가 곧장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운요,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뵙습니다.”
“어서 일어나거라. 어디 제대로 보자꾸나.”
장공주가 목운요를 일으켜 세우며 위아래로 자세히 훑어보았다.
“야위었구나. 우리 운요, 고생 많았다.”
목운요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집 밖은 정말 위험하더라고요. 역시 외할머니와 어머니 곁이 가장 좋습니다. 앞으로 다신 집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 절대 나가지 말거라.”
장공주부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 * *
황궁 내, 월왕이 무릎 꿇고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자, 부황을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황제도 월왕을 자세히 살폈다. 다행히 좀 야위었을 뿐 크게 다친 데가 없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소자, 강남 소금세 사건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죄로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황제는 유왕이 올린 상주서가 생각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일은 유왕한테 맡겼으니 손을 떼거라.”
“부황, 강남 소금세 적자 액수가 상당히 큽니다. 전에 양주성 소금 상인들은 관원들과 결탁해 일부러 염선 침몰 사건을 위조했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제대로 조사하지 않으면 조정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월, 앞으로 손 떼라고 했거늘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월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월왕의 풀이 죽은 모습에 황제는 마음이 아팠다. 이번 강남행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는 월왕이었다. 심지어 기수성에서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목운요가 구하러 가지 않았더라면 월왕은 벌써…….
황제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군월, 네가 강남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운요 덕에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이 이미 서릉에 널리 퍼졌다. 혹시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해 보았느냐?”
월왕이 냉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황. 소자, 운요를 사모합니다. 저희 두 사람을 허락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네, 잘 압니다.”
황제가 월왕 앞으로 다가갔다.
“너와 목운요는 혈연 사이다. 둘이 함께한다면 필히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텐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소자,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앞으로 황위에 오르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후회 없습니다.”
월왕의 단호한 대답에 황제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군월, 운요 생각은 해 봤느냐? 운요도 너처럼 모두 감당하고 모든 걸 버릴 수 있을까? 세상 어떤 여인이 자신의 부군이 패업을 이루길 바라지 않겠느냐? 네가 그녀를 위해 모든 걸 포기했을 때, 운요가 그런 너를 변함없이 좋아할 것 같으냐?”
월왕이 고개를 들었다.
“소자, 운요를 믿습니다. 요아는 절대로 부와 명예 때문에 변심할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황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다면 마음 가는 대로 하거라. 짐도 이젠 나이가 들어 참견할 힘이 없구나.”
월왕이 기쁜 기색으로 인사를 올렸다.
“감사드립니다.”
사실 황제가 노발대발할 줄 알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손쉽게 해결되다니, 월왕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네 고모께서도 걱정 많이 하셨다. 장공주부에 가서 인사 올리거라.”
“네.”
월왕이 나간 뒤, 황제는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서립, 지금 당장 목운요에게 궁으로 오라 전하거라. 월왕이 장공주부에 도착하기 전에 전해야 한다.”
“네.”
* * *
식사를 마친 목운요는 입궁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다.
“외할머니, 폐하께서 왜 갑자기 저를 부르시는 걸까요?”
장공주가 목운요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가 보거라. 설마 황상께서 널 괴롭히시기라도 하겠니?”
목운요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목운요를 태운 마차가 장공주부를 떠나자마자 월왕이 뒤이어 도착했다.
장공주는 작게 웃어 버렸다.
“황상 성격도 참 급하시지. 먼 길 달려온 아이들한테 쉴 시간을 주시지 않는군.”
허연한은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 황상께서 요아를 난처하게 하시지 않겠지요? 아무래도 월왕과 요아가 진짜 혈연이…….”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도 가짜가 되는 법이다. 황상께는…….”
장공주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화제를 돌렸다.
“황상께서 절대로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라 약조하셨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 * *
입궁한 목운요는 곧장 황제의 서재로 안내되었다.
황제는 여전히 위풍이 넘쳤으나 귀밑에 흰 머리가 많이 나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목운요, 폐하를 뵙습니다.”
글을 쓰고 있던 황제가 붓을 멈추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일어나거라. 무사히 잘 다녀왔느냐?”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눈에 띄게 여윈 목운요를 보자 황제의 눈빛이 조금 유해졌다.
“애썼구나. 혹 바둑을 둘 줄 아느냐?”
“외할머니께 배우긴 했지만, 능통하진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도 목운요는 당황하지 않고 계속 웃음을 유지했다.
머지않아 서립이 바둑판을 가져왔다.
목운요의 편안한 모습에 황제도 마음이 어느 정도 놓였다. 사실 그녀를 떠보려고 부른 것이었지만, 어쩐지 바둑을 같이 두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폐하, 제가 손아랫사람이니 흑돌을 써도 괜찮으신지요?”
“그래.”
목운요가 기쁜 얼굴로 바둑알을 살포시 두었다.
그 모습에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짐도 누님한테서 바둑을 배웠지. 그리고 누님을 이기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했기 때문에 누님께 배운 대로 한다면 절대로 짐을 이길 수 없다.”
이에 목운요는 급히 방금 둔 수를 물렀다.
“폐하, 한 번만 무르겠습니다.”
“한번 두면 끝이다. 그게 군자의 기풍이지 않느냐?”
“전 군자가 아니라 괜찮습니다.”
목운요가 흑돌의 위치를 바꾸며 생글생글 웃었다.
결국 수를 세 번 무른 끝에 그녀가 겨우 반집으로 졌다.
황제는 불평하면서 바둑을 내려놓았다.
“기풍이 좋지 않아 더 이상 두고 싶지 않구나.”
“폐하, 제가 돌아가서 더 연마해 오겠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수를 무를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요.”
“짐이 너와 같을 줄 아느냐? 수를 무르는 건 군자의 기풍이 아니다.”
“절대로 폐하께서 수를 물렀다는 사실을 누설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황제는 어이가 없어 그만 웃어 버렸다. 월왕 때문에 무거워졌던 마음도 어느샌가 가벼워져 있었다.
“너 참…… 아니다. 그나저나 하명차가 다 떨어졌더구나. 서릉으로 돌아왔으니 하루빨리 새로 만들어서 짐한테 선물해 줄 수 있겠느냐?”
“네. 돌아가자마자 최상급 찻잎을 준비하겠습니다.”
몸을 곧게 세운 목운요는 마치 한 떨기 우아한 연꽃같이 생기가 넘쳤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서 돌아가거라. 더 있다간 누님께서 찾으러 오실지도 모르겠구나.”
“운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가거라.”
목운요가 떠난 후, 황제는 다시 한번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그에 서립이 용기 내어 말했다.
“폐하의 너그러움에 탄복합니다. 폐하께서 일부러 양보하지 않으셨다면 온한 군주께서 크게 지셨을 겁니다.”
황제가 바둑판을 어지럽히며 답했다.
“네 생각이 틀렸다.”
“그게 무슨…….”
황제가 웃으며 흑돌 하나를 집었다.
“운요는 역시 누님의 외손녀더구나.”
* * *
목운요가 서재에서 나오자 금란과 금교가 곧장 다가왔다.
“소저, 별일 없으셨죠?”
“아무 일 없으니 어서 돌아가요.”
“월왕 전하께서 마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둘러 마차에 탄 그녀는 근심 어린 월왕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폐하께선 하명차가 다 떨어져 새로 만들어 달라고 부르신 것뿐이에요.”
월왕은 그녀에게서 별다른 기색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우리 사이에 대해 아무 말씀 없으셨느냐?”
장공주부에 도착한 월왕은 목운요가 궁으로 불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부황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녀를 난처하게 할 수 있었다.
목운요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전혀 없었어요. 사야께는 혹시 뭐라고 하셨나요?”
“우리 둘의 일은 상관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라고 하시더구나.”
목운요가 멈칫하며 말했다.
“사야, 아무래도 뭔가 수상해요.”
외할머니도, 황상도 너무 쉽게 두 사람을 인정해 주고 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의 항렬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같이 말이다.
월왕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가자, 목운요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요. 두 분의 허락이 있어야 저희한테도 좋은 건데 말이죠.”
“요아, 혹시…….”
“혹시 뭐가요?”
“……아니다.”
월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아직 증거가 없기에 더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 *
목운요는 월왕을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육냥을 불렀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분부하신 대로 은표를 준비해 뒀습니다.”
목운요가 입꼬리를 올렸다.
“고생 많았구나.”
“그보다 뭔가 알아낸 게 있는데, 월왕 전하에 관한 일입니다.”
“사야에 대해?”
“네. 월왕 전하께서 관성에 계실 때 사람 한 명을 살해하셨는데, 그가 바로 육대세가의 우두머리였던 낙씨 가문의 낙곤입니다.”
“그건 사야께 들었다. 육대세가라…….”
목운요는 뭔가 심상치 않은 내막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냥, 사람을 시켜 더 알아보거라. 분명히 뭔가 큰 비밀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네.”
육냥이 대답하고 나서 애틋한 눈빛으로 목운요를 응시했다. 강남에서 고생을 해서인지 그녀는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주인님, 한동안 편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육냥, 너…….”
시선을 느낀 육냥은 다시 예전의 공허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더 분부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니다. 가서 쉬어라.”
순간 육냥이 자신을 흠모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들여다봤을 땐 전과 다름이 없어, 목운요는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