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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09화 (309/442)

309화 이간질

* * *

다음 날, 월왕은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목운요도 어제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나약한 사람이 아니기에 더 이상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리라.

진찰받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호전되는 걸 본 백성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섣부른 판단에 후회를 느끼며, 너도나도 진찰을 받으려고 찾아왔다.

관청 심부름꾼들이 나서서 질서를 지키게 했지만, 백성 수가 하도 많다 보니 현장이 뒤죽박죽이었다.

태의들도 다른 데 신경 쓸 겨를 없이 진맥하느라 바쁜 반면, 약 달이는 걸 지켜보는 목운요는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그때, 사태 파악을 위해 밖을 다녀온 시위가 보고를 올렸다. 다행히 기수성을 제때 수습한 덕에 역병이 더 이상 다른 성으로 번지지 않았다. 목운요와 월왕은 그제야 한시름이 놓여 당장 서릉으로 상주서를 보냈다.

* * *

서릉에서 황제는 죄기조를 공포한 뒤, 제단에서 향을 피우며 복을 기원했다.

기원이 끝나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서릉 백성들은 이를 길조라 여기며 그동안의 전전긍긍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월왕의 상주서도 서릉에 도착했다. 이를 본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온 천하에 소식을 알렸다.

기수성 이재민 중 신체 허약으로 죽은 열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완치되었으며, 관성의 역병도 완전히 통제된 것이다.

소식을 듣고 서릉 전체가 들끓었다.

백성들이 그동안 전전긍긍했던 이유는 역병에 걸리면 거의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수성과 관성 환자들이 모두 완치됐다고 하니, 그 말인즉 앞으로 역병이 다시 돌더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월왕의 상주서를 들고 직접 장공주에게 찾아갔다.

“누님, 이것 좀 보십시오.”

상주서를 본 장공주의 얼굴에도 기쁜 기색이 돌았다.

“참으로 다행이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운요의 처방전이 아니었더라면 기수성과 주변의 다른 성 모두 몰락했을 겁니다.”

장공주가 두 손을 합장하며 절을 올렸다.

“아미타불, 지켜 주신 신령님 감사합니다. 폐하, 이번에 운요의 공로가 크니 제대로 상을 내리셔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아주 큰 상을 내릴 겁니다! 누님, 이렇게 기쁜 적이 얼마 만인지 모릅니다.”

단비 같은 소식에 황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동안 느꼈던 참담한 감정이 싹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장공주도 기뻐하는 한편, 걱정도 들었다.

“황상, 군월과 운요가 이번 일을 겪으면서 아마 서로에 대한 정이 더 깊어졌을 겁니다……. 혹여라도 누가 운요한테 실없는 소리를 해 댄다면 군월은 아마 참지 못하고 일을 낼 수도 있어요.”

“짐은 유아한테도, 군월한테도 큰 빚을 졌어요. 그 아이가 드디어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았으니, 더 이상 억울함을 겪지 않게 해야지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겠으니 염려 마십시오.”

“폐하께서 저보다 세심하시니 믿고 맡기겠습니다.”

황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군월과 운요가 큰 공을 세웠으니, 그들을 위한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릉왕과 진왕이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대신, 강남으로 가서 강둑을 재건하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회개하는 마음이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 * *

목운요가 약속한 사흘이 끝났다. 진찰소를 철거하려 하자 백성들이 몰려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태의들은 겉으로는 난처해했지만 속으로는 득의양양했다. 온한 군주가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아마 성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였을 것이다. 게다가 성문에서 막무가내로 활을 쏘기까지 했으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었다!

나무에 묶여 있던 사람들도 풀려난 후 목운요 일행에게 가서 사죄했다.

태의들은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인 뒤, 기존 처방에 무엇을 추가하면 더 효과적일지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한편, 강남으로 돌아온 유왕은 곧장 관성으로 와 월왕에게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다.

“내가 이번에 크게 망신당했지 뭐야.”

“무슨 일입니까?”

유왕은 자신이 대전에서 울며불며 대신들한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은 사실을 말했다.

이를 들은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월왕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형님, 민 소저께서 알게 되면 어쩌시려고요?”

“당연히 미래의 장인어른이 그 자리에 없는 걸 확인하고 그랬지.”

목운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민 소저 귀에까지 들어갈 텐데요?”

유왕이 팔짱을 끼며 씩씩거렸다.

“소문은 믿을 게 못 되지. 그리고 소문으로 내 체면을 깎아내리는 사람은 분명 내가 강남에서 세운 공로가 샘나서겠지. 부황께 아뢰면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것이다.”

목운요와 월왕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 * *

근 열흘간의 진찰 끝에 관성의 역병이 통제되었다.

목운요와 월왕은 곧장 서릉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마침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도로가 진흙탕이 되어 갈 수가 없었다.

월왕은 목운요와 함께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떨어지는 빗방울을 쳐다보았다.

“사야, 비가 언제쯤 그칠까요?”

목운요가 고개를 돌리자 귀에 걸린 작은 백옥 귀걸이도 찰랑찰랑 움직였다.

월왕은 창밖으로 손을 뻗어 빗방울을 받으며 대답했다.

“금방 그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자.”

그때, 유왕이 우산을 쓰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우, 운요. 릉왕과 진왕이 임강성에 도착했다는구나. 난 그리로 갈 테니 두 사람은 비가 그치는 대로 서릉으로 돌아가거라.”

월왕이 난감한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그에 목운요가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유왕 전하, 저희도 같이 임강성으로 갈게요.”

목운요는 유왕 혼자 보내 놓고 마음 졸일 바에야, 차라리 같이 가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같이 간다고?”

“폭우 때문에 임강 강둑과 기수 강둑 모두 위태로울 텐데, 전하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저희도 함께 돕겠습니다.”

유왕은 놀란 눈으로 목운요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일관된 일 처리 방식을 떠올리며 못내 감탄했다.

“넷째 아우가 참 복이 많구나. 그럼 지금 바로 떠나자. 운요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좋겠다. 아우도 찬성이지?”

“네.”

목운요를 바라보는 월왕의 눈빛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 * *

곧장 마차가 준비되고 짐 정리도 끝났다. 목운요와 태의들을 태운 마차가 빗속을 뚫고 성문 쪽으로 향했다.

백성들은 목운요 일행이 떠날 채비를 하는 걸 보고 다급히 소리쳤다.

“왕야와 군주께서 떠나신다!”

그 소리에 많은 사람이 집을 나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문발을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빗속에 서 있는 백성들의 초조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월왕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재빨리 성문을 빠져나갔다.

사서가 못내 아쉬워하며 물었다.

“소저, 백성들이 배웅하러 나온 듯한데 작별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린 보답을 바라고 도와준 게 아니잖아. 그리고 저들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면 작별 인사 없이 떠났다고 해서 그 마음이 사라지진 않을 거야.”

목운요는 마차에 기대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 눈에는 근심, 걱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시각, 릉왕과 진왕은 굳은 표정으로 임강성 관아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찻잔은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뒤였다.

릉왕이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몇 해 전에 임강성에 순찰하러 온 적이 있었지. 마침 단오절이라 임강에서 용선 경기가 한창이었고, 백성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응원하여 열기가 대단했어. 하나 올해는 아무래도 못 보겠지.”

릉왕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셋째 아우, 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네에 비하면 한참 멀었더군. 임강성이 이 모양인 걸 보면 기수성은 상황이 더 심각하겠지.”

“정말 걱정된다면 말로만 이럴 것이 아니라 직접 가 보시면 되지요.”

릉왕과는 오랫동안 경쟁해 온 사이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인정사정 볼 것도 없었다.

릉왕은 냉소를 지었다.

“자네는 백성들이 걱정되지도 않아? 자네가 강남 소금세 횡령을 숨기기 위해 백성들을 위기에 빠트린 걸 부황께서 아신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진왕이 고개를 돌려 릉왕을 향해 비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지경까지 이른 데에 형님 몫도 있다는 걸 잊었나 본데- 우린 지금 같은 배에 타 있고, 우리끼리 싸우게 되면 유왕과 월왕만 이득을 보는 겁니다. 그런 결말을 바라는 건 아니겠죠?”

“둘째는 전장에만 관심이 있지, 황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월왕은 오랫동안 월서에 추방되어 있어 황위에 오를 능력도 없다.”

“참 순진하시군요.”

진왕이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유왕의 모비 제 귀비는 후궁에서 어느 정도 세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국후 제여년은 부황의 신임을 얻어 병권을 장악하고 있지요. 제여년의 세 아들도 능력이 뛰어나고, 특히 제봉이 호부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과연 저희가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요? 유왕이 지금껏 가만히 있었다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릉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진왕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월서에 있던 월왕도 갑자기 서릉으로 돌아왔지요. 그가 맹한동을 죽여 맹씨 가문을 건드리기까지 했는데, 부황께서 죄를 물으셨나요? 게다가 그자는 목운요와 각별한 사이고 장공주 전하의 총애도 한 몸에 받고 있지요. 설 전야제 때 죽 나눔으로 민심을 얻고, 이번에 강남 구휼에까지 발 벗고 나섰으니 서릉으로 돌아가면 위세와 명성이 더 높아질 것입니다. 아무리 황후께서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이했다 해도, 월왕은 부황의 유일한 적자로서 충분히 전세 역전이 가능하지요.”

릉왕이 어둑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들며 물었다.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나를 앞세워 유왕과 월왕을 처리하고 싶어서인가?”

진왕은 냉소를 멈추고 평소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형님. 그저 형제끼리의 잡담에 불과하지요.”

릉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찻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이내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진왕을 보며 말했다.

“미꾸라지가 아무리 출세해 봤자 용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여기서 이간질할 시간에 눈앞의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부터 고민하는 게 좋을 거다.”

진왕은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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