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이번 생에 지은 죄
그 시각, 월왕은 사람들을 데리고 기하 수로 탐사에 나섰다. 강물도 깨끗해지고 강둑도 보수 작업을 마친 상황이었다. 가끔 물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도 보였다.
약재를 무사히 관성까지 운송해 온 위일과 운춘이 월왕한테 공손히 아뢰었다.
“왕야, 서릉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폐하께서 유왕 전하의 셋째 외삼촌인 제운을 임강 강둑과 기하 강둑 재건 감독으로 임명하셨다고 합니다.”
월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씨 가문이라면 마음이 놓이겠군. 다만 우기가 늦어졌으면 좋겠는데…….”
강남은 비가 많이 와 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린다면 보수한 강둑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알아보라고 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순간 월왕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어디 있느냐?”
“관성에 있었습니다. 일단은 성 서쪽에 위치한 작은 집에 가뒀습니다. 데리고 올까요?”
“아니다. 내가 직접 만나러 가지.”
“네.”
* * *
백성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드는 바람에, 목운요와 태의들은 늦은 시간까지 진찰을 해야만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사금과 사기가 미리 준비해 둔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오늘 하루 힘들었을 텐데 두 사람도 어서 가서 쉬렴.”
“네, 소저.”
목욕을 마친 목운요는 머리카락을 반쯤 말린 채, 창가에 서서 마당에 핀 모란꽃을 쳐다보았다.
“벌써 모란꽃 피는 계절이 왔구나.”
문득 저도 모르게 월왕의 방 쪽으로 눈길이 향했다. 오후에 본 뒤로 통 보이지 않던데,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 걸까?
한편 그 시각, 작은 마당에 한 노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월왕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월왕 전하…….”
월왕의 표정은 한겨울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낙가 나리.”
“낙가 나리라뇨. 낙씨 가문이 없어진 지 오래인 마당에 낙가 나리가 어딨겠습니까. 그보다 월왕 전하께서 다 죽어 가는 소인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낙씨 가문은 첫째가는 명문대가라 부황께서도 낙가 나리께 예의를 갖췄었지.”
“제게 굴욕을 안겨 주러 오셨군요.”
노인이 자조하듯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얼굴 뒤에 숨길 수 없는 명문대가의 기운이 풍겼다.
“오늘 그대를 찾아온 이유는 황궁에서 있었던 진실을 알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모후가 부황의 아들 열 명을 독살한 죄로 유폐당해 죽었다고 하지만, 난 절대 믿지 않아. 오늘 그 진실을 알아야겠다.”
순간 노인의 두 눈에 슬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전하,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황후 마마께서 돌아가신 뒤 육대세가도 흩어지고, 이 늙은 몸뚱어리 하나만 겨우 목숨이 붙어 있지요. 소인이 눈에 거슬린다면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전하 눈에 띄지 않겠습니다.”
“모후께선 돌아가셨지만 살아남은 나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지. 한 나라의 황후가 황자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왜 은밀히 죽이는 게 아니라 직접 자신의 거처로 불러 독살했을까?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 부황께서는 진실을 숨기려 하고, 고모님께서도 일절 언급하시지 않아 자네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육대세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당시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증인이지.”
노인은 머리를 깊이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왕이 가까이 다가가 웅크리고 앉았다.
“낙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얘기하거라.”
노인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전하,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게 전하를 위한 일입니다.”
월왕의 표정이 점점 더 싸늘해져 갔다.
“나이 많은 노인을 고문하고 싶진 않다. 다시 한번 묻는다. 그때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전하,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할지 말지는 내 일이다. 당장 진실을 밝혀라!”
월왕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낙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월왕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일어서더니 빠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차가운 빛이 서린 칼끝이 낙곤의 목 앞에서 멈췄다.
“말하지 않으면 진실을 안고 저승길에 오를 것이다!”
“전하, 죄 많은 소인을 죽이면 전하의 손만 더럽혀질 뿐입니다. 전하께서 떠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하나 월왕은 표정 변화 없이 손에 든 검을 더 가까이 갖다 댈 뿐이었다.
“낙가 나리의 간사함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 육대세가의 구족을 모두 멸했을 때도 당신만이 살아남은 걸 보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짐작이 간다. 내가 당신 말을 믿을 것 같아?”
“전하를 속일 마음은 없습니다. 저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전하 손에 죽을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누구 손에 죽든 무슨 상관이지?”
“소인, 워낙 죄를 많이 지어 죽는 것으로도 죄를 씻겨 낼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러나 절대 전하께 오명을 씌울 순 없습니다…….”
“죄인을 죽이는데 무슨 오명이 씌워진단 말인가?”
“전하.”
낙곤이 바닥에 꿇어앉은 채 벌벌 떨며 말했다.
“부디 이번만은 절 믿어 주십시오.”
월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이 어둑해졌군. 늦어지면 운요가 걱정하겠어.”
그 말과 함께 손에 든 검을 앞으로 찔렀다. 칼끝이 낙곤의 목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전하…….”
그때, 결심을 마친 듯 낙곤이 두 손으로 검을 꽉 잡았다. 순식간에 피가 흘러나왔고, 날카로운 칼날에 손가락이 잘려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검을 잡아당겨 자신의 목을 찔렀다.
“이번 생에 지은 죄는 지옥에 가서 받겠습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말이나 소로 태어나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전하,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온한 군주와 함께 현재를 소중히 살아가십시오.”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자신의 숨통을 끊은 낙곤이 바닥에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월왕은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퍼진 피바다가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다.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위일과 운춘이 황급히 달려 들어왔다.
“왕야, 괜찮으십니까?”
월왕은 차가운 눈빛으로 낙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데려가서 화장하거라.”
“네.”
* * *
월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마당에 들어섰다. 죽기 전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은 낙곤 때문에 가슴속에 분노와 증오가 차올랐다. 코끝에는 낙곤의 피 냄새가 계속 맴돌며 가시질 않았다.
그는 옷깃을 펄럭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낙곤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그는 모후의 죽음에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말로 표현 못 할 초조함이 생겨났다.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목운요의 방 앞에 와 있었다. 문에서 새어 나오는 따스한 빛에 마음속의 화가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어 방 안에 들어섰다.
목운요는 창가에 엎드려 자고 있었고, 옆으로 드리운 머리카락이 그녀를 더욱 가녀려 보이게 했다.
외투를 덮어 주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려던 그때, 목운요가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사야?”
“나 때문에 깼구나.”
목운요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왜 이리 늦게 오셨어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니다. 누굴 만나느라 조금 늦었구나.”
목운요는 월왕을 살펴보더니 웃음기를 거두었다.
“옷에…….”
월왕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살펴보았다. 옷에 핏자국이 묻어 있는 걸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다. 핏자국을 보자 또다시 낙곤이 죽을 때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해졌다.
월왕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목운요는 얼른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사야, 왜 그러세요?”
월왕은 목운요를 끌어당겨 와락 품에 안았다. 언제나 강인했던 미간에 나약함이 드러나 있었다.
“운요, 오늘 낙곤과 만났다.”
“낙곤이요?”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전혀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오래전 일이지. 낙곤은 육대세가 중 가장 세력이 큰 낙씨 가문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워낙 세력이 방대해 부황과 고모님께서 몇 번이나 탄압했을 정도지. 모후가 바로 육대세가 중 세력이 가장 약한 위씨 가문 출신이다.”
월왕의 말을 듣고 목운요는 위 황후의 죽음을 떠올렸다.
“혹시 황후 마마의 죽음을 알아내려고 그자를 만난 건가요?”
“맞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
월왕은 혹시라도 품에 안겨 있는 목운요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레 힘 조절을 했다.
“요아, 왜 고모님께서 나에게 진실을 숨기려 하시고, 왜 낙곤은 죽을지언정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걸까…….”
월왕의 초조한 마음을 눈치챈 목운요는 손으로 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저도 출신을 밝히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었으니, 사야께선 더 심할 거라 생각해요.”
목운요가 말을 이어 갔다.
“황후 마마께선 국모 신분인 데다, 황자 열 명의 죽음과도 연관되어 있고, 또 육대세가 몰락과도 엮여 있으니……. 그 누구도 연루되고 싶지 않은 거지요. 그러니 진실을 알아내기가 더욱 어렵겠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사야는 절대로 좌절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진실을 알아낼 거예요.”
귓가에 퍼지는 목운요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월왕의 초조와 분노가 차츰 수그러들었다.
“요아,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목운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니 마음이 좀 편해졌나 보네요.”
“그래. 어떤 고난에 부딪히든,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진실을 알아내고 말 테다.”
“좋아요. 저도 함께할게요.”
목운요의 진심 어린 약속에 월왕의 마음이 점점 녹아내렸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또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았구나.”
목운요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사야를 기다렸다가 말릴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늦을 줄은 몰랐죠.”
그에 월왕이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수건을 가지고 와,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에 눕혔다. 그러곤 수건으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월왕의 다리를 베고 누운 목운요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부터 월왕의 행동은 점점 더 대범해져 갔다. 그러나 이런 자연스럽고 가까운 행동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행복했다.
월왕은 부드럽고 세심하게 머리를 말려 주었다. 겨우 다 말리고 목운요를 들여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곤 이불을 덮어 줬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월왕은 한 시진 정도가 지나서야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