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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04화 (304/442)

304화 편히 잠들기를

월왕의 만류에 목운요는 한쪽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월왕은 자신이 강남에서 겪은 모든 일을 유왕에게 말했고, 그동안 확보한 증거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운요가 아니었으면 전 이미 황천길에 올랐을지도 모르지요.”

화가 잔뜩 난 유왕이 눈에 불을 켜고 물었다.

“너를 늑대 무리한테 내던진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내가 똑같이 갚아 줘야겠구나!”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그나저나 임강성의 일은 잘되어 갑니까?”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네가 찾아낸 금형이 더해진다면 잘 마무리될 것 같구나.”

사실 지금까지의 증거를 진왕과 연관 짓기에는 연관성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진왕이 벌인 일임을 부황이 믿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은 실상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 아니라, 부황께서 믿을 만한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다만 워낙 큰 사건이다 보니, 부황께 진실을 말씀드려도 릉왕과 진왕의 죄를 묻지 않을 수 있다.”

월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놀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황자들의 권력 싸움으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황실의 위엄이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요. 부황께선 절대 그런 상황을 만드시지 않겠죠.”

유왕이 손으로 찻잔 뚜껑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도 두 사람을 그냥 두시진 않을 거다.”

높은 자리일수록 말 못 할 고충이 많은 법이다.

목운요도 이런 결과를 얼추 예상했다.

그래도 황상의 성격이라면, 백성의 죽음을 개의치 않아 하는 그런 자에게 절대로 황위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준비한 큰 선물까지 더해지면 진왕을 제대로 막다른 길로 몰아넣을 수 있을 터.

고민을 털어놓은 유왕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부황께서 파견한 태의들이 곧 기수성에 도착할 것이다. 내가 데려온 이들도 여기 남겨 두마. 도로 정리에 쓰거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쓰거라.”

월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기 일은 저희한테 맡기십시오. 임강성 일은 형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왕이 다가가 월왕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 일은 네 공로가 크지. 나중에 두 사람이 잔치를 올릴 때 형수랑 같이 큰 선물을 해 주마.”

유왕의 장난에 월왕도 한마디 보탰다.

“그건 형님께서 장가부터 가고 나서 다시 얘기합시다.”

유왕은 짧은 만남을 가진 뒤, 곧바로 밤길을 달려 임강성으로 돌아갔다.

* * *

홍수가 어느 정도 빠지자, 기수성 안에 들어가 상황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목운요는 기수성에 진입하는 이들에게 미리 준비해 둔 약을 한 알씩 나눠 주며 당부했다.

“한 알뿐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목숨을 살릴 수 있으니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

약을 받은 병사들은 적잖이 놀랐다. 이 약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떠나, 모든 이의 안위를 생각해 주는 목운요의 마음에 탄복한 것이다.

이내 준비를 마치고 기수성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도로 곳곳에는 사람과 짐승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날씨가 따뜻해진 탓에 시체들이 부식되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약한 악취를 풍겼다.

월왕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살기 가득한 눈으로 분노했다.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똑똑히 봤어야 하는데!”

천재지변이라면 하늘 탓을 하면 그만이지만, 이건 명백한 인재(人災,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재난)였다.

마땅히 평온한 생활을 살아가고 있어야 할 백성들이 조정의 권력 싸움에 의해 무고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몇몇 병사들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 구토까지 했다. 지옥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났던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수성의 현실을 마주하자 목운요도 저도 모르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참담한 심정을 눈치챈 월왕은 옆에서 손을 꽉 잡아 왔다.

목운요가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한시라도 빨리 안으로 들어가 이재민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성안이 전부 진흙에 덮여 있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병사들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청소 도구를 들고 도로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항이 와서 소식을 알렸다.

“왕야, 기름과 장작이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월왕은 애써 분노와 슬픔을 삭이며 대답했다.

“시체를 불태울 준비를 하거라.”

“네.”

* * *

성내 공터, 기름과 장작 사이에 시체들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우항이 횃불을 들고 다가가려는 순간, 월왕이 막아서며 그의 손에서 횃불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숙연한 표정으로 다가가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목운요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앞으로 두어 발자국 나아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한 채 불경을 읊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병사와 백성들은 그 광경을 보더니 목운요를 따라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악취 섞인 시커먼 연기가 불길과 함께 하늘 위로 솟구쳤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악취였지만, 그 누구도 떠나지 않았다.

불경을 읊조리는 목운요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정신을 집중시키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지장보살본원경의 마지막 구절을 읊고 난 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떠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뒤에 있던 이들도 함께 큰 소리로 외쳤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황실로부터 시작된 이 죄는 반드시 황실의 피로 갚아야 한다. 월왕은 기필코 릉왕과 진왕의 죄를 물으리라 깊이 다짐했다.

불이 꺼진 뒤, 그는 잿더미를 수습해 산속에 묻고는 그 앞에 비석을 세워 두었다.

지금은 비석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지만, 나중에 기수성이 완전히 수습되면 이번에 목숨을 잃은 모든 백성의 이름을 전부 새겨 둘 생각이었다.

* * *

셋째 날이 되었을 때, 태의들이 도착했다.

그사이 성에 들어온 병사와 백성들 사이에 역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병으로 격리시킨 이재민 중 한 명은 숨까지 거뒀다.

처음엔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던 태의들도 기수성의 상황을 보더니 최선을 다해 역병을 치료해 나갔다.

그러나 기수성 하류에 위치한 관성까지 역병이 번지는 건 막지 못했다. 관성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관원들은 백성들을 진정시키는 한편 급히 서릉에 현재 상황을 전했다.

상주서를 읽은 황제는 무거운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병이 관성에까지 퍼졌군…….”

관원들은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기수성을 폐쇄하고 모든 이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가 거들떠보지도 않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궁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시위를 벌였다.

장공주부 내, 곡 마마가 관원들의 시위를 장공주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장공주는 냉소를 지었다.

“진왕이 마지막까지 발악하는군. 이렇게 근성 있다는 걸 왜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

곡 마마는 한편에 선 채 침묵을 지켰다.

“군유가 돌아올 때가 됐지?”

“네. 내일 서릉에 도착하실 듯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장공주가 조용히 명했다.

“사람을 시켜 진비 가문을 끌어내리거라.”

“네, 전하.”

황제는 출신이 미천한 진비를 가엽게 여겨 그녀를 아껴 주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편애로 인해 미천한 출신인 진비가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키워 갔다. 진왕이 그동안 좋은 입지를 갖게 된 것도 진비의 공로가 컸다.

하나 오늘부로 진비는 다시 미천한 출신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 * *

궁 앞에서 사흘 동안 꿇어앉은 채 버티고 있던 관원들 대다수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에 황제가 드디어 그들에게 입궁을 명했다.

얼굴이 잿빛이 된 관원들은 휘청이며 일어나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 안에는 황제가 옥좌에 앉아 있었고, 계단 바로 아래에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대인들, 그동안 별일 없으셨지요? 밖에서 사흘이나 있으셨다더니, 안색이 생각보다 좋네요. 이토록 건강하시니 다음 변경 전투 때 여러분을 최전방으로 보내야겠군요.”

남자를 본 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왕 전하, 강남에 계셔야 할 분이 어찌 여기 계시는 겁니까?”

유왕은 아무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이에 관원들은 등 뒤가 오싹해지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살기에 저도 모르게 기가 눌렸다.

“소신,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는 냉랭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꿇는 걸 좋아하지 않느냐? 소원대로 실컷 꿇게 해 주지.”

“폐하, 소신들은 오로지 백성들 생각뿐입니다. 저희가 상주한 대로 기수성을 폐쇄했더라면 역병이 다른 성까지 퍼지진 않았을 겁니다. 이대로 두신다면 강남의 모든 백성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폐하, 손 대인의 말이 맞습니다. 부디 간언을 들어 주시어 기수성을 폐쇄해 주십시오.”

이를 듣고 있던 유왕은 갑작스레 황제 앞에 무릎을 꿇더니 황자로서의 위엄도 잊은 채 목놓아 통곡했다.

“부황, 소자가 간청드리오니 강남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방금 그 말을 한 손 대인과 남 대인을 죽여 주십시오!”

“유왕 전하,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유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이어 갔다.

“부황. 기수성의 백성 중 현재 살아남은 이는 천 명이 채 되지 않으며, 그중 삼백여 명이 역병에 감염되었습니다. 두 대인의 말대로라면 겨우 목숨을 건진 이 백성들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겁니까? 그건 극악무도한 짓입니다!”

“폐하, 작은 일로 큰일을 그르칠 수는 없습니다. 몇백 명 때문에 더 많은 백성이 위험해져서는 안 됩니다!”

“헛소리 집어치우거라!”

유왕이 분노하며 고개를 돌렸다.

“관원으로서 백성을 구할 생각은 못할망정, 죽일 생각부터 하다니! 관성에도 역병 환자가 생겼으니 그럼 관성도 폐쇄하여 삼만여 명의 백성들을 그대로 죽여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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